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티셔츠는 안녕 한가요
[송광용의 밤마다 카페테라스] “난 티셔츠를 입을 때마다 강하거나 느슨하게 연결된 사람들이 여전히 내 곁에 있음을 감각할 것이다”
[송광용 교사·에세이스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좋아한 티셔츠가 어찌나 많았던지, ‘내가 사랑한 티셔츠’라는 부재를 단 <무라카미 T>라는 산문집을 내기도 했다. 수집한 티셔츠들을 서너 벌씩 주제별로 묶어, 어떻게 그 티셔츠를 얻게 됐는지, 티셔츠에 어떤 이야기가 얽혀 있는지를 쓴 신변잡기식의 글들이 담겨있다. 하루키처럼 방대하게 티셔츠를 수집하진 못했지만, 많은 티셔츠들이 내 몸을 거쳐 갔다. 한때 열렬하게 좋아해서 목이 늘어날 때까지 입었던 것도 있고, 빨래를 잘못해 줄어들어서 똑같은 걸 찾으려고 애썼던 것도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티셔츠는, 우산을 든 사람이 그려진 보세 반팔 티였다.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 시절에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앞에서 편안한 인상을 주고 싶을 때 꺼내 입곤 했다. 훗날 아내가 된 당시 여자 친구가 그 티셔츠 좀 그만 입으라고 했을 땐, 좀 충격을 받기도 했다. “네 앞에서 이 티셔츠를 많이 입었던 건, 그만큼 잘 보이고 싶어서였어”라고 말하진 못했다.
이렇게, 내 몸을 거쳐 간 티셔츠들도 저마다 소소한 사연이 담겨있다.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많은 티셔츠들을 입고, 보내고 내린 결론 중 하나는 이것이다. ‘영원한 티셔츠는 없다’는 것.
나이가 들고 성장하면 많은 게 바뀐다. 몸도, 생각도, 취향도 바뀐다. 그 중 티셔츠는 또렷하게 변화하는 것 중 하나다. 오랫동안 유지해오던 티셔츠의 사이즈가 작년에 바뀌고 말았다. 내 몸은 100사이즈에서 105사이즈로 서서히 변화했다. 사이즈의 경계를 넘어버린 걸 알게 된 건, 여름의 초입, 전년도에 입었던 반팔티셔츠를 꺼내 입었을 때였다. 편안하게 착용했던 기억이 아직 남아 있는데, 그 편안함은 이제 압박으로 대체되었다. 거울에 몸을 비춰본다. 오오, 깜짝이야. 빨래를 잘못해서 줄어든 건가. 팽팽하게 긴장한 티셔츠가 내 몸의 작은 파동과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살이 쪄서건, 성장해서건, 몸의 변화는 티셔츠의 입장에선 잔인한 면이 있다. 한 번 경계를 넘어버리면, 이전 사이즈의 티셔츠들은 모두 폐기되거나 집을 떠나야 한다. 제네바 협정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전쟁 포로와 같은 신세가 되는 것이다. 새로운 사이즈의 티셔츠를 쇼핑하면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세월이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건가. 그렇게 세월 탓을 해보지만, 성인이 된 이후의 사이즈 변화는 결국 자기반성으로 귀결된다.
맞지 않는 티셔츠가 은유하는 것
티셔츠는 몸의 변화를 알리는 첨병일 뿐 아니라, 인생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변화를 은유하는 물건이기도 하다. 늘어나서, 해져서, 몸에 맞지 않게 돼서 위상이 달라져 버린 티셔츠를 보면, 지나간 관계들이 떠오른다.
한때 내 몸에 착 감기던 티셔츠처럼 어떤 시기에 아주 친했고 마음을 나누었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느 순간 해지고, 몸에 맞지 않게 되어버린다. 그런 변화는 서서히 지속되다가, 문득 경계를 넘어버렸다는 걸 깨닫게 된다. 내가 좀 무심하고, 내향적이고, 누군가와 연락하는데 소심한 면이 있는 사람이라 그런 순간을 느끼는 일이 더 잦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날은, 조금 쓸쓸해진다. 내가 다른 곳에 신경을 쏟는 사이에 좋은 사람들의 일부는 내 속 <과거>라는 폴더로, 또 다른 일부는 <약한 연결>이라는 폴더로 옮겨졌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사실은 괴로운 일이기도 하다. 언제까지고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우정, 어떤 시기에 힘이 되었던 호의들, 마음에 균열을 만들었던 사랑의 감정, 나를 늘 둘러싸고 있었던 건강한 이웃과 동료들.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이것들은 영원하지 않다. 티셔츠처럼.
점점 입을 만한 티셔츠의 범주가 좁아지는 것처럼, 사귈만한 사람들도 줄어든다. 몸매가 바뀌고 세월이 지날수록 옷이 해지는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누군가도 나에게, 이젠 맞지 않는 티셔츠처럼 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강한 연결과 약한 연결 모두 필요하다
미국의 사회학자 그라노베터 교수는 1973년도에 <약한 연결의 힘>이라는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선, 이직한 사람들이 새로운 직장을 어떤 경로로 알게 되었는지에 관한 실증 연구가 나온다. 약한 연결을 통해 알게 된 경우가 강한 연결을 통해 알게 된 경우보다 2배 이상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이는 새로운 정보를 공유하는 측면에선, 약하게 연결된 사람들이 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강하게 연결된,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가진 정보는, 내가 갖고 있는 정보와 중첩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약한 연결의 사람들은 내가 속하지 않은 커뮤니티에 속해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새로운 정보를 갖고 있을 확률이 높고 그 부분이 내 삶에 유익이 된다는 것이다.
나의 경험도 그 실증 연구의 한 사례에 부합한다. 난 교사지만, 글을 쓰는 사람이기도 하다. 내 글쓰기에 도움을 주고, 새로운 문을 열어줬던 사람 중에 강한 연결의 카테고리에 속한 이는 거의 없다. 처음 신문 칼럼을 쓰게 되었을 때도 그랬고, 책을 출간할 수 있었던 것도, 지금 이렇게 <더 칼럼니스트>에 글을 쓰게 된 것도, 모두 느슨하게 마음의 손을 잡고 있는 귀한 분들의 선의 덕분이다.
모든 관계를 강한 연결로 유지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버린 관계에 대해 아무리 씁쓸한 감정을 가진다고 해도 말이다. 강한 연결로 이어진 사람들은, 우릴 행복하게 하고, 일상에서 받은 상처들을 보듬어준다. <약한 연결>이라는 폴더에 들어 있는 사람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돕고 삶에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준다.
난 티셔츠를 입을 때마다 강하거나 느슨하게 연결된 사람들이 여전히 내 곁에 있음을 감각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와 연결된 사람들이 곁에 머물고 떠나가기를 반복한다는 사실을 조금 덜 쓸쓸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될지도 모르겠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