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정치 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담은 한 컷
기술상 완벽에 가까운 트럼프 피격사진 위험 극복한 정치인에겐 ‘로또’ 같은 사진 육영수 떠나보내지 못하는 박정희의 절망 시리아 난민 세 살배기의 허망한 주검 인류에게 최악의 사진 ‘원폭 버섯구름’
죽음이 주는 이미지는 강렬하다. 아기의 탄생이나 남녀의 사랑 못지 않게 인간 감정을 자극한다. 유명인이 죽음을 맞거나 가까스로 죽음을 피한 순간의 이미지는 대중에게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기기 마련이다. 특히 정치에 있어서는 이미지 한 컷이 국면의 흐름을 순식간에 바꿔버리기도 한다.
트럼프 피격사진이 특별히 훌륭한 점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피격당한 뒤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fight”를 외치며 주먹을 불끈 쥔 사진이 세계의 관심을 모았다. AP 수석 사진기자 에번 부치가 찍었다. 이미 퓰리처 상을 받은 베테랑에게도 인생에 남을 샷일 게 분명하다. 단지 극적인 순간을 포착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대통령 후보가 유세 중 저격당한 급박한 상황에서 촬영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완벽에 가까운 사진이어서 더 놀랍다.

트럼프를 중심으로 빙 둘러 경호원들이 에워싸고 있는 삼각형 구도가 우선 그렇다. 안정감을 주고 중심 인물에게 시선을 집중시킨다. 트럼프 얼굴의 핏자국과 성조기의 빨간 스트라이프가 묘한 일체감을 준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붉은 색의 대비도 극적이다. 죽음을 이겨내고 창창한 미래로 국민을 이끌겠다는 강한 미국 대통령의 이미지로서 이보다 나은 전례를 찾기 어렵다.
또다른 사진기자, 뉴욕타임즈의 더그 밀스는 트럼프의 귀를 스치고 지나가는 총알의 궤적을 포착해 관심을 모았다. 기자의 경험과 감각에 더해 1/80,000초까지 그야말로 찰나를 촬영할 수 있는 최신 디지털 카메라 기술의 개가다. ‘역시 AP나 뉴욕타임즈 같은 명문 언론사 기자들은 다르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부치나 밀스 같은 사진기자들이 에이스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이들이 역사의 순간을 포착할 수 있었던 데는 ‘buffer zone’의 덕이 크다. 단상 바로 앞에 구역을 정해 특정 언론사에게만 최적의 촬영 스팟을 제공하는 것이다. 사건 당일 buffer zone에 AP, 뉴욕타임즈, 워싱턴 포스트(WP), 그리고 트럼프 캠프 전속 인턴 사진사, 이렇게 넷이 들어가 있었다. 인턴은 인턴이어서인지 좋은 샷을 잡지 못했고, 워싱턴 포스트 기자는 AP의 부치와 비슷한 사진을 찍었지만 성조기가 빠졌다.
국가의 운명을 가르는 정치인의 사진 한 컷
미국 정가에서는 이미 대선이 끝났다는 말까지 들린다. 그렇지 않아도 바이든 대통령은 치매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인기가 별로인 마당이었다. 트럼프가 이 사진 한 장으로 첩첩산중 같던 사법리스크를 돌파하고 대선 승리를 거머쥘거라는 전망이 나왔다. 그는 졸지에 죽음마저도 돌파한 파이터가 됐다. 돈 좋아하는 트럼프 입장에서 거액을 들여도 연출하기 어려운 홍보사진을 공짜로 얻은 셈이다.
저격 당한 위치가 몸 숨길 데가 마땅치 않은 단상이었다는 점이 트럼프에게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레이건 전 대통령은 1981년 워싱턴 DC에서 피격당했을 때 그런 행운을 잡지 못했다. 총에 맞자마자 경호원들이 바로 옆 리무진으로 대통령을 급히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레이건도 살아남았고 정치적 이득을 봤다. 죽음을 극복한 정치인은 지지율 로또에 당첨된거나 다름 없다.

암살 대상 모두가 죽음을 이겨내는 건 아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그랬다. 댈러스 시내를 달리던 오픈카 뒷좌석에서 그가 머리에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은 충격 그 자체였다. 아내 재클린이 차 밖으로 떨어져 나간 남편의 신체 일부를 붙잡으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이 생생하다. 케네디의 죽음은 그를 사랑했던 미국인들에게 좌절을 안겨줬다. 글로벌 지도국가로서의 미국, 꿈과 희망이 피어나기 시작하던 미국은 케네디의 죽음으로 절망에 빠졌다.
이 날을 기점으로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져들고,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맬컴 엑스(X),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로 이어지는 암울하고 혼란한 60년대를 맞게 된다. 케네디라는 망원경을 통해 미래를 내다봤던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은 반전과 현실도피로 돌아서서 히피족 문화에 몸과 마음을 의지했다.
정치인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 국민의 사진
혼란의 시대는 70년대로 접어들어서도 끝나지 않았다. 1970년 5월4일 또 한 컷의 충격적인 사진이 대중에게 공개됐다. 미 켄트주립대 교정에 잠자듯 엎드려 숨져 있는 남학생과 그 앞에서 절규하는 여학생의 사진이었다. 반전 시위가 벌어진 캠퍼스에 주 방위군이 진입해 학생 4명을 숨지게 한 사건이다. 미국인들은 경악했다. 반전 시위가 들불같이 번져갔다. 2년 반 뒤 미국은 베트남에서 철군을 발표해야 했다.

대학생 반정부 운동으로 치면 어디 내놔도 뒤질게 없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엄혹한 독재시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이미지들이 생산됐다. 그 중 대중의 기억에 가장 남는 컷이 바로 이한열 열사의 것이다. 1987년 6월9일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은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혼수상태에 빠졌다.

사진에는 두 인물의 이미지가 중첩된다. 고개를 떨구고 피를 흘리며 혼절한 이한열의 얼굴은 독재정권의 폭력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민중을 연상케 한다. 쓰러진 친구를 부둥켜 안고 전경 쪽을 노려보는 동기 이종창의 눈은 원망과 분노로 가득하다. 로이터 기자였던 정태원이 촬영한 이 사진은 이튿날 중앙일보와 뉴욕타임즈에 실리면서 6월 항쟁의 에너지를 임계점까지 끌어올렸다. 이한열은 정권의 항복이나 다름없는 6.29 선언이 발표된 지 열흘 만인 7월9일 결국 숨을 거뒀다.
일본도에 쓰러진 일본 진보정치인
정치와 죽음이 연계된 결정적인 이미지는 일본에도 있다. 일본 사회당 창당 멤버인 아사누마 이네지로가 1960년 도쿄에서 연설 도중 17세 소년 오토야 야마구치가 휘두른 일본도에 목숨을 잃은 사건이다. 아사누마는 맥아더 미 군정 시절부터 친중 반미 노선을 견지하면서 진보 진영의 통합에 노력을 쏟았던 온건 중도파 사회주의자였다.
암살자 오토야는 육상자위대원인 아버지의 훈육 아래 어려서부터 보수우익의 가치를 신봉해 온 확신범으로 드러났다. 사진을 보면 오토야가 일본도를 들고 아사누마를 찌르려고 달려드는 모습이 극적이다. 사무라이 영화에서 동작 하나하나를 정교하게 연출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휘날리는 머리카락, 타겟을 노려보는 시선, 깊게 찌르기 위해 일본도를 그만큼 깊게 뒤로 당긴 자세, 두 다리의 공격적인 품새, 그리고 군화같아 보이는 신발까지, 분명한 살해의지가 읽힌다. 여기에 오토야를 저지하려는 주변의 손들이 프레임 밖에서 삐죽 들어와 절박감을 더한다.

아사누마의 피살로 사회당에 대한 동정 여론과 극우 보수에 대한 비난 여론이 나란히 급등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일본 정국의 풍향계는 뜻밖의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 역시 이미지 한 컷의 영향이 컸다. 보수 우익인 자민당의 이케다 하야코 총리가 아사누마의 영결식에서 눈물을 흘린 덕분이었다. 이어진 총선에서 사회당은 동정표를 모아 나름 선전했지만 승리는 자민당에게 돌아갔다.
남편 박정희는 무슨 말을 남기고 돌아섰을까
개인적으로 정치와 죽음이 연결된 이미지로서 가장 복잡한 인상을 남긴 국내 사례는 고 육영수 여사 관련 사진 아닐까 싶다. 1974년 8월15일 국립중앙극장에서 진행된 광복절 기념식에서 문세광의 총탄에 맞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혼절한 육 여사의 모습은 그 시절을 지나온 모두에게 잊혀지지 않는 충격이었다. 다만 필자는 국민장이 끝나고 시신을 실은 운구차량이 청와대 문을 나서기 직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아내에게 작별을 고하는 장면에 훨씬 더 감정이입을 하곤 한다.

차량은 전체가 육 여사가 좋아하던 노란 국화꽃으로 덮였다. 박 대통령은 떠나지 말라는 듯 흰 장갑을 낀 두 손을 차에 얹은 채 묵묵히 서 있다. 이 냉혹한 독재자의 어깨가 왠지 축 쳐진 느낌이다. 왼편에 걸린 커다란 태극기가 예사롭지 않은 장례임을 상징해준다. 남편 박정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49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내의 이름을 다시 한번 불러봤을까? 암살 위험 때문에 장지까지 따라가지 못하는 처지를 비관했을까? 아니면 피의 복수를 다짐했을까?
이후 1979년 10.26까지 박정희 정권의 말년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육 여사를 떠나보내는 순간 자기 마음 속의 다른 많은 것들도 함께 떠나보낸 건 아닐까?’ 이를테면 엄혹한 유신 정권에서도 간간이 엿볼 수 있었던 박 전 대통령의 인간적인 면모 같은 것들 말이다. 어린 여공들을 위해 야간학교를 열어줬다든지 하는 소소한 스토리들이 육 여사 사후에는 그리 눈에 띄지 않아서 해 본 생각이다.
세 살배기 아기난민의 허망한 죽음
죽음의 무게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해서 가벼운 것은 아니다. 한 아기가 숨진 모습이 9년 전 세상을 뒤집어 놓은 경우가 입증한다. 2015년 9월2일 아침 세 살배기 아기 아일란 쿠르디는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리스 해안 어딘가에 도착했어야 했다. 시리아 난민 엄마 아빠와 함께 지중해를 가로지르는 필사의 탈출을 마치고 지친 몸을 달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가족이 탔던 배는 밤새 지중해 어딘가에서 침몰했고. 동이 튼 뒤 아일란은 튀르키에 바닷가에 엎드려 숨진 채로 발견됐다. 빨간 반팔 티셔츠와 파란 반바지를 입은 아이의 시신을 파도가 위로하듯 어루만지고 있었다.

사진이 공개되자마자 전세계적으로 난민을 도와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난민 수용에 소극적이던 독일을 비롯한 여러 유럽연합(EU) 부자 국가들이 여론에 떼밀려 문을 열었다. 아일란 이전에도 셀 수 없이 많은 난민들이 내전을 피해 탈출하다가 지중해에 수장되거나, 먼 타지에서 굶고 다쳐 삶을 마감했다. 대책없는 죽음의 행렬에 일부나마 희망의 구명줄을 내려준 것은 아일란의 마지막 사진 한 장이었다.
인류에 가장 큰 충격을 준 사진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찰나의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케네디처럼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순간을 사진으로 남긴 담긴 인물이 몇 명 더 있다. 우선 종군 사진기자 로버트 카파가 찍은 <어느 공화파 병사의 죽음>이다. 1936년 무명의 인민전선 병사가 독재자 프랑코의 파시스트 세력과 전투를 벌이던 도중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순간이 필름에 담겼다. 돌격명령을 받고 참호에서 뛰어 나오는 순간 피격된 걸로 알려졌다. 카파의 사진은 당시 세상의 관심권 밖에 있던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널리 알리는데 기여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 공산군 포로를 권총으로 즉결 처형하는 남베트남군 장군의 사진은 두고두고 논란이 되는 경우다. 이미지와 그 이미지 속에 숨겨진 진실 사이의 모순이랄까. 사진은 남베트남군 소속 로안 장군이 권총으로 포로의 관자놀이를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장면이 하도 끔찍해서 세계적으로 반전 운동의 상징이 됐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지만 어떻게 이처럼 무자비하게 생명을 앗아갈 수 있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런데 반전이 숨어 있었다. 처형된 포로는 악명 높은 암살부대 대장으로 무고한 양민들을 무차별 학살했을 뿐 아니라 로안 장군 본인의 가족과 부하를 죽인 인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법과 절차가 있지’라고 단순하게 비판하기에는 전쟁터에서의 삶과 죽음의 원리를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사진은 렌즈에 잡힌 장면을 가감없이 담아내지만 그 모습 뒤에 숨은 진실을 모두 말하지 않는다.
글을 마무리 하면서 1839년 사진이 발명된 이후 인류에게 가장 큰 충격을 안겨준 사진 한 컷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봤다. 그건 아마도 1945년 8월6일 일본 히로시마에 피어오른 공포의 버섯구름 사진 아닐까 싶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도시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20만 명 넘는 인명이 희생됐다.

지구촌의 정치, 외교, 안보 지형은 이 날을 기점으로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인간이 느끼는 전쟁에 대한 공포의 강도 역시 몇 십 배, 몇 백 배로 치솟았다. 히로시마의 버섯구름 사진은 ‘오늘부터 어제와는 다른 세상이 시작된다’는 경고였다. 지구 어디에선가 또 다시 버섯구름이 솟아오르면 그때는 폭발에서 살아남아 사진을 볼 사람이 없게 될지도 모른다. 이어서 ②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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