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생각해 보는 ‘어린이’의 탄생

[송광용의 밤마다 카페테라스] 아이가 자립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역사에서 ‘아동’ 개념이 탄생한 건 ‘근대’ 어른 ‘뉴베리’가 아동서적을 발간한 까닭은

일본 드라마 '독거소년 코타로'의 한 장면. 이 드라마에선 홀로 원룸에 살면서 자립적인 생활을 하는 코타로라는 5살 아이가 등장한다.
일본 드라마 '독거소년 코타로'의 한 장면. 이 드라마에선 홀로 원룸에 살면서 자립적인 생활을 하는 코타로라는 5살 아이가 등장한다.

미야모토 테루의 소설집 <오천 번의 생사>에 수록된 단편 「힘」에는 이제 막 초등학교를 입학한 아이가 등장한다. 입학 사흘째부터 아이는 홀로 등교한다. 소설은 아이가 홀로 첫 등교를 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아이는 버스에서 부주의해서 호통을 듣기도 하고, 길을 가다가 멈춰 서서 도시락을 떨어뜨린 사람을 관찰하기도 하고, 담배꽁초 줍는 노인을 피해 엉뚱한 골목으로 들어서기도 한다. 상급생을 따라가다가, 술에 취해서 쓰러진 남자를 만나기도 한다. 아이는 이리저리 기웃거린 끝에 겨우 학교에 도착한다. 그렇게 아이가 홀로 등교하는 이야기가 소설의 중심이라고 생각할 즈음, 마지막 부분에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진다.

주인공의 엄마가 홀로 등교하는 아이를 일정한 거리에서 지켜보며 따라갔던 것이다. 꽤 시간이 지난 후에, 엄마는 자식에게 그날의 기억을 얘기한다. 아이가 한눈을 팔 때, 길을 잘못 들었을 때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도.

아이의 자립은, 이제 시작! 하고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아이는 수많은 영역에서 갖은 시행착오를 다 거친 끝에 하나씩 자립을 배워간다. 먹고, 입고, 씻고, 자고, 바깥을 다니는 등의 모든 영역마다 각각의 타이밍으로 아이들이 홀로 선다. 그 시기를 넘어설 때, 대부분의 부모는 마음을 졸인다. 과연 아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고민도 하고, 아직 도움이 필요한 아이를 세상으로 밀어넣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하면서.

그건 아이들이 보호받아야 할 존재이며, 몸과 마음이 지켜져야 하는 존재라는 자연스러운 인식이 우리 어른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인식이 아주 오래전부터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아동’ 개념은 근대에 탄생했다

이 땅의 부모들은, 5월의 대표적인 기념일인 ‘어린이날’을 잘 보내기 위해 꽤 공을 들였을 것이다. 늘 있었던 것 같은 오늘날의 ‘아동’이나 ‘어린이’라는 개념은 실은 근대에 와서 형성된 사회적 산물이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는 이 같은 사실을 <아동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다루고 있다. 필립 아리에스는 유럽의 예술, 문화, 놀이, 역사 등의 자료를 통해 아동기가 생겨난 역사적 배경과 과정을 다루고 있다.

중세 시대까지 아동에 대한 인식은 고작해야 유아기에 ‘귀여워하기’가 다였다. 아이는 어른에게 즐거움을 주는 존재로, 마음대로 다루어도 별 상관이 없었고, 5~7세가 지나면 어른들의 세계로 흡수되었다. 그 시대엔 아이가 어른들과 음담패설을 나누거나 어른처럼 노동을 하는 것도 일상적이었다. 아이에게 별다른 금기가 없었다. 그건 곧, 아이의 심신이 건강하게 자라나는데 필요한 보호 장치가 없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중세 사회에는 아동기에 대한 의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동기에 대한 의식은 아이의 독자성에 대한 의식과 일치하는 것이며, 이러한 독자성은 아이는 어른이나 젊은이와 본질적으로 구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세에는 이러한 의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아이는 어머니나 유모의 끊임없는 염려 없이도 살아갈 수 있게 되자마자, 어른과 구별되지 않고 곧장 어른의 세계에 합류했다.”-필립 아리에스, <아동의 탄생> 중에서

영화 '쿵푸허슬'의 한 장면. 중세 사회의 아동기에 대한 관점은 쿵푸허슬에 나왔던 꼬마근육맨 같은 느낌을 준다.
영화 ‘쿵푸허슬’의 한 장면. 중세 사회의 아동기에 대한 관점은 쿵푸허슬에 나왔던 꼬마근육맨 같은 느낌을 준다.

아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16세기까진 교회 성직자들, 17세기엔 이성적인 관습에 주목하던 도덕론자들로부터 생겨났다. 그들은 아동기를 민감한 시각으로 바라보았고, 아이들을 보호하고 현명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한 생각은 비로소 가정생활로 스며들었고, 18세기에 이르러서는 가정에서도 이 새로운 인식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어린이책이 없었다고?

근대에 아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보급되고 ‘아동을 위한’ 변화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8세기에 이르러 누군가는 어린이를 위한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전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책은 없었다. 아이들은 일상의 규칙과 교훈을 담은 따분한 책을 읽거나, 어른들이 읽는 이야기책을 읽어야 했다.

그림책이나 아동 문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뉴베리상’(최고상)이나 ‘뉴베리 아너상’(주목할 작품에 주는 상)이 아동 문학에 수여되는 권위 있는 상이라는 걸 알 것이다. 그 상을 받은 책의 표지엔 커다란 금박과 은박의 메달 스티커가 붙어있다. 미국도서관협회에서 뛰어난 미국 아동 문학에 상을 수여하면서 붙인 ‘뉴베리’라는 이름은, 18세기에 어린이책을 만들기 시작한 ‘존 뉴베리’의 이름을 딴 것이다.

농장에서 살았던 존 뉴베리는 성인이 되자 인쇄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존은 그 일을 좋아했다. 자립할 여건이 되자 그는 출판사를 차려서 어른들이 읽는 책을 출판했다. 생활 터전인 레딩시에서 런던으로 이사한 존은 그 일을 계속했고, 사람들로 북적한 거리에서 책방을 열게 됐다. 당시 아이들은 거리에서 조잡하게 줄인 어른 책을 구해 읽었고, 수준에 맞는 이야기에 굶주려 있었다. 존은 어린이를 위한 책 백 권 이상을 출판했다. 어린이책은 아이들의 인기를 끌었고, 바다 건너 미국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지금은 책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을 위한’ 수많은 물건과 시설들이 존재한다. 오늘날 당연해 보이는 일이지만, 그 시작엔 용기를 갖고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다.

2023년도 뉴베리상 수상작 'Freewater'의 표지. 커다란 금박 스티커 문양이 붙어있다.
2023년도 뉴베리상 수상작 ‘Freewater’의 표지. 커다란 금박 스티커 문양이 붙어있다.

모(부)성애를 넘어서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노래가 울려 퍼지는 5월은 이 세계의 어린이를 생각하기 좋은 달이다. ‘존중받지 못하는 작은 어른’이 전근대에 어린이의 위치였다면, 지금은 대부분 ‘심신이 건강하게 자라도록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할 존재’가 어린이의 위치임을 동의하기에 이르렀다. 어떤 대상을 인류라는 거대한 밀가루 반죽에서 떼어내어, 맞춤형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이며, 그것이 인류의 진전이라고 믿는다.

육아의 목표는 아이의 자립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툭하면 흉흉한 소식이 들리고 주변에 안전을 위협하는 것들이 많아지다 보니, 두 딸을 밖에 홀로 둘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얼마 전에, 아홉 살, 일곱 살 두 딸에게 처음으로 마트 심부름의 기회를 주었다. 난 마음이 놓이지 않아, 글의 서두에 소개했던 미야모토 테루의 소설 속 엄마처럼 딸아이들의 뒤를 밟았다. 나는 딸들을 숨어서 지켜보았다. 아이들은 성공적으로 김치찌개에 넣을 두부를 사고 적당한 가격 선에서 자신들의 과자를 사서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아이마다 시기는 다르겠지만, 나뿐 아니라 거의 모든 부모가 비슷한 초조함으로 아이를 지키고 자립을 준비할 것이다. 언젠가 아이들이 커서 많은 영역에서 자립을 이루고, 더 이상 나의 초조함이 필요 없어진다면, 그것 또한 서운한 일이 될 것이다. 보호가 필요 없는 아이를 계속 지키려 든다면 그것도 문제가 된다. 어쩌면 육아의 목표는, 아이의 자립뿐만 아니라 부모의 자립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글쓴이

송광용 교사·에세이스트

송광용 에세이스트는 청주교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낮엔 초등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마다 카페에 앉아 글을 쓴다. 에세이, 소설, 동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저서로 산문집 <마음이 조금은 헐렁한 사람>이 있다. 밤의 카페테리아에서 만나 이야기를 건네듯, 소소하지만 울림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바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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