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우에 빠졌던 조선...되돌아보는 이유
[최성호의 사람 사는 건축] ‘관우의 딸’ 자처한 무녀 진령군 ‘비선’으로 인사전횡...망국을 재촉 윤정부, 천공스님 등 인사개입 막아야
‘중국의 신’이 ‘조선의 신’으로
서울 동대문 근처에 있는 동묘(東廟) 보물 제 142호는 관우를 모신 관왕묘(關王廟)다. 서울에는 동·서·남·북에 관왕묘가 있었는데 동묘 외의 관왕묘를 남묘, 북묘, 서묘로 불렀다. 제일 먼저 세워진 것은 남묘로 1598년(선조 31년)의 일이다, 3년 뒤인 1601년(선조 34년)에는 동묘가 세워졌다. 북묘는 한참뒤인 1883년(고종 20년)에, 서묘는 1904년(고종 41년)에 들어섰다.
관우는 임진란 전까지만해도 조선에서 신이 아니었다. 반면 중국에서는 매우 중요한 예배대상이다. 박지원은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관제묘(關帝廟)는 천하에 어디든지 비록 궁촌벽지라도 사람 몇 호만 사는 데는 반드시 사치한 묘우를 떠받들어 지어놓고 있다”고 했다. 도교에서 관우는 ‘전쟁의 신’인 관성제군(關聖帝君)이라 불린다.
우리나라에 관우신앙이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를 통해서다. 명나라 장수들에게 절대적인 신이었던 관우신앙은 장수들이 조선에 동관왕묘를 짓기를 명나라 황제인 신종(神宗)에게 주청하는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그들은 신종에게 “전투가 있는 날이면 번번이 관왕의 신이 나타났다”고 하면서 “평양전투, 한산도해전, 충청, 전라, 경상도 전투에서도 이적을 드러냈다”고 했다.(고전번역원/성소부부고 제16권/ 문부 13)
이런 정도니 자신들이 주둔하는 곳에 관왕묘를 세우는 게 당연했다. 나중에 남묘(南廟) 불리게 된 것은 명나라 장수 진인(陣寅)이 전쟁 중 얻은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서울에 머무는 동안 숭례문 밖 산기슭에 관우를 모시는 묘당으로 세웠던 것이다. 처음에는 진인이 시작했지만 명 장수들의 참여가 늘어나면서 규모가 커졌다. 남묘에는 진인 요청으로 조선 기술자들도 투입됐다.(고전번역원/서애집 제 16권 잡저, 실록 실록 선조 31년 4월 25일)
동묘는 명으로 돌아간 명나라 장수들이 황제에게 조선에 관왕묘를 짓도록 주청하고 이에 명 황제 신종(神宗)이 금 4000냥을 보낸 것에서 시작한다. 동묘를 짓는 과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먼저 위치 문제로 명과 갈등이 있었다. 관왕에 대한 신앙이 없었던 조선이기에 조선 왕의 의전문제로도 갈등도 있었다. 무엇보다 신종이 보낸 돈은 공사비를 조달하기에 부족했다. 가뜩이나 전란후 어려운 때에 공사를 시작한 탓에 2년이나 걸려 공사가 끝났다. 관우신앙이 없었고 관리마저 허술해, 명이 완전히 철군한 후로 관우묘는 중국 사신이 올 때만 챙길 정도로 방치됐다.
왕권 강화의 방편이 된 관왕묘
조선이 관왕묘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숙종 때다. 숙종은 기사환국 직후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에 군인들의 충성심이 필요했고, 문신들에게도 충성심을 요구했다. 숙종을 이를 투영할 대상으로 관우를 찾아낸 것이다. 숙종 17년, 왕은 “무안왕(武安王) 관우존호의 충의(忠義)는 참으로 천고(千古)에 드문 것”이라고 하면서 “어제 관왕묘에 들러 관우상을 본 것은 관우와 교감하기 위한 것이고 또한 무사(武士)를 격려하기 위한 것이지, 유람하러 간 것이 아니다”고 했다. 그리고 “이 뜻을 알아 장사(將士)들은 충의에 힘써 왕실(王室)을 지키도록 하라”고 했다. 이때 동묘와 남묘, 두 관왕묘에서 파손된 곳을 고치고 제사를 올리도록 했다.(실록 숙종 17년 2월 7일)

영조는 숙종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심히 관왕묘를 찾았다. 초기 불안했던 왕실의상황을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영조 역시 신하들에게 관우의 충성심과 의리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관왕묘가 세워진 이후 제일 많이 찾았던 왕이다. 실록 기록을 살펴 보면 영조는 30회 이상 동관왕묘 또는 남관왕묘를 찾았다. 무엇보다 영조는 곤룡포와 익선관을 갖추고 정식으로 재배례를 했다는 점이 남달랐다. 이전 왕은 그렇게까진 하지 않았다.(영조 22년 8월 28일)
정조와 그 이후의 왕들은 이전 왕의 횟수를 따르는 정도로만 관왕묘를 찾았지만, 눈여겨 볼 점은 정조가 관왕묘 제사를 오례의(五禮儀)의 중사(中祀)에 포함시켰다는 것이다. 즉 나라에서 치르는 제사로 종묘나 사직 다음의 위상에 관왕묘 제사를 포함시켰다. 공자에게 제사를 드리는 석전(釋奠)이 중사니 위상이 매우 높아진 것이다. 숙종과 영조를 거치면서 관왕묘의 위상이 높아진 것이다.
관우가 외세를 막아주길?
이후 관왕묘에 적극적인 관심이 모아진 때는 고종 때다. 이 시절에 이르러 관우신앙은 단순히 왕실 의례의 차원을 넘어서 민간으로 확산됐다. 1880년(고종 17년)에 고종이 중국의 관우신앙 관련 경전을 모아 국문으로 번역케 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런 관우신앙 확산이 북묘를 세운 배경이다.
관우신앙의 확산은 당시 대외 정치상황과도 무관치 않았다. 고종 초부터 우리나라는 외세침략에 휘둘렸다. 1866년(고종 3년)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략한 병인양요, 1871년 (고종 8년) 미국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한 신미양요, 그리고 1876년(고종 13년)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강화도조약까지 빈번하게 외세에 휘둘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관왕묘에 대한 집착을 높였다. 실록을 보면 정확히 언제 지었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고종 때 중요한 고을에 관왕묘를 지었다는 글이 나오는데, 전주, 개성, 관서 등에 관왕묘를 신축했던 것으로 보인다. 관서는 아마도 평양일 것이다. 관우가 외세를 눌러 줄 것이라 기대했는지, 고종은 관우신앙에 많이 집착했다.
이후 북관왕묘는 명성황후의 명으로 1883년(고종 20년)에 세워졌고, 서관왕묘가 엄비(영친왕의 친모)의 명으로 1904년(고종 41년)에 지어졌다. 북관왕묘는 1882년 임오군란으로 피신했던 명성황후에게 환궁 시기를 정확히 알려줘 신임을 얻은 무녀의 건의로 세워졌다. 무녀는 자신을 ‘관성제군의 딸’임을 자처하면서 관왕묘를 세울 것을 건의했다고 한다. 이 공로로 무녀는 진령군(眞靈君)으로 봉해진다.(조선 후기 관우신앙 연구/ 13쪽)
서관왕묘는 숭의묘(崇義廟)로 불리기도 했다. 숭의묘로 불린 것은, 다른 관왕묘와는 달리 유비를 주신으로 하여 관우, 장비, 공명, 조운, 공명, 마초, 황충, 주창 등을 배향했기 때문이다. 고종이 “세 사람의 결의가 천년 변치 않을 큰 의리여서 짐(朕)이 흠모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당을 새로 세웠다”고 했다. 하지만 서관왕묘를 지은 중심인물은 영친왕의 친모 엄비(嚴妃)다. 엄비가 중전(명성황후)이 세운 북묘에 대항하기 위해, 후에 현영군(賢靈君)으로 봉해진 윤성녀의 건의를 받아 지은 것이다. 외세는 몰려오는데, 관우묘당 짓기에만 몰입하는 조선말기 왕실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08년에 북묘가, 1909년에 서묘가 각각 동묘에 합사되면서 사라졌고, 한국전쟁 때 소실된 남묘를 1957년 재건했고, 1978년 사당동 현재 위치로 이건했다. 현재 모습은 고종때 중건된 관왕묘와도 다르다.

‘관우의 딸’ 자처한 무녀, 지금은 없나
얼마 전 황궁우, 덕수궁, 러시아공사관을 답사했다. 우리에게는 정말 가슴 아픈 역사를 되새김하는 발걸음이었다. 답사하는 동안 고종, 명성황후, 무녀 진령군간 관계가 어떠했을지 떠올렸고, 지금은 그때와 어떻게 다른지 가늠했다. 심심찮게 들려오는 천공스님 얘기 탓이다. 윤석열 대통령, 김건희여사와 천공과의 관계를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러시아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 황후인 알렉산드라와 라스푸친 관계와 비슷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고종과 명성황후 그리고 무녀 진영군의 관계와 비교하는 이들도 있다.
공통점은 종교를 매개로 한 비선세력이 정치를 좌지우지한 것이 국가 존망에 영향을 줬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새기는 것은 혹시 지금도 그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관왕묘를 공부하면서 찾은 실록과 기타 자료를 보면 무녀 진령군의 정치개입이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진령군을 처벌하라는 상소도 있었다. 1894년(고종 31년) 7월 5일 실록을 보면 상소문은 “신령의 힘을 빙자하여 임금을 현혹시키고 기도한다는 구실로 재물을 축내며 요직을 차지하고 농간을 부린 요사스러운 계집 진령군에 대하여 온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살점을 씹어 먹으려고 합니다”라고 극언을 할 정도다.
조선말 선비인 김택영 선생이 쓴 소호당 문집에서는 진령군에 대해 “그녀가 말하는 것은 들어주지 않는 것이 없으니 내외 관직의 제수(벼슬을 내림)도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많았다. 그래서 사대부들중 간사하고 우둔한 자들은 분분히 좇아서 심지어는 어머니니 누님이니 하고 부르는 자들까지 있게 되니...”라고 씌여 있다. 무당이었던 진령군이 매관매직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인사에 개입했다는 것은 조선말 중인인 지규식이 쓴 하재일기에도 나온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정원경(鄭元京)이 내방하여 말하기를, 양근읍에 우거하는 김 낭자는 진령군과 친분이 있다. 지금 이 여인을 거간으로 하여 충청·전라·경상 3도 대동미 화륜선(火輪船)의 도선주(都船主) 임명받는 일을 청탁하려고 전인하여 불러왔다.”(하재일기 1893년 10월 27일)
지금은 대통령실의 인사가 연일 구설수에 오른다. 이것이 구한말 진령군이 하던 상황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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