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민심의 요구는 다시 ‘겸허한 정치’
[박정인의 정치평론] 윤통 ‘실정’에 화난 국민의 심판 집권세력, 변화할까 그대로일까 야권 꽃길 아냐...대통령이 미웠을 뿐 200석 안 준 국민, 겸허한 정치 요구
어째서 이런 결과 나왔을까
총선의 시대정신은 결국 ‘불통’ 정권에 대한 심판이었다. 대통령이 좀처럼 고집을 꺾지 않고(의료대란), 잘못에 사과와 시정도 없으며(부인 김건희씨 문제), 측근들이 자꾸 국민을 화나게 했다(이종섭, 황상무). 이 정도면 여당이 앞장서서 대통령의 변화를 촉구하고 나섰어야 하는데 심판 받아야 할 쪽이 오히려 야당을 심판하자고 하니 유권자들을 더욱 자극한 셈이다.
모든 선거는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만큼 대통령이 경제라도 잘 했으면 그나마 나았을텐데 선거 기간 내내 경제와 관련한 이슈는 ‘875원 대파’ 논란 뿐이었다. ‘종부세 깎아 준 게 지난 2년 업적의 전부’라는 자조적인 말이 보수 쪽에서 나올만큼 경제비전이 없었다.
딱히 야당이 잘 한 선거도 아니었다. 민주당은 ‘비명횡사’ 공천으로 지탄을 받았다. 조국혁신당은 복수의 정치 아니냐는 의심을 사기도 했다. 운동권 386을 정리하지 못했을 뿐더러 ‘저 양반이 또?’라는 레트로 공천이 여럿이었다.
하지만 국민의 선택은 오로지 정권 심판에 맞춰져 있었다. 지상파 3사 출구조사 결과를 보면 60대 이상을 제외한 모든 연령대에서 민주당이 크게 앞섰다. 60대에서조차도 30%에 가까운 민주당 지지세가 확인됐다. 보수성향으로 기울었다던 2,30대 중에 이대남은 개혁신당으로, 이대녀는 민주당으로 떠나갔다.
양문석의 사기 대출 의혹, 김준혁의 막말 시리즈가 유권자의 마음을 바꾸지 못한 건 이번 선거에 임하는 국민의 심정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입증한다. ‘아빠찬스’의 공영운이 패배한 것은 상대가 심판대상이 아닌 이준석이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정권을 심판하기로 마음 먹은 유권자들에게 조국혁신당의 등장은 호재였다. 고르는 재미가 생겼으니까. 출구조사결과 지역구 투표에서 민주당 후보를 찍은 유권자 가운데 39%가 비례대표로 조국혁신당을 선택했다고 답했다. 마음에 안든다고 기권할 필요 없이 이재명이 싫은 사람은 조국을, 조국이 싫은 사람은 이재명을 찍으면 됐다.
22대 국회는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에게 악몽의 시작이다. 어차피 지난 4년과 별 차이 없다고 자위할 때가 아니다. 지금까지 거대 야당은 윤석열 대통령이 잘못해 생긴게 아닐 뿐더러 이재명 대표는 일종의 세입자에 불과했다. 반면 새로 출범하는 민주당은 대통령의 잘못 때문에 압승했고, 그 승리를 진두지휘한 오너가 이끄는 당이다. 윤석열 대통령을 콕 찍어 부정하겠다는 결심으로 똘똘 뭉친 조국혁신당도 있다.
민주당 이성윤 의원. 조국혁신당 조국, 박은정 의원이 잇따라 본회의장 단상에 서서 윤석열 대통령을 비판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새옹지마도 이런 새옹지마가 없다.

윤대통령, 언제까지 ‘거부권 정치’ 할 건가
대통령을 심판하라는 국민의 명령을 받고 오너들이 총출동한 야당을 상대하기는 쉽지 않다. 고집을 굽히지 않는 태도로는 원만하게 국정을 이끌어갈 수 없다. 지난 2년처럼 거부권 정치로 일관할 수도 없다. 윤 대통령은 이미 거부권을 8번이나 행사해서 역대 2위에 올라섰다.(부동의 1위는 45번 거부권을 행사한 이승만 대통령이다.)
윤 대통령에게 선택의 폭은 비좁다. 불통에 대해 무조건 사과해야 한다. 고집은 버려야 한다. 돌출적 언행에 대한 불안감도 가시게 해야 한다. 의대 정원 2천명 증원 같이 절대 양보 못 하던 것들을 양보해야 한다. 한번 밀리면 계속 밀리는 게 권력의 속성이라고 믿어서 지금까지 버텨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더 밀릴 데도 없다. 사과하고 양보하고 구명줄을 부탁하는 게 합리적이다.
부인 김건희씨에 대한 입장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야당이 특검을 다시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 특검을 받든 다른 방법을 선택하든 의혹을 풀거나 잘못을 고백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대통령 부인이 주저없이 명품 백 선물을 받다 몰카에 찍히고는 찍은 쪽 탓만 하는 걸 국민은 더 이상 받아들이기 어렵다.
윤 대통령에게 더 아픈 화살은 여권 쪽에서 날아올 것 같다. 참패의 책임을 지라는 목소리다. 전국을 돌며 선거운동과 다름없는 민생토론회를 연 게 누군데…라고 억울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내에서는 차라리 조용히 있어주는 게 더 나았을 거라는 볼멘 소리가 벌써부터 나왔다. 김건희 씨가 몇 달 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도 했다.
윤 대통령 임기 중 더 이상 공천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여당 의원들은 당을 되살리기 위해 가장 확실한 희생양으로 대통령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이른 감이 있지만 탈당이나 당정 분리를 요구할 거라는 전망도 있다. 김건희 특검이 추진될 때 방탄을 자청할 대통령의 사람이 당내에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
잠룡의 발걸음에 가속이 붙을수록 윤 대통령의 힘은 빠질 것이다. 차기 주자 1순위 오세훈 서울시장, 출구조사를 뒤집고 돌아온 안철수 의원, 애초부터 대통령과 대척점에 서 있던 유승민 전 의원 같은 이들이 목소리를 낼 때가 왔다. 이재명 대표와 맞대결을 자청했던 원희룡 전 장관도 할 말이 있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애매한 처지에 놓였다. 참패의 책임은 분명하다. 대통령과는 제대로 척지게 된 것 같다. 하지만 그게 정치적 부활의 기회일 수도 있다. 나중에 당이 그를 받아들일지에 관심이 쏠린다.
야권은 21대 국회 당시를 상기하자
야권은 윤석열 정부를 심판하라는 유권자의 요구를 충실히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지난 4년 거대 야당이 남긴 족적이 과연 바람직했는지 한번쯤 되돌아 봐야 한다. 국민이 준 180석을 겸허한 자세로 활용했는지 말이다. 이번 선거 결과 어디에도 야당이 예뻐서 표를 줬다는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이 미웠을 뿐이다. 서울의 의석수 감소와 수도권 텃밭에서의 신승 또는 패배가 증거다.
돌풍을 일으킨 조국혁신당도 돌풍이 자기 집을 무너뜨리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한동훈 특검을 비롯해 유세과정에서 나온 말들이나 당선된 인물의 면면을 보면 복수심의 뉘앙스가 느껴진다. 복수는 짜릿하지만 중독성이 강해 스스로 무너지게 한다. 그보다는 조국 대표가 약속한 ‘사회권 선진국’ 같이 특성 있는 정책 비전을 제시하는데 주력해야 한다.
정치공학적으로 볼 때 야권에게 꽃길만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당장 야당 분열의 씨앗이 잉태됐다. 비명횡사 공천으로 갈 길을 잃어버린 비명계에게 조국혁신당이라는 노아의 방주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표는 기세를 몰아 8월 전당대회에서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하려 할 것이다. 이걸 뒤집으려는 비명계가 좀 더 자신있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셈이다.
두 야당의 리더가 나란히 사법리스크를 안고 있다는 사실도 부담이다. 만약 사법처리가 현실화한다면 당장의 리더십은 말할 것도 없고 차기 대선의 유력 주자가 사라지는 불상사가 생긴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당은 부진했지만 불리한 지역구 여건을 돌파하고 국회에 입성한 개인기가 돋보였다. 3년 뒤 대선까지 정치권의 이합집산에 따라 ‘조커’ 역할을 할 기회를 얻었다.
유권자는 현명할 뿐 아니라 엄정하다. 대통령이 미워서 야당에게 기회를 줬지만 개헌과 탄핵선을 넘지 못하게 한 의도가 있을 것이다. 21대 총선에서 180석을 몰아줬다가 2년 만에 정권을 거둬들인 선택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여든 야든 국민 앞에서 독단적이면 안 되고, 오만해서는 안 되고, 방심해서도 안 된다. 겸허한 정치 만이 국민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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