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하지 못한 마음이 있나요
[송광용의 밤마다 카페테라스] 어린이날 생각나는 ‘윤기’ 이야기 작은 체구, 조용한 성격, 한부모 가정 ‘작은 몸을 누구도 안아주지 않았다’ 5월, 관심과 감사를 전할 마음 가짐을
항간에 많이 떠도는 조언 중에, 사랑한다면 바로 지금 마음을 표현하라는 얘기가 있다. 평소에 사랑을 표현하지 않고 마음을 숨겨두다가 갑작스런 일로 영영 그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게 된 숱한 사례와 이야기들이 부표처럼 우리 주변을 떠돈다.
부모님을 여의고 나서야 가슴을 치는 자식의 이야기, 사랑인지 우정인지 확신하지 못하다가 상대가 떠나고 나서야 사랑인 걸 깨닫고 눈물을 흘리는 이야기, 선의를 표현할 타이밍을 놓쳐 자책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이 주변에 많은 걸 보면, 나만 우유부단하고 실천력이 부족한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표현하지 못하고 끝내 마음의 바다에 가라앉게 된 감정의 사연을 몇 개씩은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린이날 즈음이 되면, 유독 몇몇 어린이들이 마음에 떠오른다.
윤기 이야기
윤기는 십 수 년 전, 내가 초임 교사 시절 만난 아이다. 그 아이는 학기 중간에 갑작스레 전학을 왔다. 또래보다 키 작고 귀여운 얼굴을 가진 6학년 소년. 말수가 적어서 속을 잘 알 수 없었지만 행동하는 걸 보면 아직 순진한 면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이의 가족 정보엔 아버지 이름만 기재되어 있었다. 아이의 아버지에게 직접 듣질 못했으니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다. 어떤 사정이 있어서 아버지와 함께 사는구나, 하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어느 날 문자 한통이 왔다. 문자를 보낸 이는 자신을 윤기의 엄마라고 밝혔다. 윤기 엄마는 자신이 윤기 아빠와 이혼했는데 아이를 볼 수 없어 윤기가 너무 걱정된다고 했다. 어떤 이유에선지 윤기 엄마는 윤기를 가까이에서 만나거나 윤기 아빠에게 연락할 수 없는 상황인 것 같았다. 그래서 가끔 선생님을 통해 윤기의 소식을 알고 싶다고 했다. 난 윤기에 대해 궁금하시면 연락을 주십사하고 답을 했다. 그 후로 윤기 엄마는 가끔 내게 문자로 윤기의 안부를 물었고 난 윤기 대신 안부를 전해 주었다.
“윤기는 조용하고 부드럽습니다. 친구들과 무리 없이 지냅니다. 많이 먹지 않아서 마르고, 힘이 없어 보이는 게 조금 걱정스럽지만 급식을 잘 먹도록 지도하겠습니다.”
“너무 걱정 안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체육시간에 윤기가 뛰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윤기는 작지만, 아주 날랩니다. 축구도 잘하고 운동 신경이 좋습니다.”
아이들이 휴대 전화를 갖고 있는 게 흔하던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윤기 엄마는 윤기에게 직접 안부를 묻거나 하지 못했다. 간간이 윤기 엄마에게 오면, 나도 이런 식으로 윤기의 안부를 전하곤 했다.
윤기의 결핍
어떤 일이 생기면 내게 달려와 어려움을 토로하는 아이들과 달리, 윤기는 자기 어려움을 잘 내색하지 않는 아이였다. 별 욕심이 없었고 갈등이 벌어지려고 하면 먼저 양보하는 등 별 문제없이 지냈지만, 그 모습은 자신감 결여나 관계에 대한 체념처럼 보이기도 했다. 학교에서 윤기는 대체로 정적이고 존재감 없이 지냈다. 부모님의 이혼과 갑작스런 엄마의 부재가 윤기의 이런 모습에 영향을 준 건 분명해 보였다.
윤기는 작은 몸짓으로 속삭이듯 혼란과 슬픔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윤기에게 마음이 갔는지 모르겠다. 어떤 아이들은 마음의 문제를 외부로 발산하여 문제를 일으킴으로써 자기 상처를 호소한다. 윤기는 정반대였다. 속으로 움츠러들었다. 지금 누구도 그 실체를 알지 못하지만 언젠가 갑작스레 밖으로 뿜어져 나올지도 모를 화학작용이 윤기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윤기가 보였던 결핍은 윤기가 단지 한부모 가정의 아이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양육자가 한 사람이든 여러 사람이든 그 아이가 어떤 기대를 받고 자라는 지다. 세상의 많은 일에서 ‘중용’의 적용이 유의미하듯, ‘기대’도 마찬가지다.
부족한 기대는 무관심이고 과한 기대는 아이를 힘들게 할 것이다. 그 중간 어디쯤의 적정한 기대는 아이의 안전그물이 된다. 전혀 기대를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밑바닥이 없는 곳에 떠 있는 것처럼 위태롭다.
자신은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상관없다는 식이 되기 십상이다. 넌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돕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넌 매사에 침착했으면 좋겠어. 이런 양육자의 속삭임은 아이의 발밑에 든든한 블록을 만들어 줄 것이다.
당시 윤기는 부모님이 주는 기대와 지지를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작은 몸을 누구도 안아주지 않았다. 말수 적고 속으로 파고드는 아이여서일까. 윤기가 자꾸 신경 쓰였다. 크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지만 그저 작고 왜소한 윤기를 안아주고 싶었다.
그래서 학급에 ‘포옹의 날’이라는 작은 이벤트를 시작했다. 말 그대로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수업이 다 마치고 집에 갈 때 격려의 말을 건네며 서로를 안아주는 날을 정한 것이다. 남학생은 내가 차례로 안아주고, 여학생은 서로 돌아가면서 안아주도록 했다. 난 윤기를 안아주면서 작은 온기라도 전해지길 바랐다.
“윤기야, 전학 와서 친구와도 잘 지내고 정말 잘하고 있어. 근데, 너무 말랐구나. 밥 잘 먹고 더 건강해지자.”
이런 격려와 기대를 말하며 안아주면, 윤기는 조용히 미소짓곤 했다.

남은 아쉬움
활력 없고 조용한 윤기가 에너지 넘치는 때가 있었다. 바로 축구를 할 때였다. 난 아이들 사이에 섞여 공을 차곤 했는데, 윤기가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며 드리블을 할 때 넋을 잃곤 했다. 윤기는 키 작고 왜소했지만 운동 신경이 좋았고 축구를 잘했다. 난 윤기의 낡은 운동화를 보며 언젠가 윤기에게 축구화를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졸업식 날 아침에, 난 윤기에게 주고 싶었던 축구화를 끝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다. 이후에 그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았다. 윤기에게 기대를 표현하며 윤기의 발밑에 블록 하나를 놓아줄 수 있었는데, 하는 생각만 되새김질하게 됐다. 윤기가 떠오를 때면,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생각만으로 친절을 베풀었던 나의 우유부단함에 한숨이 나온다. 이제 서른 즈음의 청년이 되었을 윤기는 축구화 없이도 활기차게 달리며 잘 자랐겠지만.
표현되지 못한 친절은 화석이 되어 마음의 바다에 가라앉는다. 마음은 점점 무거워진다. 그때가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을 수시로 꺼내야 가벼운 마음으로 나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5월은 우리네 관계와 관련된 기념일들이 많다. 관심과 감사를 전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 있다. 우유부단하지 말고, 표현 못했다 후회하지 말고, 마음을 전하자. 마음을 가벼이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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