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

[송광용의 밤마다 카페테라스] 누구나, 어디서나 복수심 자랄 수 있어 저항과 역전...복수의 순기능 있을 때도 우려하는 것은 통제불능의 복수 어떻게 복수심을 해소할 수 있을까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의 한 장면.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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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복수극’

최근 미국 에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 남녀주연상을 비롯해 8관왕을 차지한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은 한국계 감독과 배우의 작품으로 국내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성난 사람들>은 일이 잘 안 풀려 절망감을 느끼고 있는 한 남자와 삶이 불만족스러운 한 여자가 난폭 운전 사건에 엮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두 사람의 시비는 복수와 앙갚음으로 이어진다.

우린 오늘도 수많은 ‘복수’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다. 뉴스를 틀면,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피의 보복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다. ‘정치 보복’이라는 말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등장하는 용어가 되었다. 우리가 열광해 왔고, 또 열광할 준비가 된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들은 성공하거나 실패한 복수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의 일상은 또 어떤가. 우린 일상에서 자주 강렬한 복수 충동을 느낀다. 운전할 때, 직장 생활을 할 때,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도 우리는 기분이 상할 수 있고, 모멸감을 느낄 수 있다. 그때마다 상대방에게 복수하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영화 필름처럼 돌아간다. 이 정도면, 조금 과장해서 ‘복수심’은 공기 다음으로 많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새해에도 현실과 멀티미디어에서 ‘복수 이야기’는 넘쳐날 것이다. 우리는 복수 이야기를 좋아하면서도, 복수를 두려워한다. 우리 마음엔 복수심이 도사리고 있지만, 그걸 섣불리 드러내는 사람을 비판한다. 우린 왜 복수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을 갖게 되었을까. 복수 너머를 생각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 걸까.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의 한 장면.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의 한 장면.

무서운 복수

극단적인 복수는 필연적으로 비극적인 결말을 불러온다. 박찬욱 감독이 복수를 다룬 작품들은 모두 뛰어나다는 인정을 받았다. 그 중 <올드 보이>를 통해서 박찬욱 감독은 세계적인 감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올드 보이>도 역시 복수의 비극을 보여준다. 신형철 평론가는 <올드 보이>를 두고 이렇게 비평했다.

“누군가에게 복수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긴 세월을 버텨왔지만, 진정으로 복수해야 할 대상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이 복수극의 아이러니다.”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중에서.

우리 일이 잘못되었을 때, 큰 상심에 빠졌을 때 할 수 있는 나쁜 선택 중 하나는, 분노의 대상을 외부에서 설정하고 거기에 모든 화를 쏟아 붓는 것이다. <올드 보이>는 그런 맥락에서, 복수의 비극을 보여준다. 우리도 때때로 크고 작은 일에서 그런 류의 복수심을 갖는다.

<복수는 나의 것>의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복수의 이유를 갖고 서로 얽힌다. 복수는 다음 복수를 부르고, 누구 하나 복수 이후에 자신의 삶을 사는 이가 없다. 극단적인 복수의 끝엔 허무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많은 복수 이야기들은 애초에 실패하는 얘기로 구상된다.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를 잘 보여주는 게 목적이 되기도 한다. 우린 수많은 이야기를 통해서, 복수의 끝엔 비극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학습해왔다. 통쾌한 피의 복수를 끝낸 주인공의 결말을 우린 대체로 예감한다.

통제불능의 복수

또한, 우린 어릴 적부터 ‘사적 복수’는 나쁜 것이라는 교육을 받고 자란다. 아이가 공교육에 발 디디면서 선생님에게 처음으로 받는 중요한 교육 중 하나는 이것이다. “네 기분이 나쁘다고 다른 친구에게 폭력을 행사해선 안 돼.” 아이들은 복수심을, 폭력과 분노 표출 말고 다른 대안으로 해소하길 요구받는다.

심하게 상처 받은 사람은, 자신을 망가뜨리는 방식으로 복수하기도 한다. 그 사람은 스스로를 훼손하면서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너(너희) 때문이야!” 라고 외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 받은 어른이나, 아이가 이런 식의 복수를 감행하는 경우가 있다. 대개, 이 같은 형태의 복수도 끝이 좋지 못하다. 마음을 읽어주는 누군가가 극적으로 나타나기 전엔 자기 파괴 행위가 복구 불능의 상황까지 계속 진행되는 것이다.

복수에 부정적인 면만 있는 건 아니다. 스티븐 파인먼은 <복수의 심리학>이라는 책에서, 복수는 순기능도 있다고 얘기한다.

“복수는 해악으로 치부되지만 그렇다고 백해무익하다고도 할 수 없다. 복수는 사회적 부정을 노출시키고 바로잡는 순기능도 한다. 불평등한 억압 관계에서는 중요한 저항의 경로가 된다. 또한 특정 경쟁 상황에서는 보복이 오히려 칭찬받고 환호받기도 한다. 예컨대 비즈니스와 스포츠 세계에서는 패배자에게 반격을 권장하고, 예상을 뒤엎는 역전을 응원한다. 다만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통제 불능의 복수다.” -스티븐 파인먼, <복수의 심리학> 중에서.

적당한 선에서 멈출 수 있는 복수, 특정 분야에서의 복수심은 긍정적인 기능도 한다. 그렇지만, 사회 원리로 자리 잡은 사적 복수의 금지나, 극단적 복수의 비극을 보여주는 여러 작품들 및 학교에서의 교육을 통해, 우리는 ‘복수심’이란 밖으로 꺼내놓아서는 안 된다는 감각을 지니게 되었다. 금지되었기에 상상의 이야기를 통해 해소하려는 욕구는 더 강해졌다.

복수 너머

어디서나 복수심은 자랄 수 있다. 이것을 어떻게 정당한 방법으로 해소하느냐가 문제다. 복수가 파괴적일수록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정도가 커지기 때문이다. 현명한 주인공은 가해자의 목숨을 직접 끊지 않는다. 그게 자신에게 지속가능한 삶을 보장하는 방법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학교 폭력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성인이 되어 복수하는 내용의 <더 글로리>에서 피해자는 오래 계획하고 복수를 실행하여 가해자를 감옥에 보낸다. 많은 난관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국 주인공은 공권력의 심판에 가해자를 넘겨줌으로써, 자신의 파멸을 막았다. 이는 이야기의 공식에 가깝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한 장면.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한 장면.

세상엔 복수를 뛰어 넘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복수는 끝없이 이어지는 하나의 서클과 같다. 그 원 안에 있으면 복수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원 밖으로 뛰어나와서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는 이야기엔, ‘용서’와 ‘구원’이 있다. 어쩌면 성인(聖人)이나 할 수 있는 가장 하기 힘든 일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엔 그 어려운 일이 일어난다. 뉘우치는 가해자를 용서하고 스스로를 구원하는 이야기 말이다.

그래서 세상에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는 수많은 복수의 서클이 몇 개라도 없어지도록 ‘새해엔 좀 더 용서하자’라는 권고로 글을 맺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건 크게 실효성도 없고, 어떤 일의 피해자에게 용서하라고 쉽게 말하는 건, 폭력적인 일이 될 수도 있다. 우리 자신을 과대평가한 결론이기도 하고. 용서를 말할 때마다 우린 착각하곤 한다. 우리가 마치 용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처럼. 사실 우리는 용서하는 위치에 있는 경우보다, 용서를 구해야 하는 위치에 있을 때가 많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 주변에 돌아가고 있는 복수의 서클을 멈추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그게 나의 사죄가 아닌지 살펴야 한다. 작년에도 많은 사건 사고와 비극이 있었다. 그걸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엔 용서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보다, 용서를 빌지 않아서 생기는 슬픔이 더 크다고.

새해엔 다들, 용서를 구합시다.

글쓴이

송광용 교사·에세이스트

송광용 에세이스트는 청주교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낮엔 초등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마다 카페에 앉아 글을 쓴다. 에세이, 소설, 동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저서로 산문집 <마음이 조금은 헐렁한 사람>이 있다. 밤의 카페테리아에서 만나 이야기를 건네듯, 소소하지만 울림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바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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