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부자동네 성북동과 별서 ‘성락원’
[최성호의 사람 사는 건축] ①성북동과 성북동 별서 한때 의친왕의 별장으로도 1970년대 대지분할후 개발돼 고급 주택단지로 조성되기까지
‘성북동 별서’는 오랫동안 구설수에 올랐던 문화재다. 구설수의 핵심은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인은 ‘명승’으로서의 문화재적 가치는 이미 충분하고 그것을 넘어 과거 성북동이 지금과 같은 부자들의 저택이 가득 찬 동네가 아닌, 아름다운 경관을 가지고 있었던 곳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유일한 곳이라는 점 때문에 ‘성북동 별서’에 주목해왔다. 그런 관점에서 성북동 별서에 대해 얘기해본다.
들어가며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는 ‘성북동 별서’가 있다. (서울 城北洞 別墅 : 명승 제118호/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330-577)
성북동은 예전에는 북저동(北渚洞)으로 불리던 곳으로 조선초 정종 2년(1400년)에 선잠단이 세워졌고, 영조 41년 어영청의 북둔이 설치됐던 곳이다. 이곳 경치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북저동(北渚洞) : 혜화문 밖 북쪽에 있는데, 동(洞) 가운데 복숭아 나무를 벌여 심어서 봄철에 복사꽃이 한창 피면, 도성 사람들이 다투어 나가서 놀며 구경한다. 민간에서는 도화동(桃花洞)이라 부르며,...중략...늦은 봄철마다 노는 사람들과 거마(車馬)가 가득 찬다.”
그만큼 성북동 계곡은 경치가 좋아 사람이 많이 찾던 곳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봄에는 복숭아꽃으로 유명했다. 이곳 경치에 대해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도 기록을 남겼다.
“도성(都城)의 인사(人士) 중에 높은 관료로부터 여항(閭巷)의 백성까지 뒤질세라 유람하러 오니, 말과 수레 소리가 진동하고 노랫소리가 번갈아 일어나 퉁소와 생황 소리와 뒤섞였다....중략...내가 지금에야 비로소 여기를 찾아와 배회하고 탄상하며 마치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된 듯이 행동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늦었단 말인가.”
이처럼 아름다운 곳이었기에 이곳에 별서(현대의 별장)가 많았다. 비슷한 시기 기록에 나오는 별서를 살펴보면 오횡목(吳宖默)이 쓴 <총쇄록(叢瑣錄)>에 황윤명(黃允明1844~1916) 외에도 민영환(閔泳煥)의 별업(別業)이 있었다고 하고 고종 때 내각총리대신이었던 윤용선(尹容善)도 성북동에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지금도 서울시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이종석(李鍾奭) 별장이 있다.
성북동 별서는 예전 ‘성락원(城樂園)’으로 불렸다. 성북동 별서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성북동 별서는 1992년 ‘성락원(城樂園)’이란 이름으로 사적 제373호로 지정됐다가 사적으로 가치가 낮다는 이유로 사적에서 해제되고 2008년 명승 제35호로 다시 지정됐다.
이후에도 별서를 만들었다는 심상응(沈相應)의 존재여부와 훼손문제 등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고증과정에서 ‘심상응이 성북동 별서를 지었다’는 것이 역사적 근거가 없다고 판명되면서 2020년 9월 ‘성락원’이란 명칭으로의 문화재 등록이 해지되고, ‘서울 성북동 별서’라는 명칭으로 명승 제118호로 재지정했다.

별서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성북동 별서 주인에 대해 문헌상 확실하게 밝혀진 사람은 황윤명(黃允明 1844~19 16)이다. 황윤명은 환관으로 명례궁 대차지(大次知·종1품)를 역임한 인물이다. 황윤명은 황수연(黃壽延)으로도 불리는데 ‘수연’이란 이름은 고종이 하사했다. 황수연은 오세창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도 나올 정도로 시서화에 능했다. ‘황수연이 성북동 별서를 소유했다’는 자료는 황수연 문집인 <춘파유고(春坡遺稿)>, <총쇄록>, 명성황후가 내린 <일편단충(一片丹忠)>에 대한 ‘김규복(金圭復) 발문’ 등에 있다.
<일편단충> 발문에는 갑신정변 당시, “혜화문으로 나가 성북동 황윤명 집으로 향했다.(駕出惠化門向城北黃允明家)”라는 내용이 있어 갑신정변이 있었던 1884년 이전부터 황윤명 집이 성북동에 있다는 것이 드러나있다. 또한 성북동 별서 영벽지(影碧池) 바위에는 황윤명의 <춘파유고>에 나온 ‘인수위소지(引水爲小池)’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影碧池 海生/영벽지 해생
百川會不流/여러 줄기 물을 모이게 하여 흐르지 못하게 하여
爲沼碧欄頭/푸른 난간머리의 연못을 만들었네.
自吾得此水/내 이 물을 얻은 후에는
少作江湖遊/작게나마 강호를 만들어 노닐었다.
癸卯五月 孫 文鶴 書/계묘년 5월에 손자 문학이 쓰다
(2019.06.11. 오마이뉴스 기사의 번역을 기본으로 일부 수정함)
‘해생(海生)’은 황윤명의 호다. 손자인 문학이 썼다고 하니, 계묘년인 1903년에 새긴 것이다. 이 각자 때문에 연못 이름이 영벽지가 됐다. 이런 자료로 황윤명이 이곳 별서에서 거주했다는 것이 확인된다. 그리고 매일신보(1916.02.22.)에 ‘황춘파씨(黃春波(壽延) 氏)의 일생(一生)’이란 기사가 실렸는데 그 기사에서도 ‘성북동산정(城北洞山亭)’에 기거했다고 나온다. 그러므로 성북동 별서의 문헌상 기록은 황윤명으로부터 시작한다.
성북동 별서의 변천
성북동 별서가 황윤명 이전 언제 조성됐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영벽지 옆 바위에 새겨진 ‘장빙가(檣氷家)’란 글에 있는 ‘완당(阮堂)’이란 글로 볼 때 추사 김정희(1786~1856)도 다녀갔을 것이다.(추사 글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성북동이 워낙 경치가 좋다는 것이 알려졌으니 추사가 다녀갔다고 하는 것도 특별한 일은 아니다.
‘장빙가’는 ‘고드름이 달린 집’이란 뜻이라고 하니 추사가 이곳에 왔을 때는 이미 집이 있었다는 뜻이고, 황윤명이 성북동 별서에 들어오기 전부터 별서가 있었을 것이다. 그 별서가 어떤 과정으로 황윤명에게 넘어갔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황윤명이 쓴 <춘파유고>에서 이곳에 있던 집을 쌍괴당(雙槐堂), 쌍괴누옥(雙槐陋屋), 쌍괴실(雙槐室)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황윤명이 적극적으로 별서를 조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북동 별서는 이후 의친왕 이강(懿親王 李堈)의 별서가 된다. 1915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지형도에 이 지역이 이강공별저(李堈公別邸)로 되어있고, 1927년12월23일자 동아일보에 이강공별저에 화재가 났다는 기사가 실렸다. 소유권이 넘어간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두 차례에 나눠 이강에게 소유권을 넘긴다. 토지대장을 보면 성북동 5번지는 1913년 이재완(李載完)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가 1915년에 이강(1877~1955)에게 넘어가고 큰 필지인 12번지는 황윤명이 죽은 후 1년 후에 넘겼다. 해방 후인 1948년 황자근(黃自根)의 소유가 됐다가 박용하를 거쳐 1950년 제도산업의 사장 심상준(沈相俊)에게 넘어갔다.
이곳이 이강공 별저였다는 것은 이강의 딸인 이해경의 저서인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에도 나온다. 책에서 이해경은 ‘1930년 자기가 성북동 별저에서 태어났고, 이곳에서 생모를 만나기도 했고, 봄에 의친왕비와 같이 와서 나물을 캐기도 했다’고 했다.
해방 후 성북동 별서는 두 번 큰 변화가 있었다. 첫 번째는 이곳을 유원지로 개발하려 했던 것이고, 두 번째는 대지를 분할해서 고급 주택가로 조성한 것이다. 유원지 개발은 성북동 별서를 매입한 심상준(沈相俊)씨가 1961년 추진했다. 동아일보기사(1961.06.02.)에 의하면 개인 땅 3만평에 더해 주변부지 7만평을 확보해서 유엔군 휴가 장병을 위한 위락시설을 만들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무산됐다. ‘성락원(城樂園)’이란 이름이 등장하는 것도 이 때부터다.
기사에 의하면 당시 일부 공사를 추진하면서 송석정(松石亭· 당시는 수각정水閣亭)과 송석정 앞 연못을 당시에 만들었다. 이때 자동차가 진입할 수 있게 도로를 만들면서 물이 흐르는 계곡과 영벽정 앞도 일부 변형됐을 것이다. 성북동 별서가 가장 많은 변한 것이 이때가 아닐까 한다. 이 때문에 원형 훼손이 심하다는 이유로 명승으로 지정되는 것에 반대가 많았다.

1970년대부터 주변 부자동네로 변모
두 번째 변화는 1970년 초에 있었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기사가 몇 있다. 첫 번째 기사는 동아일보(1975.07.31.) 기사로 <세상이 이래서야 (3)無節制(무절제)와 향락>이란 제목으로 “「성락원」이라고 불리는 대저택촌 입구엔 돌로 지은 웅장한 경비실이 있고 수위들이 외부인사의 출입을 통제한다”라는 내용이 있고, 경향신문(1981.11.14.) 기사에는 <우리 동네(9) 城北洞(성북동)일대>란 제목으로 ‘성낙원 마을’에 34가구가 사는데 재계 거물과 전‧현직 장차관 및 국회의원이 살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1961년 유원지로 만들려고 했다는 기사에서 개인 땅이 3만 평이라 했다. 이것을 보면 1961년 유원지로 만드는 것이 무산되자 개인 땅을 분할해서 1967년 외인주택을 짓는다고 허가를 받은 후 최고급 주택단지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성낙원 주인인 심씨 땅은 현재 ‘성북동 별서’에서 북악스카이웨이까지였다. 이처럼 성북동 별서 영역은 1961년 이후에 2만 평 이상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면서 많이 축소됐다.
성북동 별서 경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송석정의 신축이다.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송석정 앞에 큰 연못은 송석정을 지으면서 조성했다. 하지만 영벽지 쪽에 쌓인 석축을 보면 이전에도 연지가 있었을 것이다. 이후 1997년 사적 복원계획으로 이전에 있었던 ㄱ자 한옥과 3층 조적건물을 헐고 현재 장빙가로 불리는 한옥을 지었다. 1998년에는 언덕 위에 다정(茶亭)을 세우고 주변에 한옥건물 한옥담장을 둘렀다.
이런 변화 중에서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별서에 물을 공급하는 위쪽 연못은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아직 성북동 별서 경관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물은 공급되고 있다. ②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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