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개항부터 일제강점기까지...식민도시 인천
[최성호의 사람 사는 건축] 인천은 어떻게 성장·발전했을까 개항, 갑문도크, 경인선이 계기 일제, 병참기지로...근로자들 몰려 2편에선 인천의 근대건축물 소개
건축가로서 새삼 인천을 돌아봤다. 개항장으로 지정되기 전 조선시대의 인천은 한적하다 못해 적막했던 10여 호 남짓한 시골의 자그마한 어촌이었다. 개항 후 조계지로 지정된 후 반세기 만에 인구 20만의 대도시가 됐다. 해방 이후는 일제강점기 때 도시 골격을 바탕으로 인구 300만의 거대도시로 변모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성장 이면을 들여다보면 철저하게 식민도시였음을 알게 된다.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뉘고 식민민중에의 착취와 차별로 규모를 키운 도시였다. 인천은 일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도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당연한 것이겠지만 조선인은 일본인을 위해 복무하는 존재였을 뿐이다.
인천은 1883년 조계지로 지정되면서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99년 9월 18일 경인선이 개통되고, 1918년 아시아 최초의 갑문식 도크가 갖춰지면서 급속하게 발전한다.
그에 앞서 1876년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이하 강화도조약)에 의해 인천은 개항을 하게 된다. 강화도조약 제5관에서 “경기京畿, 충청忠淸, 전라全羅, 경상慶尙, 함경咸鏡 5도道 가운데 연해의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 두 곳을 골라 조계지로 지정”하기로 했다. 원산은 1880년 지정됐고 인천은 3년 뒤인 1883년에 지정됐다. 이는 서울과 가까운 곳에 교두보를 마련하려는 일본과 이를 저지하려는 조선정부와의 줄다리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줄다리기에서 조선은 일본을 이기지 못했다. 결국 인천을 개항장으로 지정하고 1883년 9월 일본과 <인천구조계약서仁川口租界約書>를 맺으면서 인천에 전관조계가 설치됐다. 그 후 1884년 일본은 청, 영국, 미국등과 각국조계장정을 체결하자 조계지가 확정됐다. 독일은 1년 뒤인 1895년에 참여했다. 조계지(租界地)란 말은 중국에서 시작됐다. 청이 서구 열강과의 전쟁에서 진 후 여러 곳을 조계지로 할양한다. 조계지와 조차지(租借地)의 차이는 치외법권 지역인가 아닌가의 차이다. 조계지가 설정됐다는 것은 치외법권지역이 된다는 뜻이다.

당시 각국은 현재 인천 중구청과 차이나타운 지역을 조계지로 지정하고 각국의 영역을 분할했다. 일본이 가장 많이 할양받아 현 중구청(구 인천부/일본영사관) 주변을 조계지로 했고, 청이 현 차이나타운 지역을 조계지로 배당받았고 기타는 공동조계로 삼았다. 사실상 제물포 조계지는 일본 조계지라 할 정도로 가장 넓은 지역이 조계지로 할양됐다. 조계지로 결정된 후 인천의 확장은 경인선, 간척, 갑문도크 등의 단어에 의미가 함축됐다.
인천의 확장
아래 세 사진이 인천 확장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경인선 철도가 완공됐을 때 인천역 바로 앞은 바다였다. 그리고 개항 25주년 기념엽서에 나온, 1883년 사진을 보면 개항 때의 인천은 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앞까지 갯벌이었다. 현 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에서 선광미술관 앞까지 이르는 도로 밖은 갯벌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05년 현조계지 경계계단에서 찍은 당시 사진을 보면 1893년에는 우선주식회사 바로 앞이 갯벌이었는데 현 제물량로 바로 앞까지 경계가 확장된 것이 보인다. 이처럼 인천은 조금씩 간척을 통해 조금씩 확장되어갔다.



초기 개항장인 인천, 부산, 원산 중 인천은 1890년까지 수출입세가 부산, 원산보다 훨씬 많았던 항구였다. 그러나 경부선의 완공과 새로 개항장이 만들어지면서 인천은 확장에 최대 위기를 맞이했다. 인천은 1905년 경부선이 부설되자 부산에 뒤처지기 시작했다. 일본에 가까운 부산으로 수출입 물동량이 대폭 늘어난 탓이다. 경부선(1905년)과 경의선(1906년)이 각각 완공되고 군산항이 독자적인 운영에 들어가자, 인천은 발전을 위한 요소 모두를 빼앗긴 것과 다름없다는 위기감에 빠졌다. 이때 인천에 있던 본점을 경성으로 이전하는 회사가 늘어났다.
이런 위기를 넘기고 인천이 중요한 항구로 남아있을 수 있었던 계기는 ‘동양 최대’ 갑문도크의 완성이었다. 인천항 확장문제는 러일전쟁 후에 제기됐다. 이후 1908년 인천축항기성회를 결성하여 항구 확장문제를 제기했고, 한일합방 이후인 1911년 총독부 예산이 확보되면서 그 해 6월 공사가 시작될 수 있었다. 갑문식 도크는 1918년 완공됐고, 주변공사는 1923년 완료됐다.
이때 축항공사는 조수간만차를 극복하기 위해 2중 갑문식도크로 했는데 당시로는 동양에서 처음 시도된 공법이었다. 메인 도크는 길이 455m, 폭 218m로 4천5백 톤 급 선박 3대가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규모였다. 이때 약 8만 6천평 정도의 매립도 이뤄져 인천항의 규모가 완전히 달라졌다. 축항이후 인천은 무역량 증가로 부산 다음으로 수출입액을 이뤘다. 수입액으로는 인천이 1위를 차지했다.
대륙침략을 노골화하던 일제는 1937년 군수산업을 인천에 배치시키는데, 이를 계기로 인천은 다시한번 확장한다. 당시 일제는 인천의 도시 구조를 형성한 ‘인천시가지계획구역결정이유서’를 수립하고 본격적으로 인천도시계획을 짰고, 인천일대를 병참기지화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부터 1940년 사이 병참관련 공장과 그와 연계된 철강, 화학공장이 지금 백운역과 부평역 사이에 건설됐다. 부평의 미군기지였던 Camp Market은 일본군 조병창과 군수공장이 있었던 곳이다. 그리고 이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의 거주지를 현재의 부평동아아파트와 북인천우체국사이, 부평 산곡초등학교 주변에 조성했다.
이런 인천 확장에는 경인선 철도도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경인선이 인천의 ‘발전방향’을 결정한 것이다. 도로나 철도는 도시 발전의 방향을 결정한다. 경의선의 문산과 신의주, 경부선의 대전은 철도부설로 새롭게 발전한 도시다. 과거 부평도 도호부와 마을이 계양산 쪽에 있는 부평초등학교에 있었다. 그러나 철도부설로 부평역 부근으로 중심지가 이동했다. 이처럼 경인철도는 인천발전 방향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식민도시로서의 인천
아래 1895년 조계지 도면을 보면 식민도시로서의 인천을 이해할 수 있다. 인천은 조계지와 조계지 외로 나뉜다. 북쪽으로는 자유공원에서 홍예문까지, 동쪽으로는 현 신광미술관 앞 신포로를 경계로 안쪽은 조계지로 외국인 전용구역이었고 그 밖은 조선인의 거주지였다. 지도에서도 NATIVE TOWN으로 나오는 것처럼 조선인은 주변부에 위치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조계지는 치외법권지역이다. 조선의 법이 적용되지 않는 구역이니 조선인에 대한 차별은 당연한 것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제물포는 조선이 어쩔 수 없이 내준 곳이니 더욱 더 그랬을 것이다.
인천은 개항장으로 쌀 수출이 많았다. 개항장에 짐을 나르는 사람, 지게꾼 등 부두노동자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정미사업에 종사하는 정미노동자 그리고 급격한 도시 팽창으로 항만축조나 건설노동자들의 수요가 많았을 것이다. 이런 노동자 대부분 조선인으로 채워졌을 것이다. 일용직... 지금도 힘든 삶이다. 그러니 식민지인으로의 삶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1908년에 뚫린 홍예문은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으로 막혔던 인천의 남북을 이어줘 인천의 확장성을 높였기 때문에 인천 근대화의 상징이다. 경인선이 개통된 이후 인천역은 화물 위주의 역이었고 동인천역은 여객이 편중된 역이었다. 그래서 동인천역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인천부청(현 중구청) 쪽으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홍예문이 건설됐다고 했다. 그러나 필자는 홍예문이 동인천역 북쪽인 현 화평동, 송현동, 송림동 등에 거주하고 있었던 조선인을 조계지나 항만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도로가 지나는 문이라고 본다.
항구 확장이후 일본인 수는 변화가 없었지만 조선인은 급격하게 증가했다. 1905년 1만 866명이던 조선인은 1915년 1만 8185명이 됐고, 갑문도크가 완성된 1918년 이후 급격히 늘어나 1920년에는 2만 3855명, 1925년에는 3만 9993명, 1930년에는 5만 1005명이, 그리고 1942년에는 17만 614명이 된다. 이들 대부분은 노동자였을 것이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부평지역에 병참공장이 집중적으로 세워지면서 많이 늘어났을 것이다.
이에 반해 일본인은 1905년을 기점으로 1930년까지는 1만천명 정도에서 큰 변화가 없었다. 1930년대 통계는 없으나 1942년 2만 320명으로 대폭 늘어난 것이 확인된다. 이것은 부평지역 조병창 건설로 일본인 직원이 늘어난 것과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공습을 피해 한국으로 온 일본인들 때문일 것이다. 이들 주거지의 변화는 거의 없었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지역의 국적별 인구분포를 보면 일본인과 중국인은 최초 조계지를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20만명으로 늘어난 인천인구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조선인은 경인선을 따라 그리고 신포동 너머 신흥동 쪽으로 주거지를 확장시켜갔다. 이때도 주변부였다.

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1942년에 인천인구 20만 중 85%인 17만 명이 조선인이다. 일본인은 10%인 2만 명, 중국인이 2천 명, 기타 외국인은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1908년 인천 거주 조선인이 일본인 숫자를 막 상회하기 시작하던 때 자료를 보면 조선인의 41%가 지게꾼, 하역 노동자 등 일용직이었다. 이후 20년 만에 조선인은 15만이 늘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공장노동자나 현장일꾼, 하역노동자였을 것이다. 삶이 나아진 것이 없었다.
1927년 인천상업회의소 회비 징수 상황을 보면 일본인 3만 6351엔이었는데, 조선인은 4125엔이었다. 그때 일본인 회원이 306명, 조선인 회원이 127명이었다. 일본인 1인당 평균 119엔이었고, 조선인 1인당 평균 32엔이다. 조선인 사업규모는 일본인의 1/4정도 밖에 안됐다. 1927년 2월 2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인천에서 영업세 10엔 이상 납세한 사람이 일본인은 371명이고 조선인은 120명이었다. 이때 일본인은 1만 명 남짓이었고, 조선인은 4만명이었다. 일본인은 3.4%, 조선인은 0.3%만이 10엔 이상 영업세를 냈다는 것이다.
이것만 봐도 조선인은 대부분 빈곤층이란 말이다. 그런 조선인들을 일본사람들은 어떻게 대했을까? 조선인에 대한 배려가 있었을까?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인천에 무기제조시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1908년 이후 늘어난 15만 명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일본 군수공장에서 일했을 것이다. 거기서 일했던 조선인들 중 어떤 이들은 먹고살기 위해 자발적으로 왔을 것이고, 어떤 이들은 전쟁터로 끌려가는 징용이나 징집을 피하기 위해 왔을 수도 있다. 이곳에서 일하는 것이 전쟁터에서의 개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아무리 낫다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조선인일 뿐이다. 그런 조선인을 부르는 일본말이 있다. ‘조센진’... 한자로 쓰면 ‘조선인朝鮮人’이다. 우리가 부르면 조선인이고 일본사람이 부르면 욕이 된다. 일본인들이 부르는 ‘조센진’이란 말 안에는 여러 비하의 의미가 함축돼 있다. 이것이 일제강점기의 조선인들의 삶이었다. ②편 <인천의 근대건축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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