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정의는 어떤 모양인가요

[송광용의 밤마다 카페테라스] SNS에 ‘분노’로 연일 표출되는 정의 쉽게 잊혀지는 정의도 정의인가 초등교실에 정의가 습관된 아이처럼 어른도 정의에 중독된 건 아닐까

영화 '더 배트맨'의 한 장면.
영화 '더 배트맨'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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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Plus의 연애 매칭 프로그램 <나는 솔로>를 즐겨본다. 짝을 찾기 위해 나온 남녀가 한정된 기간과 공간에서 서로를 알아간다. 출연자들의 감정이 고조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즐겁다. 이 프로그램을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프로그램 속 인물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저 상황에서 난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할까’를 고민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이 프로그램은 화제성이 대단하다. 출연자의 말과 행동이 연일 뉴스를 장식한다. 프로그램에 소위 ‘빌런’(이라 평가받는) 출연자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온라인상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난리가 난다. 어제 춘자가 한 말 들었냐며 누가 포문을 열면, 한참 이야기꽃이 피어난다. 우린 빌런 출연자에게 부당한 대접을 받은 상대방의 감정을 대변하기도 하고, 아주 드물지만 빌런으로 지목된 이를 옹호하기도 한다.

내게 <나는 솔로>는 매주 간접적으로 사람의 감정을 들여다보며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출연자들의 언행을 통해 나 자신을 반추해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유익한 프로그램이다.

지난 16기 돌싱 특집 편은 화제성이 폭발한 회차다. 어떤 출연자의 무례해 보이는 말과 행동이 화제가 되고, 타인에 대해 잘못 전한 말들이 나비효과처럼 누군가의 관계에 영향을 주는 등 갈등과 오해가 극으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예상한 대로 다음 날에 해당 출연자의 SNS엔 악플과 왜 그랬냐고 추궁하는 댓글로 도배가 되었다는 뉴스 기사를 볼 수 있었다. 댓글 중엔 입에 담기도 힘든 모욕적인 말과 욕설도 있었다.

영화 '홀리 데이트'의 한 장면.
영화 ‘홀리 데이트’의 한 장면.

정의감에 중독된 사회

요즘 사람들이 정의의 칼을 들고 분연히 일어나는 일은 비단 인플루언서의 세계에 국한된 게 아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누군가의 말과 행위를 판단하고, 정의감을 느끼고, 분노한다. 우린 타인의 사생활이나 개인의 선택, 주장 앞에서 분노하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

누군가의 비윤리적인 일이나 잘못, 실수 앞에서 그들을 비판하는 일은 일견 정당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일본의 분노 조절 전문가 안도 슌스케는 <정의감 중독 사회>라는 책에서 현대 사회에 팽배한 분노와 정의감의 관계를 이렇게 성찰하고 있다.

“악플 릴레이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격렬하게 타오르지만, 그 불꽃은 곧 꺼지고 대부분의 사건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렇게 쉽게 잊히는 것을 정의라고 할 수 있을까? 정의는 소중하고 함부로 다뤄서도 안 되는 존재이며, 금방 잊혀서도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정의감이 쉽게 생겨나고 눈 깜짝할 새 소비되기를 반복하는 시대가 되었다.” -안도 슌스케, <정의감 중독 사회> 중에서

많은 사람이 정의로 무장하고, 자신의 분노는 정당한 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목소리를 높인다. 한편으론, 그런 정의의 칼이 내 쪽으로 향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게시물을 올릴 때,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받을 만한 부분이 있는지를 자가검열한다. 큰 목소리를 내며 누군가를 성토하는 사람을 보면, 그와 생각이 달라도 쉽게 자기 의견을 내지 못한다. 숨을 꼴깍 삼키며 지켜본다. 그 사람이 든 정의의 칼이 자신을 향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내용보다는 그 말들의 거침없음으로 인해 고개를 숙이게 된다.

“사람을 구하기 위해 존재해야 할 정의가 어느샌가 나를 감시하는 것, 나에게 화내는 것, 그래서 거리를 두고 싶은 것으로 변하고 있다.” -안도 슌스케, <정의감 중독 사회> 중에서.

정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

세상엔 확실히 옳고 그른 일들이 존재한다.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기본 원리, 도덕률이라 부르는 것들이다. 하지만 현실의 상황에서 정의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지금까지도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D.C.의 배트맨 시리즈 <다크나이트>와 마블 영화 <캡틴아메리카: 시빌워>는 나란히 이 정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다크나이트(어둠의 기사)’는 배트맨의 별칭으로, 그 이름에서 벌써 법의 테두리 밖에서 ‘사적 응징’을 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법이 허락하지 않는 그 일을 말이다. 슈퍼히어로들은 엄연히 말하자면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 그걸 정의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들이 없다면 세계는 어떻게 될까. 어떤 게 정의라는 걸까.

배트맨은 <다크나이트>에서 ‘트롤리의 문제’ 같은 선택을 강요받기도 한다. 누군가를 살리려면 누군가가 죽는 걸 지켜봐야 한다. 어떤 기준으로 그걸 선택할 것인가. ‘트롤리의 문제’는 윤리학 분야의 사고 실험이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전차가 맹렬히 달려오고 있다. 당신은 선로 변환기 앞에 서 있다. 그대로 두면 다섯 명의 인부가 부딪히겠지만, 선로 변환기를 작동하여 전차의 방향을 바꾸면 한 사람만 부딪히는 상황이다. 어떻게 해야 옳은가. 많은 사람이 다섯 명을 살리고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게 옳다고 생각할 것이다.

다음 상황은 조금 다르다. 전차가 움직이는 방향에 서 있는 다섯 명은 흉악범이고, 다른 한쪽에 있는 것은 당신의 가족이다. 과연 누굴 살릴 것인가. 거기에도 숫자를 고려할 것인가. 이 사고 실험은 현실에서 정의를 규정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걸 보여준다. 단 하나의 조건만 바뀌어도 선택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옳고 그름의 관점이 달라질 것이다.

영화 <캡틴 아메리카 : 시빌워>의 초반에 아이언맨은 자신을 찾아온 한 사람을 만난다. 그 사람은 어벤저스가 악당을 물리치기 위해 벌인 소코비아 전투에서 희생된 시민의 어머니였다. 우리 곁에 정의를 실현하는 히어로가 있다면 박수를 치겠지만, 그 히어로가 악당을 물리칠 때 무고한 내 가족이 희생당한다면, 과연 히어로를 지지할 수 있을까. 어떤 문제의 옳고 그름을 명백하게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습관이 문제야

교실에서 생활하다 보면, 남다른 정의감을 지닌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 그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이 공공의 규칙을 어기는 걸 못 견뎌 한다. 바로 잘못을 지적하고 비난의 말을 쏟아낸다. 다른 친구를 비난한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틀린 말이 없다. ‘아무개가 모둠 활동을 열심히 안 했어요’, ‘아무개가 과제를 안 하고 다른 친구와 얘기했어요’, ‘선생님 말씀 안 듣고 복도에서 뛰었어요’. 그런 아이들은 지극히 당연한 가치들, 덕목들을 잘 준수하는 아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아이의 목적은 다른 데 있는 경우가 많다. 당연한 가치를 갖고 다른 이를 제압하는 칼처럼 휘두르는 것이다. 사람들이 볼 때, 음 실수군, 저 정도는 그냥 넘어가도 괜찮겠다고 하는 부분까지 지적을 하니까, 다툼이 잦다. 반 아이들은 그 애 앞에서 말과 행동을 조심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친구들은 남다른 정의감을 표출하는 아이를 좋아하지 않게 된다. 그 아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쟤 또 저러네?’ 하는 표정을 짓는다. 문제는 아이가 다른 아이의 잘못을 지적하는 데 있는 게 아니다. 다른 아이의 잘못을 지적하는 행동이 습관이 된 게 문제다. 그건 나쁜 습관이고, 다른 말로 ‘중독’이다.

우리를 더 나은 길로 이끈 ‘정당한 분노’가 분명히 존재한다. 나와 타인, 그리고 사회를 더 좋게 만들기 위해 드높이는 정의의 목소리가 우리 사회의 진보를 가능하게 했다. 반면에, 매사에 분노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문제, 저 문제 옮겨 다니며 분노를 소비하고, 분노를 표현하는 게 습관이 되기도 한다.

요즘은 사회 곳곳에서 일어난 많은 사건이 유튜브나 각종 SNS에 실시간으로 공유되곤 한다. 분노를 유발하는 사건들, 우리의 정의감을 자극하는 일들이 마치 먹잇감이 던져지듯 우리 앞에 던져지곤 한다. 조회수는 우리의 분노를 먹고 불어난다. 어쩌면 우리는 분노가 습관이 되기에 최적화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누군가의 분노에 동조 댓글을 달다가, 한 번쯤은 멈춰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가 내게 진짜 중요한 문제인지, 내 분노가 누굴 이롭게 할 수 있는지를. 성찰 없는 분노는 사회는커녕 아무도 바꾸지 못하고, 중독된 정의감은 우리에게 일시적인 쾌감만 주는 또 다른 놀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글쓴이

송광용 교사·에세이스트

송광용 에세이스트는 청주교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낮엔 초등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마다 카페에 앉아 글을 쓴다. 에세이, 소설, 동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저서로 산문집 <마음이 조금은 헐렁한 사람>이 있다. 밤의 카페테리아에서 만나 이야기를 건네듯, 소소하지만 울림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바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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