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의 교감에서 탄생한 ‘전원교향곡’

[장 PD의 클래식 한담(閑談)] 베토벤이 ‘심신의 치유’ 바라는 간절함으로

5월 신록이 펼쳐진 전남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사진= 장옥님
5월 신록이 펼쳐진 전남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사진= 장옥님

5월, 신록의 숲길을 따라 걸으며 다시 생명의 기쁨으로 충만해진 자연을 대하니 절로 신께 감사하는 마음이 된다. 그리고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읽어봤을 이양하 선생의 ‘신록예찬’의 구절들도 떠오른다. ‘어린애의 웃음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5월의 하늘’로 시작하는 이 수필에서 선생은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신록을 바라보매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녹음을 스쳐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모든 것을 가져다 줄듯 하니 신록에는 사람의 마음에 참다운 기쁨과 위안을 주는 이상한 힘이 있으며, 마음의 모든 상극과 갈등을 극복하고 고양시키는 느낌까지 준다고 쓰셨다.

음악가 베토벤도 그랬다. 그의 작품 중에는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현실세계의 고통이 위로받고 치유되는 경험과 함께 자연에 대한 무한한 경배의 마음을 담은 곡이 있는데, 바로 <전원교향곡>이다. 베토벤은 20대 중반부터 청각에 이상이 생겼음을 감지했다. 그가 빈에 정착하여 음악가로서의 명성을 막 쌓을 무렵이었다. 큰 좌절감을 느꼈지만 주변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알릴 수가 없었다. 대신 가능한 사람들이 그의 난청을 눈치 채지 못하게 애쓰며, 번잡한 도시를 떠나 멀지않은 외곽의 하일리겐슈타트, 바덴, 뫼들링 등지로 자주 여행을 떠나 그곳에서 창작에 전념하곤 하였다.

이즈음 고향 본에 있는 친구에게는 이런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제 막 꽃피기 시작한 내 인생에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라는 한탄과 함께 ‘(만약 자네가) 나를 위해 시골에 집을 한 채 빌린다면 여섯 달 동안 농부로 살고 싶다네. 아마도 그러면 좀 나아지겠지’라며 전원생활을 갈망하기도 했다.

하일리겐슈타트의 베토벤 기념관 정원의 조형물. 나팔관 모양의 조형물엔 스피커가 달려 있어 베토벤의 음악을 들려준다. 사진=장옥님
하일리겐슈타트의 베토벤 기념관 정원의 조형물. 나팔관 모양의 조형물엔 스피커가 달려 있어 베토벤의 음악을 들려준다. 사진=장옥님
베토벤이 쓰던 피아노. 사진=장옥님
베토벤이 쓰던 피아노. 사진=장옥님

베토벤은 평생에 걸쳐 아홉 개의 교향곡을 완성했다. 3번‘영웅’부터의 교향곡들은 각각이 이 장르의 역사를 새롭게 썼다 할 만큼 혁신의 면모와 빛나는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1802년 저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편지)’를 쓸 무렵, 그는 점차 심해지는 난청과 갖가지 질병, 형제들과의 불화, 사회적 고립 등 심신의 큰 위기를 겪고 있었다. 그리하여 동생들에게 쓴 편지(사후에 발견되었고, 오랫동안 유서로 알려진 편지)에 극심한 자기연민과 동시에 인간적 고난을 딛고 결국엔 위대한 예술가(영웅)로 거듭나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토로하였다.

이렇게 마음을 다잡고 난 후, 그의 창작활동은 전성기를 맞아 1808년에는 교향곡 5번과 함께, 새로운 시도로서 표제가 있는 제6번(op.68)을 완성하였다. 모두 5악장으로 된 6번 교향곡에 ‘전원Pastorale’이라는 표제를 붙이고 각 악장에도 직접 표제를 붙였다.

제1악장 ‘전원에 도착했을 때의 유쾌한 기분’은 듣기에도 가볍고 즐거운 느낌의 주제 선율을 반복적인 음형으로 표현하면서 주제의 확산과 발전을 통해 자연의 무한함과 그 속에서 느끼는 평온함을 그렸다. 느린 템포의 2악장은 ‘시냇가의 풍경’이다. 시냇물의 잔잔한 흐름을 물결치는 음형과 함께 평화로운 주제 선율로 표현했다. 냇물은 굽이치며 흐르다가 더 넓어지고 깊어지듯, 음악도 점차 그 톤이 깊어지고 힘차진다. 악장의 끝부분에 이르면 주변 숲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 나이팅게일의 소리는 플루트로, 이어 오보에와 클라리넷이 각기 메추라기와 뻐꾸기의 울음소리를 실감나게 들려준다.

3악장 ‘농부들의 즐거운 모임’, 4악장 ‘폭풍우’, 5악장 ‘폭풍우 지난 후의 감사의 노래’ - 이 세 개 악장은 쉼 없이 이어지는데, 마치 전원을 거닐며 보고 듣는 여러 가지 체험을 하나의 극적 장면으로 펼쳐놓은 듯하다. 시골풍의 소박한 춤곡이 펼쳐지는 3악장에서는 농부들이 즐겁게 먹고 마시며 춤을 추는 흥겨운 분위기다. 그러나 흥겨운 음악은 갑자기 중단되고 4악장으로 이어진다. 폭풍우를 예견하듯 현 파트에서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는 양 하다가 먹구름이 밀려오듯 거친 소리로 변해간다. 이어 피콜로의 날카로운 고음은 번개가 번쩍임을 알리고, 팀파니의 연타와 함께 금관 파트 등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기가 천둥 치고 비바람 부는 폭풍우의 격렬함을 묘사한다. 이런 사나운 폭풍우가 지나가고 나면 5악장에서는 다시 찾은 평화로움에 농부들이 감사의 기도를 드리듯 목가적인 노래가 갖가지 형태로 변주되며 교향곡은 절정에 달한다.

유투브 동영상음악 ‘전원 교향곡’

음악이 자연을 모방하거나, 또는 다른 사물 등을 ‘묘사’하는 것은 중세 후기부터 르네상스를 거쳐 계속 있어 왔다. 그러나 베토벤의 관심을 끈 것은 사실적인 묘사에 집중한 작품보다는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사계>에서와 같이 음악적 묘사와 창조주의 찬양이 결합된 작품들이었다. 사실 그는 대부분의 표제음악에 대해 탐탁치 않아했다. 그럼에도 자신이 높은 수준의 음악구조와 독창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느끼는 한 이와 같은 시도는 해볼만하다고 생각했고, 이 표제가 들어간 ‘전원’을 작곡하면서 높은 예술적 기준을 만족시키고자 했다. 아울러 자신이 느끼는 자연의 기쁨과 창조주에 대한 경배를 표현하는 작품이어야 했다.

자신의 손을 통해 시냇물, 새, 폭풍우, 농부들의 춤 같은 전원(자연)의 소재들이 동료들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예술적 수준으로 승화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교향곡의 스케치에는 표제음악 작곡에 대해 몇 가지 지침이 될 만한 문구를 써놓았다. 그 가운데 이 작품을 관통하는 유명한 문구가 있다. “음화(音畵)가 아니라 감정의 표현에 가까운(More the expression of feeling than Tone-Painting)”인데, 이 교향곡이 단순히 전원의 풍경화 같은 표제음악이 아니라, 작곡가 자신이 자연 속에서 치유되길 바라는 간절함, 그리고 자연에서 좋은 것은 모두 신(神)의 현현(顯現)이라는 믿음을 담은 전언이리라.

오스트리아 빈 시내에 있는 베토벤 공원의 동상. 사진= 장옥님
오스트리아 빈 시내에 있는 베토벤 공원의 동상. 사진= 장옥님
글쓴이

장옥님 칼럼니스트

장옥님 칼럼니스트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음악(작곡)과 음악학을 전공하였음. KBS FM라디오에서 다수의 클래식음악 프로그램 및 콘서트, 대중음악프로그램을 제작하였음. 저서로는 <위기의 음악가들, 2021년>, <KBS월드뮤직, 2006년(共著)> 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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