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타이틀 3차례 실패...끝내 ‘날지 못한’ 정순현

[조영섭의 잊을수 없는 선수와 순간들] 단 한번의 대결로 ‘평범’에서 ‘유망주’로 석연찮은 판정, 세계 도전 잇따라 실패 8년간 끈질긴 도전...최고 문턱에서 좌절

세계 타이틀전에서 카르도나와 혈전을 펼치고 있는 정순현(오른쪽)
세계 타이틀전에서 카르도나와 혈전을 펼치고 있는 정순현(오른쪽)

지지난 주말 필자는 천안 유관순체육관에서 벌어진 한국 프로복싱 3대 타이틀전에 이 고장 출신으로 두차례 동양 챔피언에 등극했던 정순현 챔프와 동행했다. 경기를 본 후 만찬을 함께하며 많은 대화를 나눴다. 1952년 9월 30일 천안시 입장면에서 태어난 정순현은 마라토너 이봉주와 한동네 출신이었다. 이봉주도 중학교 시절 천안체육관 조성근 관장에게 복싱을 수학한 복서지망생이다. 1966년 천안 대광중에 입학한 정순현은 2학년 때부터 헨드볼 선수로 활약하면서 취미 삼아 천안체육관 최승철 관장에게 복싱을 배우기 시작했다.

평범한 선수로 보였던 정순현

이후 핸드볼을 접고 복싱에 몰입한 정순현은 천안농고 3학년에 재학 중인 1970년 5월 벌어진 제21회 전국학생선수권 대회 라이트 플라이급 결승에서 4연승(3KO)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한다. 결승전에서 원주 대성고의 이상덕과 치열한 타격전을 펼쳐 비록 근소한 차이로 패했지만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이듬해 인천체대에 특기생으로 진학한다. 결승에서 정순현을 이긴 이상덕은 1972년 뮌헨올림픽 밴텀급 결승에서 고생근에 패한 정상급 복서였다.

대학 졸업후 군에 입대한 정순현은 3년간의 공백기를 맞이한다. 1975년 7월 24살에 프로 데뷔전을 펼쳐 4회 판정승을 거두면서 험난한 프로세계에 뛰어들었다. 이어 3연승을 거둔 정순현은 그해 12월 국내 주니어(JR) 페더급 챔피언 최영철에 도전했지만 10회 판정패해 고배를 마신다. 최영철은 1975년 10월 당시 국내 챔프 염동균과 맞대결, 10회 무승부를 기록한 강자였다.

정순현은 프로데뷔 9전만에 동양타이틀에 도전했다. 1977년 4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벌어진 동양 주니어 페더급 타이틀전에서 챔피언 릭 퀴하노에 도전했지만, 또다시 판정패를 당한다. 그때까지 9전 7승 2패를 기록한 정순현은 단 한 차례의 KO승도 없는 평범한 복서였다. 이어 1977년 7월 청주에서 두번째 국내 주니어 페더급 타이틀전을 펼친다. 상대는 24전 22승(14KO) 2패를 기록하며 면도날 복서라 불리던 고생근이었다.

천안 유관순체육관에서 만난 정순현(왼쪽)과 아시안선수권에 우승한 고생근.
천안 유관순체육관에서 만난 정순현(왼쪽)과 아시안선수권에 우승한 고생근.

‘스타 복서’를 무너뜨리며

1951년 7월 6일 서울 출생의 고생근은 1969년 아시아 청소년대회 금메달을 획득, 그해 대한체육회에서 선정한 우수선수에 선정돼 주목을 받은 복서였다. 탄력을 받은 그는 1971년 아시아선수권 금메달을 땄고 1972년 뮌헨 올림픽에 출전해 8강에 오른 베테랑 복서였다. 아마추어 대회에서 손영찬, 서상영, 김영식, 김태호, 이거성, 백종우, 이상덕 등 역대급 복서들을 차례로 잡고 100승(11패)을 걷어 올린 복서였다. 1973년 7월 프로로 전향한 고생근은 1977년 1월 ‘불도저 박’에 4회 KO승을 거두고 국내 챔피언에 올랐다. 그런데서 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고생근은 만만한 정순현을 상대로 청주에서 2차 방어전을 벌인다.

반면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정순현도 결연한 의지로 결전을 대비했다. 단기필마(單騎匹馬)로 적진을 돌파한 화랑 관창처럼. 이 경기에서 6회에 고생근의 날카로운 스트레이트를 안면에 연거푸 허용, 유혈이 낭자한 상황에서도 반격을 시도했던 정순현은 마침내 전세를 역전시켰다. 7회부터 체력이 소진된 고생근의 페이스가 뚝 떨어지자 정순현은 주도권을 잡고 일방적으로 밀어부치기 시작했다. 급기야 9회에 고생근의 안면에 잇따라 터진 정순현의 연타에 고생근이 비틀거리면서 3차례 다운을 당한 뒤 자동 KO패 처리됐다. 최대의 이변을 연출한 단 한 경기로 돌풍을 일으킨 정순현은 일거(一擧)에 무명복서 딱지를 뗐다. 소위 잡견(雜犬)에서 진돗개로 레벨이 수직상승, 국내 복싱계가 주목하는 유망주로 급부상했다.

이날 경기를 치렀던 고생근은 훗날 필자에게 그날 경기의 소회를 밝힌 적이 있다. 그는 “경기 전날 코칭스태프와의 불화로 청주에 혈혈단신으로 도착했다”며 “연습 부족으로 당일 계체량에도 힘겹게 통과하는 등 최악의 상태에서 경기에 출전했다”고 털어놓았다. 필자는 고생근의 복싱트레이너이자 ‘라이온 산’이라 불렸던, 그리고 지난 4월 고인이 된 송배영 선배와 생전에 많은 대화를 나눈 관계였다. 그는 그대로 고생근과 호흡 맞추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고 압축해 소회를 밝힌 적이 있다. 당시 ‘스타 복서’ 반열에 있던 고생근은 개성이 강한 복서였다.

세계타이틀 도전에 나서기까지

두 선수는 그 당시 치른 경기로 극명한 발자취를 남긴다. 정순현에 패배를 당한 고생근은 1979년 4월 6경기(5승1무)를 치른 경험을 가진 조지 탐과의 경기를 끝으로 33전 29승(15KO) 1무 3패를 남기고 조용히 복싱을 접었다. 반면 데뷔 10전 만에 월척을 낚은 정순현은 당시 한화그룹 김종희 회장의 배려로 ‘빙그레 유업’에 취직해 매달 50 만원씩 급료를 받는 선수가 됐다. 훈련에만 전념할 수 있는 복서로 거듭났고, 이후 8연승(6KO)을 기록하는 등 쾌속 행진을 펼쳤다.

김학영과 1승 1패, 양홍수와 1승 3패를 기록한 동양 챔피언 출신의 다까다 지로, 홍수환과 대결에서 최후까지 밀리지 않고 타격전을 펼쳤던 다나까 후따로 라는 일본정상급 복서들을 상대했다. 정순현은 이들에게 속사포 같은 연타를 발사, 각각 2회 KO승을 기록하며 포효했다. 정순현은 1978년 1월에는 당시 44전 41승(14KO) 3패를 기록한 동양 페더급 챔피언 황복수와 라이벌전을 펼친다. 이 경기에서 정순현은 황복수를 상대로 3회 한차례 녹다운을 빼앗는 등 우세한 경기를 펼쳐 판정으로 승리하며 실력을 과시한다. 황복수는 어떤 선수였던가. 그는 동양 챔피언 김영식, 한국챔피언 최용호, 박춘하, 최영철, 김효성, 신운철 등 정상급 복서들을 모조리 잡아내며 국내를 평정한 페더급 1인자였다.

황복수와 라이벌전을 펼치고 있는 정순현(오른쪽)
황복수와 라이벌전을 펼치고 있는 정순현(오른쪽)

3개월뒤인 1978년 4월 정순현은 다시 동양 주니어 페더급 타이틀에 도전한다. 챔피언은 일전에 한차례 싸워서 패한 적이 있던 릭 퀴하노(필리핀)였다. 수양버들처럼 유연한데다 재빠른 몸놀림을 겸비한 까다로운 스타일의 퀴하노는 1976년 8월 부산에서 홍수환을 상대로 10회 무승부를 기록했던 강자였다. 홍수환은 당시 WBA 밴텀급 챔피언 알폰소 자모라와 재대결을 앞두고 있었는데, 전초전으로 그를 상대했었다.

반면 정순현은 퀴하노를 상대로 특유의 번개같은 유효타를 성공시키며 판정승을 거두고 마침내 동양 챔피언에 오른다. 이어 1978년 7월 22일 일본의 가사하라를 상대로 동양 타이틀 1차방어전 겸 세계 타이틀 전초전을 벌인다.

가사하라는 우리 기억에도 잊혀지지 않는 선수다. 1978년 2월 벌어진 WBA 주니어 페더급 챔피언인 홍수환의 1차방어전 상대였다. 가사하라는 홍수환과의 대결에서 5차례나 다운을 당하면서도 오뚜기처럼 일어나 끝까지 항전했던 끈질긴 복서였다. 정순현은 가사하라를 맞아 4회에 한차례 다운을 빼앗으며 주도권을 잡고, 5회에 맹공을 퍼부어 KO승을 거둔다. 동양타이틀 방어와 함께 세계 타이틀 도전자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끝내 열리지 않는 승리의 문

운명의 세계 타이틀전 상대는 1978년 11월 12일 WBA 주니어 페더급 챔피언 콜롬비아의 카르도나였다. 26전 19승(12KO) 1무 4패를 기록한 172cm의 장신인 카르도나는 견고한 디펜스에 죽창처럼 날카로운 잽을 주특기로, 1978년 5월 7일 두 체급을 석권한 홍수환의 타이틀에 도전해 12회 TKO승을 거두고 WBA 주니어 페더급 정상에 오른 복서였다.

이 경기에서 4회 선제 기습공격으로 팽팽한 균형을 깬 정순현은, 6회에 카르도나의 칼날처럼 예리한 잽에 왼쪽 눈언저리가 찢어져 유혈이 낭자한 가운데도 불타는 투지와 적극적인 강공으로 맞받아치면서 선전을 펼친다. 특히 9회에 결정적인 카운터를 터뜨리며 카르도나를 괴롭히는 등 후반부에도 주도권을 잡고 상대를 압박했다. 15회전 마지막 공 소리가 울렸을 때 누구나 정순현의 무난한 판정승을 예상할 정도였다. 하지만 케스팅 보트(Casting vote)를 쥔 미국 심판 마틴 덴킨이 카르도나에게 2점 우세 점수를 매기는 바람에 정순현은 정상 등극에 실패하고 만다. 이에 격분한 장충체육관내 관중들이 술병을 집어던지는 등 링 안팎에서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자 카르도나는 링 밑바닥으로 숨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7개월후 같은 장소에서 정순현은 카르도나와 복수전을 벌였지만 앞선 시합의 전철을 되풀이하면서 또다시 정상정복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WBA 회장국인 베네주엘라와 인접한 콜롬비아의 복싱협회가 경기전 WBA 멘도사 회장측에 치밀한 로비를 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한마디로 안타까운 경기의 연속이었다.

전열을 추스린 정순현은 1982년 2월 월리 루카스를 상대로 동양 타이틀에 도전, 12회 판정승을 거두며 두번째 동양 챔피언에 등극했다. 필리핀의 루카스는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 참가해 페더급 준결승에서 한국의 유종만에 판정패했던 복서였다.

정순현의 세번째 세계타이틀 도전은 1983년 3월 17일 열렸다. 상대는 WBA 주니어 페더급 챔피언 레오 크루즈(푸에르토리코)였다. 32세의 노장이 된 정순현은 최선을 다했지만 8회 생애 첫 다운을 당하며 아쉽게 판정패했고, 그 이후 복싱을 접는다. 통산 34전 28승(17KO) 6패를 기록하며 8년간 정들었던 링과 작별한 정순현은 패전을 기록한 6패가 전부 타이틀이 걸린 경기였다. 은퇴한 정순현은 1978년 매입한 잠실5단지 APT에 살면서 천호동과 안산 등지를 무대로 사업가로 변신했다. 사업이 일취월장으로 성공하자 그는 고향인 천안에 낙향, 건설업을 운영하면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

레오 크루즈 챔피언과 세계타이틀전을 벌이는 정순현(오른쪽)
레오 크루즈 챔피언과 세계타이틀전을 벌이는 정순현(오른쪽)

지지난주 만났던 정순현은 조만간 서울에 올라와 중학 동창인 개그맨 김학래씨가 운영하는 ‘린찐’이란 식당에서 필자와 함께 식사하자고 말로 작별 인사를 나눴다. 3차례나 세계정상에 도전하며 힘차게 비상(飛上)했지만 더이상 높이 날지 못한 ‘비운의 작은 새’ 정순현. 인생 3막을 활기차게 펼치고 있는 그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글쓴이

조영섭 문성길복싱클럼 관장

조영섭 복싱전문기자는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80년 복싱에 입문했다. 그 전에는 5년동안 야구선수 생활을 했는데, 전국 초등학교 야구 선수권대회에서 조계현, 백인호 등 동료들과 우승한 경력도 있다. 1983년 복싱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 상비군을 거쳤으며 1989년 지도자로 변신했다. 용산공고, 서울체고를 거쳐 천안 충의소년원 청주 공군사관학교에서 복싱강사로 활약했으며 지금은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복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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