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오랜 벗 ‘자기기만’을 소개합니다
[송광용의 밤마다 카페테라스] 우리는 항상 진실을 말하고 있을까 ‘자기기만’이 더 삶에 필요한 이유
만약 여러분에게 누군가가 “당신이 하는 대부분의 말과 행동은 자기기만에 가깝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당혹스러울 것이다. 무고한 시민인데 마피아라고 지목을 받은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며 이렇게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무슨 근거로, 내가 지금 거짓말쟁이라는 거야?”
연초에 난, 우리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많은 말과 행동이 자기기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책을 읽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샹커 베단텀과 빌 메슬러가 쓴 <착각의 쓸모>가 바로 그 책이다. 그 책을 읽다 보면 세상은 온통 거짓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책엔 이런 주장들이 담겨있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진실’만을 말하지 않는다. 의례적인 말로 내 진짜 생각을 덮는 기술을 배운다. 자신의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은, 냉정하고 사회성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우린, 나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실제 될지 안 될지 모르는 말로 격려하기도 한다. “다 잘 될 거야” 라든가 “집중하기만 하면 성취할 거야” 와 같은 말들. 그 외에도, 미래를 긍정하고 상상하는 일, 어떤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 모두가 자기기만을 바탕으로 한다고. 앞의 행위들이 사회적으론 배려나 사회적 기술로 통용되기도 하지만, 사실이 아니거나, 사실일지 아닐지 자신도 모르는 상태에서 하는 말과 행동이기에 엄밀하게 따지면 자기기만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기만 그 자체보다, 기만행위를 하는 동기를 따져 그런 말과 행동을 허용한다.
이런 얘기들을 듣다보면, 인간은 애당초 진실하게 살아가긴 틀린 존재라는 생각마저 든다. 우리가 서로에게 힘이 되는 존재가 되거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려면 진실을 반쯤은 접어둬야 한다는 말이니까. 그런 불만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장들은 우리의 마음을 이해하는데 통찰력을 제공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우리의 정신을 로마라는 도시에 비교했다고 한다. 정신은 도시처럼 하나의 층위 위에 다른 층위가 겹겹으로 세워져 있다. 이를 테면, 고대에 생긴 도시와 최근에 지어진 마천루가 공존하는 것이 우리의 정신이다. 마천루는 과학과 이성, 논리를 수행하는 능력을 지녔다. 우리 눈엔 우뚝 선 마천루가 그 도시를 대표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우리의 생존과 적응에 필수 역할을 하는 것은 고대 도시다. 고대 도시는 비이성‧비논리로 가득하다. 우리의 뇌는 우리의 생존이 더 용이하도록 수시로 이성이 끊기도록 하는 버그를 만들었다. 부모와 자식은 맹목적으로 사랑하고, 위험에선 두려움에 벌벌 떨고, 사회적 규범에 따라 자신의 욕구를 조정하는 여러 감정이 생겨났다.
여러 실험과 연구를 통해 심리학자들은, 세상을 현실적으로(정확하게) 바라보는 일과 정신적으로 건강한 것이 꼭 동일선상에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의 자기기만은 생존과 적응에 이익이 되기도 하고, 더 나아가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데 기여한다고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표현 욕구와 생존 본능의 사이에서
SNS가 활성화되기 전엔, 여러 사안에 대한 주장을 뉴스나 신문을 통해 관전하는 정도에 그치곤 했다. 그렇지만 SNS가 생활화되면서, 우리 모두는 저마다 자신의 관점과 주장을 직접 외칠 수 있는 광장을 갖게 됐다. 개인에게 표현의 기회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처럼, 생각하는 걸 전부 드러내진 않는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도 생존과 사회적 관계를 위한 자기기만의 기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평소에 난, 합리를 앞세워 비판하는 행위와 누군가 불쾌할까봐 침묵하는 행위 사이에서 갈팡질팡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라고 확신한다.
인터넷 신문과 SNS들, TV뉴스들을 보면, 그곳엔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존재하는데, 난 그 매체들을 보면서 이따금씩 깜짝 놀라곤 한다. 어떻게 저렇게 매사에 강직하고 명료한 목소리를 내지? 정치에 관해서라면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조차도 한 마디 거들 것 같은 판이다. 사람들은 분야를 막론하고 확고한 자기만의 인식을 갖고 주장한다. 모든 사안이 첨예하기 이를 데 없고, 그들의 손에 들린 말의 검은 언제라도 상대를 가차 없이 베어버릴 것만 같다. 그들은 거대한 마천루에서 확성기를 들고 말을 그치지 않는다. 그들을 바라보는 내 감정은 복잡하다. 첫째, 모든 일에 확고한 생각을 갖는다는 것, 그리고 그 생각을 거침없이 드러낼 수 있다는 것에 부러운 마음. 둘째, 그런 강직한 자세가 굳어 버려서 생각을 유보한다거나 주저할 수 있는 상태로 영원히 돌아가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안타까움의 마음. 셋째, 나도 찔릴까봐 무서운 마음.
가끔씩, 나 역시 어떤 사안이나 대상에 대해 비판적이고 독한 글을 쏟아내 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때 그런 걸 시도해본 적도 있다. 그럴 때마다, 생존을 염려하는 내 안의 고대 도시들의 불이 환하게 켜진다. 불빛을 깜빡이며 합리성의 산실인 마천루를 향해 다급한 신호를 보낸다. 누군가 불쾌해할 거야! 조심해, 역공을 당할 수도 있어! 그 신호를 보고 난 슬그머니 들었던 확성기를 내리곤 한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지나친 비판이나 독한 말을 경계하는 쪽인 것 같다. 그는 <장수 고양이의 비밀>이라는 에세이집에서 이런 말을 한다.
“뭔가를 비난하고 엄격하게 비평하는 행위 자체가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모든 텍스트는 다양한 비평에 열려 있으며, 또한 그래야만 한다. 내가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무언가에 대해 부정적으로 계몽하는 행위는 경우에 따라 여러 가지를, 때로 자기 자신마저 돌이킬 수 없게 손상시킨다는 점이다. (…) 즉효성을 요구하는 요즘 사회에서 그렇게 여유로운 자세로 살다보면 가끔 스스로가 바보 같아지곤 한다. 목청 높여 누군가를 통렬히 매도하는 편이 훨씬 똑똑해 보인다.”
이성과 진실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마천루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면, 사이다라는 평가를 듣기도 하지만 자신의 어떤 부분이 손상된 채로 경직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반면에 비합리를 따르더라도 생존을 중시하는 고대 도시의 영향을 크게 받는 이들은, 온건해 보이고 누구도 상처주지 않지만 우유부단한 태도로 진실을 외면한다는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할 수도 있다. 몇 번을 생각해도 내겐 여전히 어려운 문제다. 결국 제 깜냥대로, 자신의 마음에 부담이 안 갈 정도의 선에서 균형을 지킬 수밖에. 역시 김빠진 결론. 내가 주먹을 치켜들고 한 가지 확실하게 주장할 수 있는 건, 자기기만은 내 오랜 벗이라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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