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실용적인가요?” 라고 물어온다면

[송광용의 밤마다 카페테라스] 소설은 가치, 상상력, 인권이기에...

이민진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된 드라마 '파친코'의 한 장면.
이민진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된 드라마 '파친코'의 한 장면.

애플 TV 플러스의 드라마 <파친코>의 첫 번째 시즌이 종영했다. 한인 이민자 4대를 그린 이 드라마에 전 세계인들이 열광했고, 나 역시 1900년에서 1989년을 오가는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파친코>를 본 서양인들은, 이런 감상평을 남기기도 했다. “이 드라마는 지난 몇 년 간 배운 한국과 일본의 역사보다 더 많은 것을 내게 가르쳐주었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왜 그렇게 껄끄러운지 이제 이해가 된다.” 많은 서양인들은 역사적인 지식만으로 공감할 수 없었던 한국인의 정서를, 이야기를 통해 공감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드라마는 한국계 1.5세인 미국 작가 이민진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되었다. 난 드라마 <파친코>와 그걸 본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이야기의 힘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이십대 시절에, 누군가에게 받았던 질문을 떠올리게 됐다. “소설이 실용적이라고 생각해?”

그 질문의 의도가 뭔지,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기억나진 않는다. 소설 좀 읽는다는 나를 골탕 먹이려던 것인지, 자신의 지식을 뽐내려던 것인지, 진짜 궁금해서인지 잘 모르겠다. 그 물음은, 소설이 지금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당장 우리가 집어들어 먹을 수 있는 빵이나 탈 수 있는 차보다 더 가치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내포하고 있었다.

소설을 그저 즐겁게 읽기만 했던 이십 대의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막연하게, 소설을 두고 실용성 운운하는 것 자체가 부당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도, “그건 질문 자체가 부당해!” 라고 답할 순 없었다. 그 순간엔, 실용성 측면에서 소설이 빵과 차보다 나은 점이 없어 보였다. 그 자리에서 대답하진 못하고 집에 가서 열심히 고민한 게, ‘그래, 소설은 실용적이진 않지. 하지만 다른 가치가 있어! 우리의 정서를 풍요롭게 해주잖아? 정신을 살찌우는 것이고.’ 라고 판에 박힌 결론을 내렸던 것 같다.

그가 다시 물어온다면, 소설은 그 어떤 것보다 ‘실용적’이라고 대답해줄 것이다. ‘실용적’이라는 말을 다른 뜻으로 정의하는 꼼수는 부리지 않을 것이다. “소설책을 냄비 받침으로 쓰거나 두꺼운 것은 목침으로 쓸 수도 있다는 뜻이야”와 같이 허무 개그로 마무리하지 않고도 소설의 실용성은 단언할 수 있다.

우리의 일상을 채워 온 상상력의 결과물들

소설이 실용적인 첫 번째 근거를 들어볼까? 전 인류가 은덕을 입은 눈에 보이는 성과들부터. 지금 우리가 누리는 많은 과학과 일상에서 쓰는 기술들은, 애초에 소설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원작을 영화화한 '아이, 로봇'의 한 장면. 1942년 아시모프는 이 소설에 ‘로봇 3원칙’을 명시한다. 이 ‘로봇 3원칙’은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 인공지능과 로봇의 윤리 기준을 마련할 때 기본 뼈대가 되었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원작을 영화화한 ‘아이, 로봇’의 한 장면. 1942년 아시모프는 이 소설에 ‘로봇 3원칙’을 명시한다. 이 ‘로봇 3원칙’은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 인공지능과 로봇의 윤리 기준을 마련할 때 기본 뼈대가 되었다.

처음 소설에서 등장한 ‘인공 장기’는 그 당시 사람들 중 몇몇은 과도한 상상력이라며 비웃었겠지만, 지금 현실이 되었다. 아폴로 달 착륙 몇 해 전에 나온 레이 브래드버리의 <시작의 끝>이라는 단편에는 달 착륙을 위해 셔틀에 탑승하는 사람의 묘사가 나온다. 우주를 여행할 수 있다는 명제도 SF소설에서 비롯되었고, 우주여행을 위해 수많은 과학적 연구와 발명이 쏟아졌는데 ‘네비게이션’은 대표적인 우주 연구의 성과 중 하나다. ‘로봇 공학’이라는 말은 지금 널리 통용되지만, 아이작 아시모프가 널리 퍼뜨린 말이다. 아시모프가 아니었다면, 현대 자동차 공장에서 줄지어 자동차를 조립하는 로봇들은 그 자리에 없을 거라는 얘기도 있다. ‘안드로이드’라는 말도 필립 딕의 소설에서 언급되었다. 최근까지 핫한 키워드인 ‘메타버스’라는 용어와 개념이, 1992년에 출판된 공상과학소설 <스노 크래쉬>에서 처음 등장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과학과 기술은 소설의 상상력에 기대어 발달해왔다. 물론 과학과 문학은 상상력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했다. 소설에서 처음 등장한 과학적 상상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직접 활용되고 있다. 아주, ‘실용적’으로.

소설의 실용성이 과학 분야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린 헌트는 <인권의 발명>이라는 책에서 현대적인 ‘인권’ 개념의 탄생은 소설의 시작과 맞물려 있다는 요지의 주장을 한다. 인권 개념이 탄생한 18세기엔, 권리의 평등이 자명한 것이 아니었다. 인권 개념의 정립은 사람들의 ‘공감’이라는 감각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그 공감의 감각은 현대적 개념의 ‘소설’이 탄생하면서 사람들에게 뿌리내렸다. <인권의 발명> 책의 첫 챕터의 소제목은 이것이다. ‘소설을 읽고 평등을 상상하다’

놀라운 말이지 않은가. 감히, 평등이란 걸 상상할 수 없는 시대에 인간이 평등할 수 있음을 상상했는데, 그것이 ‘소설’이라는 모판을 통해 길러진 것이라니. 우리가 누려온 ‘인권’. 나와 다른 인간들과의 공존을 위해 커다란 축으로 기능하는 그 인권의 개념만큼 실용적인 것이 또 있을까.

“새로운 독서는 새로운 개인적 경험(공감)을 창출했고 그것은 다시 새로운 사회적-정치적 관념(인권)을 낳았다.”-린 헌트, <인권의 발명>

린 헌트의 책 '인권의 발명'
린 헌트의 책 ‘인권의 발명’

이야기의 힘

소설은 인권뿐만 아니고, 역사의 선봉에 서서 수많은 사회적 통념을 깨부수어 왔다. 그런 점에서 소설은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인 면도 갖고 있지만, 그것이 품은 새로운 주제가 사회를 흔들고 변혁의 밑거름이 될 때는 지극히 ‘실용적’으로 작용해왔다.

소설이 인간의 ‘공감능력’을 발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18세기만의 일은 아니다. 지금도 픽션은 그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소설은 우리가 살아보지 않은 삶과 내가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야기를 통과하는 사람들은 그 이야기 속의 인물이 되는 경험을 한다. 직간접적인 체험은 공감의 연료다. 이를 통해 세계를 다른 각도에서 볼 용기와 동기를 얻는다. 이제 이런 단언도 과장된 건 아닐 것이다. “누군가의 인식을 바꾸고 싶다면, 이야기를 써라.”

역사 속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소설이 다분히 ‘실용적’이라는 걸 방증하는 예를 찾아 나열한다면 책 한권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소설의 실용성은 자기계발서나 직접적인 기술을 전하는 책보다 더 오래, 더 큰 파급력으로, 때로는 그것이 소설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르게 은밀히 발현되어 왔다.

끝끝내 냄비 받침 얘기를 꺼내지 않고 ‘소설의 실용성’을 역설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이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는 실용성 때문이 아니다. 아침마다 흠모하는 이를 보기 위해 버스 정류장을 향해 열심히 달렸더니 달리기 실력이 향상됐다는 이야기에서, 달린 동기는 ‘사랑’이지, 달리기 실력 향상이 아닌 것처럼 실용적 가치는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소설의 가치는 오히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희성(변요한)이 했다는 그 대사, “내 원체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그런 것들…” 의 맥락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실용적 가치를 쫓는 것과 반대로 무용해 보이는 걸 조명해주고, 작은 목소리에 마이크를 들이대는 매체라는 점이 소설을, 이야기를 가치 있게 만드는 게 아닐까. 그 때문에 우린 즐거움과 희망을 느끼는 것일 테고.

글쓴이

송광용 교사·에세이스트

송광용 에세이스트는 청주교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낮엔 초등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마다 카페에 앉아 글을 쓴다. 에세이, 소설, 동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저서로 산문집 <마음이 조금은 헐렁한 사람>이 있다. 밤의 카페테리아에서 만나 이야기를 건네듯, 소소하지만 울림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바람이 있다.

댓글

    함께 읽을 글

    칼럼 전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