김민기의 ‘아침이슬’처럼 자연스런 개혁을
왜 ‘자생성에 굴종’을 거부했던 목적의식적 전위는 파산했을까? 아담 스미스가 강조한 ‘동감’이 ‘자연발생적 질서’를 만들고 사회를 진화시키는 원리를 놓쳐
<아침이슬>은 어떻게 민중가요가 됐을까
지난 7월 21일 소극장 ‘학전’을 세운 운영자이자 <아침이슬>의 작곡가인 김민기 선생이 별세했다. 선생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뒷것’으로 살다가 가셨다. 여러 차례 ‘좌파 운동권의 대부’로 칭송되는 것을 거부했던 선생의 유지를 무시하고 자꾸 운동권 프레임으로 그를 호명하는 운동권 출신들을 보면서 ‘왜 그럴까?’ 의문이 생긴다.
이런 운동권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뒷것 예술인’으로서 선생의 정체성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운동권 역할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오래된 습속인 ‘자생성’과 ‘목적의식성’이란 개념을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부터 36년 전, 대학교 학습모임에서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키는데 지침이 되었던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what is to be done)」을 읽은 적이 있다. 가장 빨리 눈에 들어왔던 단어는 ‘자생성에 굴종’, ‘목적의식성’과 같은 자극적인 개념이었다.
당시는 권위주의적 유습이 많이 지배하고 있었던 시기라 요즘 같이 현대 대의민주주의에서 빠질 수 없는 국민여론을 갈음하는 ‘국민정서법’이나 ‘국민감정’ 그리고 국민정서와 호흡하는 ‘소통의 정치’나 ‘공감의 정치’라는 말은 없었다. 그 대신 대중들의 ‘자생적 의식’을 계몽해야 하는 전위들의 ‘목적의식’이라는 개념이 들어있었다.
자생성이 더 강한 동기일까
자생성(spontaneity)과 의식성(consciousness)이란 무엇이고, 이 둘의 차이는 뭘까? 의식성은 목적한 의도대로 행동하거나 행동하여 얻은 결과를 말하는 것이고, 자생성은 목적한 의도와 상관없이 의도하지 않은 행동을 하거나 그 행동으로 얻어진 결과를 말할 때 사용된다.
예를 들어보면, <아침이슬>이 민중가요가 된 것은 김민기 선생이 전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의식성의 결과가 아닌 자생성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아침이슬>은 순수한 서정적인 노래로 탄생하였으나 선생의 의도와 무관하게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운동권이 부르기 시작하면서 민중가요가 되었다.
김민기 선생의 입장에서 보면, 처음부터 <아침이슬>은 전혀 민중가요처럼 민주화를 촉진하기 위한 목적의식적 활동을 위해 창작한 것은 아니었다. 미술학도로서 회화작업이 막히면 틈틈이 놀이의 일환으로 창작했던 서정적인 노래를 운동권이 가져다가 불렀고, 이 노래는 금지곡이 되면서 의도하지 않게 사회공익적 가치를 창출하는 결과로 나아가게 되었다.
<아침이슬>은 김민기 선생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1970년대 이후 오랫동안 민주화를 갈망하는 시민들의 공감을 얻으면서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함께 부르는 대중적 민중가요로 등극하였다. 이런 <아침이슬>의 사회적 등극은 대중적 공감에 따라 ‘자생적 질서’가 자라난 전형적 예다. 김민기 선생은 1987년 6월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서 많은 시민들이 <아침이슬>을 합창하는 것을 보면서 “소름이 끼쳤다. 이 노래는 이제 저들의 노래가 되었구나”하면서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가는 상황을 체념했다고 알려졌다.
러시아혁명은 목적의식성의 과도한 기대?
<무엇을 할 것인가(what is to be done)>에서 레닌은 노동조합의 임금인상투쟁은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자생적인 노동운동’인데, 노조가 이런 ‘자생성에 굴종’하지 않고 자생성과 타협하지 않고 싸우면서 좀 더 역사의 법칙대로 진보적인 사회주의적 계급운동으로 무장하도록 ‘목적의식성’을 가진 비합법적 전위당이 이를 견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레닌의 주장은 80년대 한국 운동권들에게 도구적 이성과 전략전술로 무장하도록 영향을 미쳤다. 레닌의 주장은 운동권이 자생성에 굴종하지 않고 목적의식성으로 무장하여 대중운동을 지도하도록 ‘전위의식’을 고취하며 ‘전위정당 건설’에 나서도록 부추겼다.
하지만 이런 목적의식성으로 무장한 볼세비키 전위당에 의해 세워진 소련은 불과 100년도 못 버티고 무너졌고, 러시아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이행하였다. 결국 소련식 사회주의는 완전히 붕괴했다. 그렇다면 그 붕괴의 원인은 무엇일까?
원인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지만, 전위들이 고안했던 목적의식성이 아담스미스 등 영국 스코틀랜드 학파들이 강조했던, ‘도덕감정’에 기초한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der)’를 부정하면서 세우려고 했던 ‘인위적인 질서’였기 때문으로 보는 게 적절할 것이다.
즉, 사회주의 및 전위당 질서가 도구적 이성으로 고안된 인위적 질서로서, 계획적 질서로서, 이상적 질서로서, 역사의 필연법칙이라는 관념과 정신승리에 기대어서, 너무 무리하게 이식하려다가 ‘자생적 질서’와 충돌하고 그 역린을 건드리면서 고꾸라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연이 부여한 인간의 본성들
허치슨, 흄, 아담스미스 등 영국 스코틀랜드 상식학파(Scottish School of Common Sense)가 공유하는 세계관에는 종교개혁의 영향에 따라 인간의 ‘유한성’과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정교분리의 시각이 있었다. 정교분리가 됨에 따라 뉴튼의 물리학처럼 자연발생성, 자연성, 자연법과 같은 속성으로 사회질서를 경험적 과정으로 보는 경험론적 시각이 생겨났다. 이런 유한성과 불완전성에 대한 인정은 이성주의를 내려놓고 대안으로 도덕감정과 경험을 중시하도록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아담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에게 ‘도덕감정’은 자기이해와 타인의 이해를 조절하는 ‘동감’(sympathy)능력으로서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는 핵심 개념이었다. 아담 스미스는 칸트 등의 이성주의나 합리주의 철학과 달리 사회질서를 형성하는 ‘도덕과 법은 이성에서가 아니라 감정에서 나온다’는 경험론의 입장을 취했다. 이것이 그의 독특함이다.
여기서 동감이란 자신의 이해를 타인의 입장과 동일한 입장에 놓고 타인이 느끼는 것과 동일한 것을 느낄 수 있는 능력, ‘상상의 지위전환(imaginery change of situation)’ 능력을 말한다. 따라서 아담 스미스에게 ‘정의’란 자연이 부여한 인간 본성으로, 불의에 대해 분노할 줄 아는 분개심이다.
아담 스미스에게 ‘동감’은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 되어 이심전심(以心傳心),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작동하면서 도덕과 상식 및 법과 정의가 된다. 그는 ‘도덕감정’이라는 동감은 ‘공정한 관찰자’라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이기적 인간’과 ‘이타적 인간’도 아닌 ‘동감하는 인간’이 되어 상대의 처지와 입장을 이해하고 서로의 감정일치를 느끼게 하면서 불쾌감과 불행을 피해 즐거움과 행복을 추구하도록 돕는다고 본다.
물론 아담 스미스는 이런 ‘동감’이 ‘공정한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동할 때 ‘적정성(propriety)’이라는 사회질서를 창출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만능해결사로 보지는 않았다. ‘동감’과 ‘공정한 관찰자’의 원리가 통하지 않는 영역에 대해서는 별도로 법과 제도 및 국가의 개입을 강조하였다.
특히, 그는 ‘자유방임주의자’와 다르게 자유로운 경쟁을 가로막는 독점행위에 대해 ‘반독점 규제법’이 필요하다고 강하게 역설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를 이기주의자, 시장근본주의자, 신자유주의자로 보려는 것은 그의 도덕감정론의 핵심을 왜곡하는 시각에 불과하다.
아담 스미스의 역사인식에 따르면, 인류는 사냥사회→목축사회→농업사회→>상공업사회로 문명진화를 겪었지만, 이것은 인간의 목적의식적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자생적 결과의 산물이다.
그에 의하면, 상공업 사회는 인간이 문명사회의 진화를 목표로 보고 의도한 행동으로 얻어진 것이 아닌 각 시대마다 구체적인 한계상황에 놓인 인간이 자연에 순응하고 생존하기 위해 행동하면서 나온 결과로서 자생적 행위의 산물이다. 즉, 분업과 교환을 중심에 두는 상공업 중심의 현대사회는 자생적 질서의 결과로서 사회진화, 사회경험의 산물이다.
따라서 아담 스미스가 살아있었다면, 상공업에 기초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사회주의와 같은 인위적인, 계획적인, 이성적인, 이상적인 체계로 이행할 수 있다는 나이브한 아이디어를 수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린 자연발생성을 경시하는 건 아닐까
결론적으로 볼 때, 역사의 필연적 법칙으로 진보주의, 이성주의, 이상주의를 자처했던 전위들의 목적의식성이 무너진 이유는 뭘까? 아마도 영국 스코틀랜드 상식학파가 중요하게 보았던 자생성과 자생적 질서에 대해 무지했던 탓은 아닐까. 오랜 기간 동안 분업과 교환과 같이 여러 사람들의 상호작용에 따른 사회진화의 산물인 ‘자연발생적 질서’라는 오래된 현실을 너무 얕잡아 보고, 너무 쉽게 상공업사회라는 자생적 질서를 폐지하고 이를 넘어설 수 있다고 보는 ‘순진한 세계관’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진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오랜 사회진화의 산물인 상공업에 기초한 자본주의 시장질서라는 자연발생성을 무시하면서 나이브하게 이상적인, 계획적인, 이성적인, 목적의식적 접근을 시도한 탓이다. 그렇다면, 자생성에 역습당한 목적의식성의 몰락이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몰락한 ‘순진한 세계관’같이 반복된 실패를 막으려면, 인간의 유한성과 불완전성에 대한 인정과 함께 오랜 시간 동안 사회진화적으로 형성된 ‘분업과 교환을 위한 도덕감정’이라는 ‘자연적 질서’를 존중하는 개혁노선을 찾아야 할 것이다.
특히, 정치인이 된 586 운동권 출신이 ‘조국사태’에서 드러난 것처럼, 국민정서법을 무시하거나 국민상식을 깨는 과도한 이성적 논리나 목적의식적 전위의식을 내려놓고, 국민정서에 흐르는 도덕감정에 공감하고 소통하면서 도덕감정이 국민상식이 되도록 하는 ‘공감의 정치’에 열중할 필요가 있다.
정치인들은 자기주장과 논리 이전에 <아침이슬>이 대중에게 공감을 받아 자연스럽게 등극한 것처럼, 시민들의 ‘도덕감정’과 ‘자생적 질서’에 먼저 공감할 필요가 있다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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