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불행은 어디에서 오는가?
“유교문화와 자본주의 단점 극대화” 행복한 정치참여 포기하고 돈벌이에 대화와 토론 포기하고, 파당 싸움에 지쳐 ‘가정관리술의 연장’이라는 유교 정치관 공사구분 못하는 ‘출세의 정치관’ 버려야
유교문화가 만들어낸 한국인의 불행
최근 미국의 유명 작가 마크 맨슨이 한국을 여행한 뒤 제작한 영상에서 한국의 정신건강 위기를 진단하며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라고 지적한 것이 논란이 됐다. 영상에서 맨슨은 “전쟁 후 20세기의 경제 성장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였다”며 “한국은 북한의 위협 아래 정부는 최대한 빨리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됐고, 이를 위해 잔인한 교육 시스템을 만들어야 했다. 그 결과 한국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안겼다”고 짚었다.
특히 맨슨은 한국이 뿌리 깊은 유교문화와 자본주의의 단점을 극대화한 점이 안타깝다고 강조했다. 그는 “유교 문화에서는 개인이 없다. 모든 것이 가족 중심으로 이뤄진다”며 “한국인들은 자신을 희생할 의지가 약하거나 능력이 적을수록 더 많은 수치와 심판을 받는다”고 했다. 이어 “한국은 불행히도 유교의 가장 나쁜 부분인 수치심과 체면을 유지하면서, 가장 좋은 부분인 가족, 지역사회와의 친밀감은 버린 것 같다”며 “자본주의 최악의 측면인 물질주의와 돈벌이에 대한 노력은 채택한 반면 자기표현과 개인주의는 무시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그는 “상충되는 가치관의 조합이 엄청난 스트레스와 절망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이렇듯, 맨슨은 한국 시민의 우울과 절망을 말하고 있다.
소수의 대표에게 정치를 맡기는 순간부터
우리의 불행은 진정 어디서 오는 것일까? 고대 시민과 비교해 볼 때,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고대 아테네, 로마 시민들은 자신의 타고난 능력과 재주를 잘 키우고 닦아서 공동체와 국가에 중히 쓰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고 열심히 정치에 참여했다. 정치참여를 ‘최고의 덕성’으로 여겼다. 그들은 공공의 의사결정을 하는 정치생활에 참여하면서 대화와 토론을 즐겼다. 그들은 대화와 토론으로 공공의 일에 참여하면서 삶의 보람과 행복을 느꼈다. 자기운명을 자기 스스로 결정했기에 행복했다.
하지만 현대의 우리들은 불행하다. 왜냐하면 고대 시민과 다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대략 불행한 이유는 이렇다. 현대의 우리들은, 정치는 소수의 대표자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돈 버는 일에, 생존에, 사적인 일에 몰두하고 있다. 자신의 삶과 운명에 관한 일들을 자신이 아닌 소수의 정치가와 대표자들에게 맡기고 있다.
그러니 헬조선, 수저계급론, N포세대, 청년실업, 일자리 부족, 비정규직, 이혼, 자살 등 모든 불행이 이런 대표자의 배신에서 시작된다고 할 것이다. 어찌 보면 우리 운명을 우리 자신이 아닌 소수의 정치가와 대표자에게 맡기는 순간부터, 정치참여라는 시민의 덕성을 포기한 순간부터, 대화와 토론을 포기한 순간부터 불행이 시작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를 대표하는 소수의 정치인들은 행복한가? 그들도 마찬가지로 불행하다. 그들은 대화와 토론을 통한 공공선(公共善) 추구는 없고, 진보와 보수라는 진영논리의 파당과 파벌을 만들고, 패거리를 지어 일방적 주장만을 서로에게 주장하면서 국민을 쪼개고, 나라를 다수파와 소수파로 분열시켜 내우외환의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을 내우외환의 위기에 빠뜨리는 정치권을 국민들이 불신하고 분노의 부메랑을 던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부메랑을 맞고 불행하지 않을 정치권이 어디 있겠는가.
서로 죽기 살기로 싸우는 ‘중우정치’
정치권은 국민의 빈곤한 삶과 생활상의 불편 문제에 대한 개선방법을 놓고 싸우는 게 아니라 민생과 거리가 먼 ‘친일파’, ‘반국가세력 척결’과 같은 자신들만의 시대착오적인 이념을 갖고 싸운다. 당초 우리 헌법이 상정하고 있는 의회주의의 핵심은 대화와 토론을 통해 숙의하고 합의하면서 다수파와 소수파를 쪼개지 않고 ‘비지배적 공화상태’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요즘 우리 민주주의는 중우정(衆愚政)으로 빠져들고 있다. 어떤 이는 민주주의를 ‘다수결’로 해석하고, 어떤 이는 다수결을 ‘소수파를 무시하는 다수파의 독재’라고 하면서 민주주의를 ‘소수결’이라고 말한다. 다수파와 소수파로 갈리면서 서로 죽기 살기로 싸우는 ‘타락한 중우정’을 민주주의 본령으로 삼고 있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더욱더 비판적 시민정신과 반대로 가는 팬덤정치는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 우리는 권력을 통제하여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대표자를 뽑는 ‘선거 경쟁’의 민주주의를 한다. 그런데 정당원과 지지자들이 무조건적인 진영논리와 승리지상주의의 늪에 빠진 ‘빠’가 되어 권력자에 대해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 권력중독의 노예와 표 찍는 기계처럼, 예속화된 주체와 소외된 시민으로 전락하고 있다.
좌절한 사람들에게 군중심리에 의한 ‘빠’운동과 팬덤정치는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도피처가 된다. 열등감이 클수록 행동은 광적인 경향을 드러낸다. 중요한 것은 맹신자들은 정작 자신의 병적인 심리는 외면하면서, 이웃의 일에 간섭하고 세상사를 농단하려 든다는 것이다. ‘빠’운동이 정당 정치운동과 결합되어 ‘빠시즘’이 되면 전체주의가 될 가능성이 열린다. 수신제가(修身齊家)도 안된 얼치기와 맹신자들이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하겠다는 과대망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알았던 그리스 시민
조선 사대부와 그리스 시민들은 공공의 일에 참여하는 일 즉, 공사(公私)를 구분하는 공사관에서 달랐다. 그리스 시민들은 공과 사를 크게 구분했다. 그들은 가정에서 노예와 여자 등을 가부장적으로 지배하는 방식인 ‘주인의 가정 지배’(despotike arche, despotism)와 폴리스에서 동등한 자유시민들간의 지배인 ‘정치적 지배’(politike arche)를 구분했다.
그리스 시민들은 이 정치적 지배가 공직을 번갈아 맡으면서 치차(治者)와 피치자(被治者)간의 갭을 줄이는 ‘비지배방식의 탁월성’으로 이해했다. 그들은 치자로서 지배하고 피치자로서 복종하는 것을 배워야 했다. 왜냐하면 훌륭한 시민은 자유민답게 지배할 줄 알고, 자유민답게 복종할 줄 아는 ‘비지배적 방식’이 시민의 탁월성을 보여주는 모습 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사대부들은 공사를 크게 구분하지 않았다. 이른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주장했다. 그래서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라는 공적영역을 ‘수신제가(修身齊家)’라는 사적영역의 연장선으로 이해했다. 국가와 천하의 공적 일을 자기 몸과 가정을 관리하는 가정통치술의 연장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집에서 좋은 아빠가 되는 능력과 자질을 국가 지도자의 능력과 자질수준을 구분하지 못하고 등치시켰다.
그래서 국가통치능력과 국민과의 소통능력보다, 개인의 도덕성과 품성을 향상시키는 ‘도덕수양론’을 더 많이 따지게 됐다. 이러한 미분화된 공사(公私)관으로 인해 ‘나라 일에 대한 통치술’을 ‘가정관리술’ 정도로 축소되었다. 이것은 사대부의 ‘성인군자정치’로 정당화하여, 동등한 자유민들을 노예처럼 다루는 ‘참주정치(tyranny, 타락한 왕조정치)로 연결시켰다.
입신양명의 출세관을 버려라
우리나라는 민주화를 시작한 지 36년이 지났지만 우리 정치의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586 정치인의 행태는 여전히 조선 사대부의 유교습속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을 움직이는 동력은 여전히 출세와 부동산 그리고 자식세습과 입신양명이다. 주변에게 인정받고 족보와 묘비명에 경력과 스펙 한줄 올리기에 바쁘다.
우리가 21세기 글로벌 선진국 시민이 되려면, ‘내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라는 양심의 목소리에서 ‘행복’을 찾는 청교도의 직업소명윤리처럼, 누가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간에, 평상시 하던 대로 시민참여와 공적활동을 자유롭게 하면 되는 것이다.
공직에 나가면 더 부자연스럽고 견제를 받으면서 할 수 있는 게 더 없는 데도, 이것을 입신출세와 입신양명으로 연결시켜 불행을 자초하고 있다. 공직을 나서려는 시민은 더이상 수신제가와 치국평천하를 바로 연결시킨 ‘가정관리술의 연장’으로 바라보지 않는 각성과 주의가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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