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의 아이콘을 소개합니다
[송광용의 밤마다 카페테라스] 조선 역사 최고의 파격은 ‘연암 박지원’ 부모찬스 걷어차고, 실제적 삶을 추구해 특권 누렸다면 지금 우리가 그를 기억할까
사회 지도층 자제의 부모 찬스를 통한 스펙 쌓기 뉴스는 이제 새로운 뉴스거리도 아니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처럼 잊을 만하면 들려온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4월 말에 진행되었던 새 정부의 장관 후보자 인사 청문회에서도 어김없이 그 의혹은 일었고, 주요한 검증 거리가 되었다. 부모 찬스, 특권 등의 키워드가 뉴스에 오르내릴 때마다 난 오히려 그 반대편에 섰던 한 사람이 떠오르곤 한다.
그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을 활용하지 않았다. 그럴 기회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만약 그랬다면, 실력도 있고 가문의 후광도 있었던 그는 날개를 달고 감히 짐작할 수 없는 곳까지 날아올랐을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비현실적인 인물이라고?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는 역사 속에서 실제로 존재한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가 익히 아는 인물, 연암 박지원이다.
난 예전 역사책을 통해 배운 업적 몇 가지가 그를 나타내는 전부라고 알고 있다가, 그의 삶에 대해 처음 소상히 알게 된 때의 충격을 아직 잊지 못한다. 이런 인물이 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이런 캐릭터가 우리나라에 실제로 존재했었다니! 그래서 꼭 한 번 소개하고 싶었다.
‘파격’이라는 말이 누구보다 어울리는 인물, 연암 박지원
연암 박지원은 한양의 이름 높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글 솜씨가 좋았다. 조선은 알다시피 문(文)을 숭상하던 나라였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날개를 가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얼마나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지,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그와 가까워지려고 애썼다. 그의 특별한 글재주는 왕과 고위 벼슬아치에게도 알려졌다. 그들은 언젠가 박지원도 벼슬을 얻어 함께 할 날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박지원은 출세에 별 관심이 없었다. 집안 어른의 성화에 서른세 살에 처음 과거시험을 보았고 1차 시험에 1등을 했다. 영조 임금이 그를 불러 직접 격려하기까지 했지만, 두 번째 시험에서 백지를 내고 나왔다고 한다. 영조 임금이 다시 한 번 기회를 줬는데, 이번엔 종이에 그림을 그려 냈다고 한다. 그는 후에 과거를 다시 보긴 했지만 낙방한 후 과거 시험은 접고 학문 연구에 매진했다. 그의 학식과 문장력으로 인해 정조 시절에 수없이 관직에 추천됐지만, 번번이 사양하다가 나이 50세가 돼서야 처음 관직에 올랐다고 한다.
그 당시 많은 이들이 정형화된 옛글을 흉내 내며 글을 쓰는 걸 훌륭함의 기준으로 삼고 있었지만, 박지원은 그런 글쓰기를 하지 않았다. 정조 시절, 젊은 문인들이 박지원의 문체를 본으로 삼기 시작하자, 정조 임금은 훗날 ‘문체 반정’으로 명명된 순정한 고문의 문풍을 회복하고자 한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정조는 박지원이 옛글을 따르지 않고, 가벼운 문체로 글을 어지럽힌다하여 벌을 내렸다. 조선 최고의 개혁 군주인 정조 임금도 박지원 앞에선 고루한 권력자가 되어 버렸다. 그나마 정조 임금의 벌은 ‘반성문 쓰기’여서 우리의 평가를 아주 무색케 하진 않는다.
높은 벼슬이나 풍족한 생활을 추구하지 않았던 박지원이 관심을 가진 것들은 따로 있었다. 그는 학문적으로도 높은 성취를 이루었지만, 세상 사람들이 칭송하지 않는 것들도 연구하고 글로 썼다. 그의 관심은 실제적인 삶에 있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천민에게도 말을 걸고 의견을 들었다. 양반들은 그런 박지원을 헐뜯었다. 박지원과 그의 친구들은 실생활을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지에 골몰했다. 오늘날 우리들은 그들의 공부와 학문을 ‘실학’이라고 부른다.
그의 친구들은 대부분 별 주목 받지 못하는 서얼 출신이었다. 박지원은 이런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었다. 신분이 낮아 조선 사회에서 무시당했던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의 글은 청나라까지 전해져 명성이 자자했다. 정철조는 다양한 기계와 기구를 발명한 사람이었으며 홍대용은 과학과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학자였다.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잔치에 사신단으로 참가하는 8촌형을 따라 사신단의 말단 직책으로 꼽사리 낀 박지원은 청나라로 긴 여행을 떠났다. 박지원은 조선으로 돌아와 청나라에서 보고 익힌 새로운 지식들을 책으로 써내는데, 이 책이 바로 ‘열하일기’다. 당시 열하일기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젊은이들 사이에 폭발적인 반응이 나오자, 문체와 풍조를 어지럽힌다고 하여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다. 열하일기엔 비속어가 많이 들어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박지원은 그 당시 청을 오랑캐라 하여 배격하는 무리를 한심하게 여겨 비판을 가했다. 그들보다 생활이 앞서지도 못하면서 북벌만 주장한다고 했다. 그들을 앞서려면 먼저 그들의 좋은 점을 배워야 하지 않겠냐고 한다. 이것이 박지원의 ‘북학론’이다.
그 당시 놀고먹으면서도 풍족하게 지내던 양반의 위선과 허세를 양반전, 허생전과 같은 풍자소설을 통해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열하일기와 같은 기행문도 썼지만, 농업 기술에 관한 책도 썼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자면, ‘팔색조’다. 뛰어난 문인이기도 하고, 시대를 앞서간 이론가이기도 하며, 자신의 지식을 삶에서 적용하려 애쓰는 실천가이기도 했다. 그가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을 누리며 만들어진 길을 갔다면 큰 권세를 누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랬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역사책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를 생각하면 묘한 자극을 받는다. 안주하고 답습하고 기존의 것을 따라가기 급급한 내 모습을 반추하게 된다. 지금은 그에 대해 실학자, 혹은 <열하일기>의 저자 정도의 평범한 수식어가 따라 붙지만, 그 당시에 그는 시대를 앞서 갔고 기득권층에겐 눈에 가시였고 당대의 분위기로선 파격 그 자체였다. 실학자, 작가 정도의 짧은 수식어만으론 그가 보여준 삶의 무게를 다 전하지 못할 것이다.
삶에서 뭔가를 이루겠다고 한다면, 작은 부분 하나라도 기존의 것들과는 다른, ‘파격’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박지원을 떠올리며, 개인적으론 내게 필요한 ‘파격’ 한 조각은 무엇인지를 생각해본다. 그리고 소망해본다. 이제 당연한 게 된 것처럼 보이는 부모 찬스를 찢고 나온 제2의 박지원이, 사회에 신선한 파격을 던지며 사회 지도층의 멋짐이란 이런 것임을 보여줄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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