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이야기가 우리를 위로하는 아이러니

[송광용의 밤마다 카페테라스] 아이를 잃는 사건이 많은 시대 큰 슬픔을 어떻게 위로하고 받을까 작은 빵 하나, 더 큰 타인의 슬픔들로

그림책 '어젯밤에 누나하고'. 사진출처예스24
그림책 '어젯밤에 누나하고'. 사진출처예스24

휴일에 아이들을 데리고 도서관에 가곤 한다. 쾌적하게 정비된 어린이 서가엔 어린이 책이 가득하고, 넓은 책상과 소파가 있다. 아이들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서 제 집인 것처럼 편하게 돌아다닌다. 일곱 살 둘째는 그림책을 골라 보지만, 아홉 살 첫째는 만화책을 주로 읽는다. 난 좋은 책을 좀 읽혀야 한다는 의무감에 그림과 글이 적절히 조화된 책을 몇 권 골라서 아이들 앞에 가만히 놓아둔다. “재미있는 책들 같은데 한 번 봐~” 하면서.

그렇게 아이들에게 보여주려고 고른 책들 중 하나를 읽고 내가 감동하고 말았다. 그 책의 표지엔 수상 내역들이 쭉 적혀 있는 금박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벨기에 출신 작가 예프 애르츠가 쓰고, 스웨덴 출신 마리트 퇴른크비스트가 그린 그림책, <어젯밤에 누나하고>(한마당)는 아이의 죽음 이후를 그린 이야기다.

주인공 소년의 집엔 오래 전 세상을 떠난 누나의 빛바랜 사진이 걸려 있다. 소년은 늘 집에서 어떤 슬픔과 그리움의 기운을 느낀다. 어느 날 소년은, 누나의 목소리를 듣는다. 누나는 오늘 밤에 찾아올 테니 같이 자전거 타러 가자고 한다. 밤에 누나는 소년을 찾아오고, 둘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밖으로 나간다. 둘은 누나가 묻힌 무덤에도 가고, 누나가 지냈던 병원도 찾아간다. 누나가 살아있을 때 갔던 공원도 가고, 배도 함께 탄다. 중간 중간에 소년은 그간 누나에게 궁금했던 것들을 묻는다. 만난 적 없었고 막연한 그리움만 있던 누나와 작은 여행을 끝내고 다시 방으로 와서는 침대에서 함께 잠들지만, 깨보니 누나는 없었고 소년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이 그림책 속 소년의 부모는 죽은 딸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꺼려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소년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문득 슬픔이 자라는 걸 느꼈어요. 그저 그런 슬픔이 아니었어요. 늘 있는 슬픔. 오래되어 말라 버린 슬픔. 우리 집 벽을 벽지처럼 덮고 있는 슬픔. 엄마가 만든 수프에도 있고 아빠가 집 주위를 오가며 하는 일들에도 있고…’ -<어젯밤에 누나하고> 중에서

어른들이 쉬쉬하던 누나의 존재를, 소년은 판타지의 세계에서 기어이 만나고 만다. 죽은 누나와 자전거를 타고 대화하면서, 소년은 죽음과 누나의 존재를 비로소 받아들이게 된다. 이제 소년에게 죽은 누나는 더 이상 막연한 슬픔이나 그리움만으로 머물지 않을 것이다.

난 죽음을 마주하는 소년의 모습을 보면서 왠지 모를 위로를 받았다. 이 이야기는 죽은 누나와 소년이 하룻밤의 짧은 여행, 아이다운 동행을 그린다는 점에서 아름답지만, 그건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란 걸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이 안다는 점에서 슬프기도 하다.

말문을 막는 뉴스들 사이에서

두 딸의 아빠가 되고 나서는 뉴스 지면에서 어떤 사건으로 아이를 잃은 가족의 얘기를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같은 심정일 것이다. 그런 슬픈 뉴스는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우리를 찾아온다.

최근에도 숨이 턱 막히는 뉴스들이 있었다. 음주 운전자에 희생된 아이, 아동학대로 고통 받다가 죽은 아이, 러시아 침공으로 희생된 우크라이나의 아이들, 세계 분쟁 지역에서 폭탄이 떨어져 희생된 아이들… 별이 된 수많은 아이들, 그리고 지상에 남은 가족들.

아이의 죽음 소식을 들으면, 아이를 잃은 가족의 ‘그 후’를 떠올리게 된다. <어젯밤에 누나하고>에서 그렸듯, 집안엔 늘 적막함이 자리할 것이다. 공기 중엔 슬픔 입자가 떠다닐 것이고, 어쩌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기라도 하면 그 슬픔 입자가 목구멍을 콱 막아버릴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상황을 견뎌 낼 것이다.

영화 '밀양'의 한 장면. '밀양'은 비극적인 사건으로 아이를 잃은 엄마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영화 ‘밀양’의 한 장면. ‘밀양’은 비극적인 사건으로 아이를 잃은 엄마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뉴스를 보고서는 벽에 막힌 것처럼 ‘아이고, 저걸 어째, 남은 가족들은 어떡하니’ 하는 마음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하지만 슬픈 이야기를 담은 문학은 슬픈 뉴스처럼 슬픔을 담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위안을 준다. 정여울 평론가가 한 얘기가 그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깊은 우울은 더 깊고 쓰라린 다른 우울의 힘으로 치유될 때가 있다. 그리하여 문학은 나보다 더 아프게 앓고 있는 타인의 슬픔 속으로 여행하는 일이다. 앉은자리에서 세상 모든 이의 슬픔 속을 여행하는 기적이, 문학의 세계에서는 가능하다.” -정여울, <문학이 필요한 시간> 중에서.

우리에겐 슬픈 이야기가 필요해

9년 전부터 4월은 슬픔의 달이 되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4월은 찾아왔고, 세월호 9주기가 되었다. 세월호 참사 얘기를 꺼내려는 건 아니다. 다만 세월호 참사 당시, 난 ‘깊은 우울은 더 깊고 쓰라린 다른 우울의 힘으로 치유될 때가 있다’는 말, ‘문학은 나보다 더 아프게 앓고 있는 타인의 슬픔 속으로 여행하는 일이다’는 말을 실감하는 현상을 보았다. 라디오에서, 팟캐스트에서, 그리고 각종 블로그나 SNS에서, 사람들은 문학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건 대개 슬픈 이야기를 담은 문학을 소개하는 형태였다.

그건 비통과 탄식 한쪽에서, 사람들이 일말의 위로를 찾는 행동처럼 보였다. 그리고 문학으로 슬픔을 여행하면서 참사를 당한 사람들의 슬픔을 헤아려보려는 행위로 느껴졌다. 최근에 아이들이 사고로 희생된 뉴스들을 보면서, 그때 많이 회자되었던 이야기 중 하나가 떠올랐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이다.

주인공 앤은 아들 스코티의 여덟 번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빵집에서 초콜릿 케이크를 주문한다. 앤은 케이크를 스코티의 생일에 찾으러 오기로 한다. 스코티는 생일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크게 다친다. 병원에서 스코티의 상황을 지켜보던 앤은 남편의 설득으로 잠시 집에 쉬러 온다. 그때 전화가 한 통 걸려오는데, 전화 건 사람은 “스코티의 일은 잊어버렸소?” 하곤 전화를 끊는다. 그 후에 스코티는 병원에서 사망하고, 앤과 남편은 넋이 나간 채 집으로 돌아온다. 그때 앤은 다시 한 번 전화를 받는데, 전화를 건 사람이 빵집 주인임을 알아차린다. 앤과 남편은 새벽에 빵집을 찾아가선, 자신들이 아들을 잃은 사실을 말하며 빵집 주인에게 분노를 표출한다. 빵집 주인은 사과하며 갓 구운 시나몬 롤빵을 부부에게 내준다.

“내가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빵집 주인은 부부에게 진솔한 자기 이야기를 시작한다. 부부는 아늑한 빵집에서 허기를 느끼게 되고, 주인이 내준 빵을 먹으며 밤새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영화 '마이 베이커리 인 뉴욕'중 한 장면. 마음이 담긴 빵 한 조각도 누군가에겐 뜻하지 않은 위안을 줄 수 있다.
영화 ‘마이 베이커리 인 뉴욕’중 한 장면. 마음이 담긴 빵 한 조각도 누군가에겐 뜻하지 않은 위안을 줄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작은 위안들은 보물찾기의 작은 쪽지들처럼 삶의 구비마다 숨겨져 있다는 걸 보여준다. 우린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 속의 빵집 주인이 될 수 있다.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못할 상황에서도, 여러 관계 속에서 뜻하지 않는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도 발견할 수 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나를 위로할 수는 없다. 더 과감히 말하면, 위로 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정확히 인식한 책만 정확히 위로할 수 있다.”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중에서.

신형철 평론가의 말에 따르면, ‘정확히 인식한 책’을 읽는 일은 다른 이를 위로하는 마음 내지는 역량을 기르는 공부일 수 있다. 여전히 슬픈 뉴스를 보고 말문이 막힌다. 무슨 말이든 위로의 말을 건네기 위해, 내가 겪지 못한 슬픔을 이해하기 위해, 오늘도 슬픈 이야기를 읽는다.

글쓴이

송광용 교사·에세이스트

송광용 에세이스트는 청주교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낮엔 초등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마다 카페에 앉아 글을 쓴다. 에세이, 소설, 동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저서로 산문집 <마음이 조금은 헐렁한 사람>이 있다. 밤의 카페테리아에서 만나 이야기를 건네듯, 소소하지만 울림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바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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