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공화국을 지켜라
노벨문학·경제학상 주목받은 한국 한국은 정말 좋은 체제 갖고있을까 곳곳에서 ‘민주’만..’공화’ 정신은 없어 민주정치가 중우정치로 가지 않도록 ‘민주공화국’ 우수성 제대로 인식해야
’국가의 실패’에 주목한 노벨상
올해의 노벨 문학·경제학상 수상자들은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한국의 발자취를 주제로 해 상을 받았다는 점에서 뜻깊다. 수상자들의 키워드가 ‘국가실패’라는 점에서 유사점을 갖는다. 노벨문학상은 5·18 광주의 ‘국가폭력’을 다뤘고, 노벨경제학상은 ‘국가실패’ 사례를 다뤄서다. 두 분야 수상자들은 연약하고 불완전하며 유한한 인간들이 사는 조건 속에서, ‘성공한 국가는 어떻게 탄생하는가’를 물음으로 던지고 있다.
스웨덴 한림원은 한강 작가의 작품에 대해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의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평하며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를 밝혔다. 한강 작가의 2014년 소설 『소년이 온다』는 5·18 광주,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한국 현대사 최대 비극인 1980년 5월 광주의 참상을 다뤘다. 국가 공권력인 군부에 의한 무자비한 폭력이 시민들을 무참히 살상하고 권력을 찬탈하는 데 동원되었음을 고발하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수상자들은 다론 아제모을루, 사이먼 존슨, 제임스 로빈슨이다. 이들은 국가의 흥망성쇠 비밀이 ‘제도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남북한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한국은 ‘성공한 모델’이고 북한은 ‘실패한 모델’이 되었음을 입증했다. 한림원은 이들을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왜 어떤 국가는 부유하고 어떤 국가는 가난한지를 설명했다. 중요한 한 가지 설명은 사회제도의 지속적 차이다. 이들은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도입한 다양한 정치경제 시스템을 조사해 제도와 번영 간의 관계를 증명했다.”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국가의 성공 요인을 지리적 위치, 천연자원, 문화적 특성에서 찾았다. 하지만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은 한반도의 남북차이를 통해 이런 고정관념이 틀렸음을 입증한다. 같은 민족, 같은 언어, 같은 문화를 가진 남북한이 전혀 다른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결정적 차이의 시작은 1945년에 있었다.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정치경제 제도를 선택한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비교한 아테네와 스파르타
로빈슨과 아제모을루는 공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한국은 포용적 제도로 경제를 성장시켰지만, 북한은 폭력과 착취적 제도로 경제를 정체시켰다”고 지적했다. 김정은이 핵·미사일에 집착하면서부터 북한 경제는 더욱 침체와 파국으로 치달은 것이 사실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의 연구는 이태리 정치가인 마키아벨리가《로마사 논고》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흥망성쇠를 비교한 것과 닮았다. 마키아벨리는 현대 ‘democracy’의 기원으로 평가되고 있는, 솔론이 이끌었던 아테네의 ‘민주정’을 리쿠르고스가 이끌었던 스파르타의 ‘혼합정’보다 낮은 정체이며 결국 오래 번영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마키아벨리는 민주정(democracy)이 중우정(ochlocracy)으로 타락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했던 혼합정(republic)에 부합하는 대안으로 ‘로마 공화정’의 우수성을 제시했다.
마키아벨리는 솔론에 의해 지도되는 아테네의 민주정이 “오직 민중에 의해 지배되는 국가를 조직했기 때문에, 부자의 거만함과 민중의 방종을 억제할 수 없어서 ‘페이시스트라토스’라는 참주정의 대두를 막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또한 그는 아테네의 민주정이 붕괴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 이유로 스파르타와 달리 “아테네의 민주정체가 군주제적 권력이나 귀족제적 권력들과 잘 융합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지금으로부터 2300년 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체순환론’을 주장하면서 다양한 정치체제들은 어느 것도 완전하거나 이상적인 상태를 지속하기 어렵고 끊임없이 순환하면서 변화한다고 보았다. 즉 ‘군주정’이 타락하면 ‘참주정’으로, ‘귀족정’이 타락하면 ‘과두정’으로, ‘민주정’이 타락하면 ‘중우정’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유한한 인간이 만들어 내고 운용하는 제도는 그 자체로 완벽할 수는 없으며, 그 제도의 운용을 책임진 사람들이 소명의식을 갖고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뒤로 하고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앞세워야 온전한 형태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민주주의에는 문제 없을까
지금 우리나라의 제도와 체제는 어떠한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이 칭찬한 것처럼 대한민국의 헌정질서가 원래 의도된 대로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치공동체의 지속가능한 안정과 번영을 향해 작동하고 있는가? 글로벌 차원에서는 일정정도 칭찬을 받지만 국내에서는 부정적인 답변이 많을 것이다. 지금 한국정치는 여야정쟁과 파벌주의로 공공성을 유지하지 못해 불안정하다. 집권여당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김건희 여사의 부적절한 처사로 대통령이 탄핵받을 위기에 처해 있다.
야당도 마찬가지이다. 이른바 ‘개딸’이라는 팬덤정치를 등에 업은 ‘이재명 일극체제’에 장악된 민주당의 행태도 상식적이지는 않다. 국회를 장악한 다수당인 민주당은 대화와 타협 및 공공선보다는 다수결이란 힘의 논리로 밀어붙이고 있다. 다수당의 전횡과 승자독식의 횡포는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비판 받는 대통령 권력조차 무력화시킬 정도이다. 한마디로 ‘김 여사의 악마화·윤 대통령 탄핵’과 ‘이재명 대표의 사법리스크 방탄’이 충돌하고 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한국의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발전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부족한 자원, 불리한 지리적 여건 속에서도 한국은 좋은 제도를 선택했기에 가능했다. 한국은 국제사회에 ‘자원의 한계는 제도선택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기회에 한국이 선택한 제도들의 총체인 ‘민주공화국 체제’의 우수성을 조금 자세하게 알고 갈 필요가 있다. 특히, 대한민국이 왜 ‘민주국’(democracy)이 아니라 ‘민주공화국’(republic)인지, 민주공화국이 민주국으로 타락하는 것을 어떻게 막는지를 아는 게 필요하다.
‘민주’와 ‘공화’가 함께 하는 체제를
민주공화국은 ‘민주’와 ‘공화’의 두 바퀴로 굴러가는 게 이상적이다. 민주 없는 공화는 공허하며, 공화 없는 민주는 맹목이다. ‘공화’는 의사결정의 주체인 동료 시민들이 함께 참여하고 토론하여 화합·통합하면서 공공성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대동(大同)이 그것이다. 특히 ‘민주정’으로 번역되어야 할 democracy가 ‘민주주의’로 오역되면 민주에 의해 공화가 가려지는 위험성이 발생한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로 번역되게 되면 democracy는 democracism과 같이 ‘이상적인 체제’, ‘완벽한 체제’, ‘완전무결한 절대적인 체제’로 둔갑되거나 오해되는 효과 때문에 굳이 ‘공화’의 필요성이 없어져서 공화를 배제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공화를 배제하면서 견제와 균형을 잃은 민주는 ‘다수결의 전횡’으로 타락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폴리비오스, 마키아벨리 등이 정립한 ‘정체순환론’에 의하면, 민주정은 군주정, 귀족정보다 나은 체제이지만 최선의 체제는 아니다. 최선의 체제인 ‘혼합정’(polity)이나 ‘공화정’(republic)에 비해 다수파와 소수파가 경쟁하다가 ‘포퓰리즘’과 ‘민중독재’로 타락할 수 있는 ‘견딜만한 체제’이다.
‘정체순환론’의 관점에서 보면, 혼합정의 타락한 형태로서 democracy는 중우정으로 타락하는 한계, 다수결의 폭정으로 타락하는 한계, 다수파와 소수파가 정쟁하면서 공공성을 무시하여 공멸하는 체제라는 역사적 한계를 갖는다. democracy는 양적으로 다수의 민중이 참여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지만, 대화와 타협 및 숙의를 통한 공공성 실현 등 질적인 참여의 부족으로 중우정으로 타락하는 ‘의의와 한계’를 갖는 체제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democracy(민주정)의 한계를 보완해주는 것이 공화이고, 이런 것이 성공한 체제가 ‘민주공화국’으로 번역되는 republic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republic이 democracy로 타락하는 것을 막는 민주공화국의 우수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democracy의 한계를 인정하고 보완제로서 republic(민주공화정)의 본령을 제대로 인식하는 게 우선일 것이다. 노벨상 축제에 우리가 겸손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