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않는 것”의 가치

[정신의학자 강웅구의 ‘마음의 길’] ‘작위만이 가치가 있다’는 생각은 근대 이후 자연과학의 성공에 힘입어 자본주의에도 ‘부작위의 가치’ 인정 못받아 그러나 우리는 발전과 목표 위해 사는 것 아냐 행복하려면 내 방식대로 흔들리지 않아야

항상 발전하고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작위'의 생각이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항상 발전하고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작위'의 생각이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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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과 “않는 것”

형법은 어떤 행위를 “한 것(작위, 作爲)”을 범죄로 규정한다. 하지만 어떤 행위를 “하지 않은 것(부작위, 不作爲)”이 범죄가 되는 경우도 있다. 형법 18조는 다음과 같다. “(부작위범) 위험의 발생을 방지할 의무가 있거나 자기의 행위로 인하여 위험발생의 원인을 야기한 자가 그 위험발생을 방지하지 아니한 때에는 그 발생된 결과에 의하여 처벌한다”. 부작위 범죄는 ‘부작위’라는 행위를 한 것으로 취급된다. 의료 과실도 역시 작위에 의한 것과 부작위에 의한 것이 있다. 잘못된 치료를 하는 것이 작위에 의한 과실이라면, 주치의가 환자에게 필요한 치료를 하지 않는 것은 부작위에 의한 과실이다.

그런데 작위와 부작위를 구분하기 애매한 경우도 있다. 예컨대 식물상태 환자에게 오랫동안 적용하던 인공호흡기를 중단하는 것은 인공호흡 처치를 하지 “않는다”는 부작위로 볼 수도 있지만 호흡기를 “제거한다”는 작위로 볼 수도 있다. 새로운 상태를 적극적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든 중요한 것은, 하지 않는 것도 하는 것만큼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 않는 것은 ‘못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 행위를 할 능력이 있고, 하는 것이 가능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집행하는 경우도 있고, 해야 한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고 간과함으로써 일어나는 소극적 부작위도 있다. 후자는 작위에 빗대면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적극적 부작위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부작위의 가치

부작위의 가치는 잘 인정받지 못한다. 작위 만이 가치가 있다는 생각은 근대 이후 자연과학의 눈부신 성공에 힘입어 생겨났을 것이다. 실증주의(positivism)는 보여줄 수 있는 것만이 진리라는 관점인데, 부작위는 유감스럽게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슷하게,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는 잘 인정되지 않는다. 경제는 끊임없이 발전해야 하며, 발전을 위해서는 새로운 투자를 해야 하고, 더 많은 생산을 해야 하고, 더 많은 소비가 이루어져야 한다. 경제지표가 많이 상승할수록 좋은 경제다. 발전 없이 지금대로 유지하는 것, 그래서 별로 보여줄 것이 없는 상태는 퇴보와 실패로 간주된다. 그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새로운 능력을 획득하고, 새로운 곳에 취직하고, 창업하는 것만이 성공이고 꿈을 이루는 것이고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은 경우도 있다. 음주운전 등 무모한 “위험감수 행위(risk-taking behavior)”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정서 아래서는 고수익의 가능성이 있다면 위험감수도 권장된다. 고위험-고수익을 쫓는 전략에서 무모함은 창의성이나 용기로 포장된다.

성공한 경우만 알려지기 때문에 이런 포장이 가능하다. 남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코인에 투자하여 수천 퍼센트(%) 수익을 본 사람의 이야기는 보도되지만, 열심히 모은 재산을 코인에 탕진하는 훨씬 많은 사람들은 기사에 나오지 않는다. 후자의 투자는 용기나 창의가 아닌 무모한 것이고, 이들에게 작위(투자)보다는, 부작위가 더 가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경험을 통해 위험한 것은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잘 배웠을 것 같지만, 그래도 유혹에 약한 것이 인간이다. 특히 엄청난 이익이 보장되어있다고 이야기하는 교묘한 속임수에 약하다. 이런 유혹을 이기고 자신의 평정심을 지키게 되는 것이 부작위의 가장 큰 가치일 것이다.

부작위의 비용

하지 않는 것에도 비용이 필요하다. 해서 성공했더라면 얻었을 결과를 포기하는 ‘기회비용’이 있다. 하지만 기회비용은 공정하게 계산하기 어렵다. 주위의 유혹이나 압력, 혹시나 나만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견뎌내는 것은 부작위의 직접비용이다. 기회가 주어지면 즉시 해야 하고 결과를 곧바로 확인해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충동성이 높은 사람)은 하지 않고 지켜보는 것의 비용이 특히 높을 것이다.

작위도 부작위도 선택인데, 우리의 선택이 무엇에 근거하는가가 중요하다. 가능한 행위들의 비용-효과를 각각 계산해서, 비용대비 효과가 우월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이때 부작위라는 항목도 가능한 행위 목록에 넣어서 같이 계산하는 것이 필요한데, 혁신이 화두인 세상에는 부작위가 행위로 간주되지 않는 문제점이 있다.

환경 문제에서 작위와 부작위

필자가 보기에 작위와 부작위의 가치에 대한 혼란은 환경 문제에서 두드러진다. 인류 문명의 역사는 환경 파괴의 역사다. 그렇다면 환경을 파괴하던 행위를 더 이상 하지않음으로써 파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화석연료에 의한 탄소 배출이 문제된다면, 에너지 사용을 줄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런 해결책이다. 먼 거리 관광 여행 않기, 연비 낮은 대형차 타지 않기, 가상화폐 채굴 않기 등이 쉽게 떠오른다. 복지 증진과 별 관계 없으면서 탄소 배출이 높은 행위들에 적극적 부작위라는 방법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그러나 첨단 기술을 신봉하는 사회에서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냄으로써 환경 파괴를 방지할 수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비정부단체(NGO)의 환경 운동에서도 이런 측면이 보일 때가 있지만, 이런 주장은 주로 기업들의 몫이다. 자동차 회사는 전기자동차가 탄소 중립을 이루어 문명 사회를 위기에서 건져줄 듯이 홍보하고 있지만, 전기차를 움직이기 위한 전기는 탄소를 소비함으로써 만들어 내는 것일 수도 있다. 가상화폐 채굴기가 태양광 발전으로 가동되기 때문에 탄소 중립적이라고 하지만 바로 그 전기를 가상화폐가 아닌 복지와 직결된 분야에 사용한다면 인류의 탄소 소비는 더 줄어들 것이다.

더 황당한 것은, 기업이 돈으로 탄소배출권을 사면 생산(=탄소 소비)을 줄이지 않더라도 친환경으로 인정받는다는 사실이다. 기업이 친환경 제품을 만들고, 소비자는 이를 소비함으로써 환경을 보호한다는 주장에 의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녹색 세탁(green washing)”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친환경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그 상품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행태를 의미한다. 환경 위기가 기업이 새로운 이윤을 창출할 기회로 변질되는 것에 대한 경고다. 만약 환경 파괴의 문제를 과잉생산–과잉소비 “않음”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그것을 통해 이윤을 얻는 기업은 별로 없을 것이다. 확장을 추구하는 자본의 본성과 보존을 추구하는 환경 문제 사이의 근본적 갈등이다.

의료에서 작위와 부작위

일찍이 히포크라테스는 “병은 자연이 고치고 돈은 의사가 받는다”라는 말은 남겼다고 하는데, 환자에게 “해주는 것”이 치료의 전부가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현대 의료는 수많은 작위들로 이루어져 있다. 역시 끊임없는 발전 추구와 관계된다. 생명과학 및 의학은 현대 자본주의의 첨병이다. 과거에는 기다리며 관찰했던 문제에 대해, 그것을 측정하는 새로운 검사도구가 개발되고 그 상태를 변화(호전이 아님!)시키는 새로운 치료방법이 개발됨으로써 새로운 질병과 치료가 탄생한다. 그동안 별 문제없이 살아가던 한 시민은 이제 환자로 판정되고, 정밀한 시술을 받거나 매일 약물을 복용해야 한다.

자신이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환자라면서 병원을 방문하여 검사와 약물 처방을 요구하는 청년의 병력을 청취한 뒤 필자는 “기다리자”고 한다. 이것은 환자를 방치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약물 해결책이 아니라는 치료적 판단을 제시하는 것이지만, 그는 의사가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고 불만을 갖기도 한다.

이런 행태는 의학이 잘 몰라서 방치되었던 질병을 찾아내는 과학적 탐구라는 관점에 의거하는데, 그 뒷면에는 ‘레드오션’이 된 의료계에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려는 시도도 엿보인다. 인류의 건강과 수명 연장은 의학적 진단-치료 기술이 발전한 탓도 있지만, 전반적인 위생 및 영양공급 개선에 힘입은 바가 더 크다. 의학 기술의 획기적 발전이 난치성 질환 환자의 삶을 뒤바꾼 좋은 예도 많이 있지만, 과잉진단과 과잉치료가 한정된 의료자원을 축내는 큰 요소인 것도 분명하다. 자원의 과잉소비는 결국 전체적 복지 수준을 떨어뜨린다. 첨단 의학의 메카이며 의료분야에 자원이 가장 많이 투자되는 나라가 미국이지만, 미국 시민들의 건강 수준은 높지 않다.

정치에서 작위와 부작위

정치적 아젠다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정책을 실행해서 시민들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것이 정치다. 정치적 작위는 시민의 복지 증진을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어서는 안된다. 역사를 재해석해서 독립유공자를 “우리의 적”인 공산주의자로 만드는 식의 정치행위는 시민 복지와 무관한 것임이 분명하다. 집권세력의 정치적 정체성(正體性)을 보여줌으로써 동조세력을 규합하려는 행위에 불과한 것으로, 시민들의 정서적 안녕을 위해서는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았을 행위다.

복지나 경제 정책에서도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전 정부가 했던 정책이면 중단하고 자기네의 새로운 정책으로 대체하여야 한다. 현재의 모든 문제는 과거 정부의 잘못에 기인한다는 정부 논평이 나온다. 그러면서 새 정책을 홍보하는데, 기존 정책의 알려진 단점과 새 정책의 검증되지 않은 장점을 비교하는 것이므로 비용-효과 분석은 왜곡될 수 밖에 없다. 예컨대 사기업의 이익은 공공의 복지와 상충될 가능성이 높다는 상식을 덮어둔 채, 새 감세정책의 혜택을 입은 대기업이 세계 1등이 되면 나라가 발전하고, 나라가 발전하면 국민이 행복해지리라 홍보한다. 정책은 복지 증진을 위한 것처럼 포장하지만 집권세력의 정체성 관리일 뿐 시민을 위한 것이 아니다.

특히 정치에서 부작위는 해서는 안 되는 일로 간주되는 것 같다. “여러 대안을 검토했으나 최종적으로는 현재 정책이 가장 낫다”고 하는 적극적 부작위 정치를 필자는 거의 보지 못했다. 아이돌 가수가 끊임없이 신곡을 발표해야지만 인기를 유지하는 것처럼, 정치세력들도 끊임없이 새로운 정책을 만들어내어야 자기들의 정체성이 유지된다고 생각한다. 흘러간 노래를 새것인 양 리메이크하는 것은 물론이다. 노자(老子)는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작은 생선을 굽는 것처럼 하라(治大國若烹小鮮)”고 하였는데, 생선을 자꾸 뒤적거리다 보면 구워지기 전에 부스러진다는 것을 정치와 비유한 것이다.

변화와 발전이 곧 행복일까

유행하는 자녀 교육 프로그램은, 부모가 별 생각 없이 양육하면 안되고 진행자가 제시하는 원칙을 따라야만 자녀가 제대로 자랄 것이라고 믿게 만든다. 새로운 다이어트 방법들은 자연스런 식사를 포기하고 극단적인 편식을 해야 건강해진다고 주장하여, 균형잡힌 맛있는 식사를 한 사람이 행복감보다 죄책감을 갖도록 만든다. 자연스러움을 포기하고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해야 “성공”한다는 주장들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너무 흔한데, 무엇을 목표로 그렇게 하는지는 불분명하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지, 발전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다. 발전은 행복해지기 위한 수단일 뿐 발전이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한 세대 전과 비교하면 물질적 풍요와 안락한 일상과 신체적 건강 증진을 이루었지만, 그렇다고 한 세대 전의 사람들보다 지금의 우리가 더 행복해진 것은 아니다. 한 세대 전보다 급격하게 늘어난 자살률(인구 10만명당 1992년 8.3명에서 2022년 25.2 명 https://www.index.go.kr/unify/idx-info.do?idxCd=8040)이 이를 보여준다.

혁신하지 않으면 도태되고 대박을 터뜨려 남들에게 보여주어야만 성공한다는 사회 분위기에 흔들리지 않고, 내 방식으로 내 속도로 드러나지 않는 일상을 살아나는 것은 점점 힘들어지고 그 가치는 점점 더 잊혀져 가고 있다.

글쓴이

강웅구 서울대 의대 교수

강웅구는 1988년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정신건강의학과 수련을 받았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뇌의 유전자 발현 이상 보다는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는 방식”이라는 관점에서 정신질환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다. 대표저서로 <정신병리학 – 정신병리의 개념적 접근>(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1)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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