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요?

[송광용의 밤마다 카페테라스] 사람은 성장하고 변화한다고? 사람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고? 초등아이 보며, 무엇이 맞을까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은...

영화 '어바웃 어 보이'의 한 장면.
영화 '어바웃 어 보이'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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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사람은 성장하고 변화한다는 강력한 믿음이 있다. 이는 수많은 문학 작품들이 보여주는 내용이다. 소설과 동화는 일정한 패턴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된다. 어떤 욕망이나 소망을 가진 등장인물은 거부할 수 없는 사건에 휘말린다. 등장인물은 갈등에 휩싸이고, 그 갈등을 뚫고 나오는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거나 삶의 태도가 바뀐다.

많은 작법서나 창작 교사들이 공통적으로 이런 얘기를 한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처음과 끝이 같으면 안 된다고. 그게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가치관이든, 성격이든, 삶에 대한 태도든, 그것이 뭐가 됐든 간에, 주인공은 변화한다. 현실에서도, 강연이나 간증의 수많은 연사들은 ‘변화한’ 사람들이다.

우리에겐, 변화 가능성에 대한 믿음만큼이나 강력한 또 하나의 믿음이 있다. 바로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믿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두 가지 믿음은 상반된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사람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라.’ 같은 꽤 유용한 조언들은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믿음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이 믿음 역시 변화 가능성만큼이나 오랜 시간동안 일정한 근거를 획득해왔다. 문학 작품에서도 바뀌는 주인공보다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변하지 않는’ 인물이 훨씬 많다. 특히, 강력한 빌런은 한결같이 악독하다.

학교에서 만난 학부모들이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을 짚어보며, 그 두 시각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영화 '뉴뮤턴트'의 한 장면.
영화 ‘뉴뮤턴트’의 한 장면.

애정도의 차이

예전에 맡았던 초등학교 2학년 학급에 학기 초부터 문제 행동을 많이 하는 아이가 있었다.(매년 그런 아이들은 있기 마련이다.) 아이를 석규라고 부르기로 하자. 석규는 다른 친구들이 싫어하는 행동을 많이 했다. 수업 시간에 이상한 소리를 낸다든가, 다른 친구가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한다든가. 친구들과 소통하는 것에도 어려움을 겪었고, 함께 어울려 놀다가 툭탁툭탁 다투는 경우도 많았다.

학기 초에 석규 때문에 다른 학부모들의 민원을 제법 받았다. 그 중에 착하고 순한 영후 어머니 민원도 있었다. 영후 어머니는 영후가 집에 와서 석규가 자꾸 시비를 걸고 괴롭힌다는 문자를 내게 보내왔다. 난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했다. 매일 석규가 일으키는 다툼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시기였다.

매일 지도하고 혼내도 다음 날에 또 계속되었다. 영후 어머니도 다른 학부모들처럼 석규의 소문을 익히 듣고 있었을 것이다. 난 영후 어머니에게 “지도하겠으니 좀 시간을 주십사” 양해를 구하는 답을 보냈다. 영후 어머니도 석규의 상황을 이해해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둘 사이의 갈등은 일단락되었다.

그 사이, 석규 어머니와 상담을 하면서 현재 상황을 말씀드렸다. 석규 어머니는 발달 장애가 있는 석규 동생을 돌보느라, 석규에게 신경을 못 썼다며 후회하셨다. 어머니는 석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뭐든 협조하겠다고 했다. 난 석규와 어머니를 교내 상담실과 연결해주었다.

매주 석규와 어머니는 상담 선생님과 상담을 받았다. 어머니는 석규와 대화하고 소통하는 방법을 다시 익히고, 실천했다. 한 학기가 지났을 때, 석규의 상태는 놀랍도록 개선되어 있었다. 불안정하고, 가정에서 동생에게 밀려 소외되었던 마음이 엄마의 보살핌으로 채워진 것이다. 간간이 작은 갈등이 일어나긴 했지만, 학기 초와 비교하면 정서적으로 많이 안정된 모습에 석규를 볼 때마다 칭찬이 나왔다.

학교에서 석규의 문제 행동은 확연히 줄었고, 내 눈에 석규는 귀여운 학생이 되었다. 2학기가 되어서 문제가 생겼다. 석규와 영후의 갈등이 다시 발생한 것이다. 나도 두 아이들이 다투는 걸 보았기에, 무슨 이유인지 대강은 짐작하고 있었다. 이번엔, 석규의 일방적인 시비 때문이 아니었다.

석규가 지나가는데, 책상 사이 좁은 통로에서 영후가 석규의 어깨를 일부러 부딪치는 걸 보았다. 모둠 활동을 할 때, 영후가 조금 굼뜬 석규를 나무라기도 했다. 석규가 영후에게 이상한 말을 했다. 둘의 감정이 안 좋아져서, 서로 사소한 시비를 건네는 상황이었다. 큰 싸움으로 번지진 않았고 작은 말다툼으로 그치곤 했기에, 난 지켜보다가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조만간 개입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영후 어머니에게 문자 민원이 왔다. 또 석규가 영후를 괴롭힌다고 했다. 난 안 그래도 최근에 둘 사이에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있고, 둘과 상담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 영후 어머니는, 학기 초처럼 이번에도 석규가 일방적으로 영후를 집적거렸을 거라고 확신했던 것 같다.

난 구체적으로 설명 드렸다. 이번엔 전과 좀 다른 것 같다고, 둘 사이에 서로 감정이 상한 부분이 있어서 서로 시비를 거는 것 같다고. 아이들 사이에 자주 일어나는 일이니, 상담하면 괜찮을 거라고 안심시켜드렸지만, 영후 어머니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영후 어머니는, “지금 우리 애도 잘못한 게 있다는 말이에요? 상대가 석규인데요?” 라는 말을 에둘러 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을 불러 상담을 하니, 영후도 석규에게 먼저 시비를 걸었던 걸 인정하고, 서로 사과를 했다. 그 뒤로 아이들은 잘 지냈다. 아이들의 다툼은 잘 마무리 되었지만, 영후 어머니는 내게 감정이 남은 듯 했다. 전체적으로 문자를 보냈을 때, 상냥한 답을 해주시곤 했지만, 그 일 이후로 한 번도 답장을 주시지 않았다.

영후 어머니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영후 어머니는 석규의 변화와 성장을 잘 몰랐다. 영후 어머니에게 석규는 언제나 가해하는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변화에 대한 두 믿음 중에 어떤 걸 꺼내드느냐는, 그 대상을 얼마나 아는지와 애정도와 관련이 깊다. 우리는, 내 아이에 대해서는 변화 가능성을 긍정하는 반면, 남의 아이에 대해서는 바뀌지 않을 거라는 시각을 갖기 쉽다.

그 사람은 주인공인가, 주변 인물인가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이 중요한 인물, 즉 주인공이라면 우린 그의 변화 가능성을 높게 점칠 것이다. 앞서 얘기했듯, 주인공은 늘 변화하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자기 자녀는 거의 다 주인공이다. 자녀의 변화 가능성을 긍정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반대로, 어떤 대상을 주인공이 아닌 주변 인물, 혹은 빌런으로 여긴다면, 그 대상의 변화 가능성을 믿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고정된 시각을 어느 정도 깨뜨릴 필요가 있다. 내 아이나, 내 사람의 변화 가능성뿐 아니라, 주변 인물에도 변화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가 있다. 그렇게 했다면, 영후 어머니가 두 아이의 갈등을 받아들이는 일이 조금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어떤 대상을 중요한 인물로 여기고 변화 가능성을 믿는 태도는 좋기만 한 걸까. 거기엔 함정이 숨어 있다. 예전에 어떤 학부모는 문제 행동을 하는 자기 자녀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 무한히 긍정하는 시각을 보여주었다. 문제는, 그 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 학부모는 정작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학부모는 상담할 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 아이는 문제를 일으키지만, 언젠가는 바뀔 거예요. 전 믿어요.”

난 그 학부모를 보며 잠시 희망을 품었다. 아이가 개선될 거라고. 저렇게 믿어주는 부모가 있다면, 다른 친구에게 못되게 말하고, 상처를 주는 행동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그 학부모는 여전히 바빴고, 아이를 우선순위로 두지 않았다. 변화를 위한 어떤 인풋도 아이에게 제공하지 않았다. 아이는 변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하는 지도는 증상만 완화할 뿐이었다.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았다. 그 학부모는 문제가 지속된 이후에도, 아이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는 번드르르한 말들을 쏟아내곤 했지만, 실제적인 행동을 하진 않았다.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한 장면.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한 장면.

말은 누구나 그럴 듯하게 할 수 있다. 막연한 기대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할 맹신일 뿐이다. 한 학기 내내 학부모 상담을 받고 아이와 소통을 실천했던 석규 어머니처럼, 행동할 때 변화가 시작된다. 내게 중요한 누군가의 변화를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변화의 인풋을 제공해야 한다.

그 사람이 나 자신만큼 중요한 사람이라면, ‘사람은 변화한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이 두 가지 상반된 믿음 모두가 한 가지 공통된 행동을 불러올 것이다. 그건, ‘내가 바뀌는 일’이다. 이런 일을 우린 흔히 ‘사랑’이라 부른다. 사랑이 말이나 감정이 아니라 ‘의지’에 가까운 일이라고 하는 건, 이런 점 때문일 것이다.

글쓴이

송광용 교사·에세이스트

송광용 에세이스트는 청주교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낮엔 초등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마다 카페에 앉아 글을 쓴다. 에세이, 소설, 동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저서로 산문집 <마음이 조금은 헐렁한 사람>이 있다. 밤의 카페테리아에서 만나 이야기를 건네듯, 소소하지만 울림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바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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