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주얼한 대통령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박정인의 정치비평] 윤 대통령, 해외순방마다 왜 감점받을까 5세 취학·영빈관·도어스테핑 모두 ‘즉흥적’ 지나친 즉흥성 안돼...신중함을 미덕 삼아야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박해일의 얼굴을 붙잡고 한 대사 “밥은 먹고 다니냐?”는 한국 영화사 최고의 애드립으로 흔히 언급된다. 영화에서 애드립은 감초 역할을 하기도 하고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살리는 결정적인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대통령들도 간혹 애드립을 한다. 영어가 약했던 김영삼 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과 통역없이 산책을 하다가 갑자기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한마디 하는 모습이 멀리 있던 취재진에 포착된 적이 있다. 기자들이 급히 취재해 보니 영어로 별로 할 말이 없어 침묵하던 김 대통령이 우리 수행 기자단을 발견하고는 반가운 마음에 “Korean Press”라고 소개한 것이었다. 클린턴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두 정상의 허탈한 영어 대화는 하지만 보도에서는 슬쩍 빠져버렸고, 김영삼 대통령이 먼 곳을 가리키며 클린턴에게 뭔가를 설명하는 장면은 한미동맹의 돈독한 미래와 문민 대통령의 혁혁한 정상외교 성과를 홍보하는 이미지로 쓰이게 됐다.

역대 대통령의 이미지 메이킹
PI (President Identity)라는 게 있다. 흔히 기업 최고경영자의 이미지 메이킹을 뜻하는데 대통령은 대문자 President이고 최고국가경영자이니 대통령 이미지 메이킹도 PI라고 한다. PI를 담당하는 참모는 대통령이 어떤 이미지로 국민에게 투영돼야 할지를 정하고 그런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 위해 모든 각도에서 원칙과 액션플랜을 정한다. 노태우의 보통사람, 김영삼의 문민, 노무현의 탈권위 같은 것이 PI의 목표이고 그걸 완성하기 위해 서민행보나 칼국수 오찬 같은 다양한 이미지 메이킹이 동원된다.
우리 헌정사에서 성공적인 이미지 메이킹 가운데 하나로 문재인 대통령이 판문점 보도다리에서 북한 김정은과 대화를 나눈 장면이 꼽힌다. 많은 국민이 문 대통령을 남북 갈등을 해결할 지도자라고 믿게 된 이벤트였다. 장소는 물론 주변 환경, 걷는 거리, 카메라 각도까지 계산된 정밀한 작품이었다.
국민이 느끼는 대통령의 이미지에 극적인 변화를 준 경우는 1974년 8월 19일 국화로 덮힌 고 육영수 여사의 운구차를 어루만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던 독재자에게서 졸지에 아내를 잃은 평범한 남편의 가슴 미어지는 슬픔이 우러났다.
아마 현존하는 모든 공화국의 대통령은 PI의 목표로 권위적 태도와 엄격함, 까다로움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러시아의 푸틴 정도가 예외라면 예외다.) 어떻게든 국민에게 다가가기 위한 이미지 메이킹이 PI의 핵심 목표다. 소탈하고 캐주얼한 모습을 보이는 게 가장 인기있는 대통령 이미지 메이킹 수단이다.
예를 들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수석 비서관 회의를 하는데 유인태 정무수석이 대통령 면전에서 담배를 뻑뻑 피는 모습을 보고 국민은 탈권위의 시대를 실감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취임 초기 임종석 비서실장, 조국 민정수석 등과 와이셔츠 소매를 걷고 테이크 아웃 잔에 담긴 커피를 마시며 청와대 경내를 산책하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참모들의 도움 없이 대통령 본인의 개인기로 즉석에서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하는 경우도 간혹 생긴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캠프 데이비드에서 부시 대통령을 만났을 때 “Can I drive?”하면서 호스트인 부시 대신 자신이 카트를 몰고 경내를 돌아다닌 것은 즉흥적이었지만 동맹의 굳건함을 과시하는 성공적인 이미지 메이킹이었다.
캐주얼하려다 지나치게 즉흥적이 된
윤석열 대통령은 과거 어느 대통령보다 캐주얼함을 즐기는 인물인 것 같다. 첫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프리스타일을 선언하면서 자유복장, 자유발언을 주문했을 때부터 조짐이 보였다. 비서실장이나 수석들과 허름한 맛집을 찾아다니며 점심을 하는 모습도 그랬고, 부부가 신발 쇼핑에 나서거나 한강시민공원 산책을 하는 모습 역시 신선했다.
하지만 캐주얼하다는 게 대통령의 PI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애초에 윤석열 대통령의 PI가 뭔지 애매하다. ‘전 정권의 실정을 바로잡으려는 대통령’은 PI로 삼기에는 너무 정파적이다. ‘자유주의 대통령’은 PI라기 보다는 정치학 논문 제목 같다. ‘국민과 함께 하는 대통령’ 정도가 PI여서 캐주얼함을 자꾸 강조하는 거라면 맥락은 있겠다. 하지만 문제는 대통령의 캐주얼함이 지나치게 즉흥적이라는 점이다.
캐주얼함에 경도된 결정의 대표적인 사례가 데일리 도어스테핑이었다. 일전에 자세히 다뤘으니 간단히 넘어가겠다. (7/13일자 칼럼 ‘지지율 하락의 예언서 된 도어스테핑’ 참조) 데일리 도어스테핑의 취지는 캐주얼한 대화가 주는 신선함이지만 본질은 철저한 준비와 사후 대응이 필요한 회견 방식이라는 점이다. 윤 대통령과 참모들은 그 본질에 충실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그 때문에 문제가 생겨 홍보수석실이 중단을 결정한지 하루 만에 대통령 마음대로 재개한 것 마저도 즉흥적이었다.
대통령이 국민들로부터 점수 따기 가장 좋은 이벤트인 해외순방에서 번번이 감점을 받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이번 유엔 방문에서 대통령이 비속어를 쓰며 미국 대통령을 언급한 듯한 녹취가 공개된 것이 그렇다. 대통령이 다자정상 외교무대에서 긴장하지 않고 참모들과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건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공개장소에서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빠짐없이 기록되고 공개된다는 사실을 모를까?
대한민국 국민을 대표해 그 자리에 가 있다는 표현이 구태의연한 형식논리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주요국 정상들도 한 두번씩은 이른바 Hot Mic의 실수를 저질렀는데 뭐가 어때? 설마 그런 생각은 아니길 바란다. 정상 외교에서는 실수도 순위가 있다. 미국 대통령의 실수는 가벼운 가십 정도로 넘어갈지 몰라도 한국 대통령의 실수는 안타깝게도 외교 이슈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캐주얼한 스타일도 대통령이면 너무 즉흥적이어서는 안된다. 말과 행동의 스타일도 그런데 인사와 정책은 오죽할까. 신중함이 최고의 미덕이어야 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이 부분에서 조차 즉흥성을 버리지 못하는 느낌이다.
섣부른 즉흥성 발휘는 실패 불러와
되돌아 보면 취임 초기 ‘서오남 인사’라는 비판을 받던 윤 대통령이 교육부 장관, 복지부장관, 식품의약품안전처장 후보자로 한꺼번에 여성을 내정한 것도 즉흥적 결정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든다. 당시에는 “나름 여성 발탁 의지가 있구나”하는 인상을 줬지만, 결과적으로 교육부 장관은 여전히 공석이고, 복지부 장관 후보자 자리는 다시 서오남에게 돌아갔다. ‘여성’이란 원칙에만 매몰돼 제대로 된 검증없이 발탁한 경우였다.
취학연령 하향 조정안을 불쑥 내밀었다가 취소한 것은 또 어떤가. 지금까지 정황으로는 취임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장관이 대통령 독대 보고 자리에서 정책안을 설명하니까 “아 그렇게 합시다”라고 결정한 것 같아 보인다. 공약에도, 국정과제에도 없던 정책이고 수많은 예민한 이해당사자들이 있는 사안이었다.
덜컥 정책을 내놓은 것도 문제지만 한 순간에 쓰레기 버리듯 폐기한 것도 큰 문제다. 취학 연령을 낮추는 것은 장기적인 국가과제로 지속적이고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한 사안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폐기해 버리면 적어도 윤석열 정부 5년 간은 이 사안을 논의할 기회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
영빈관 예산안이 공개돼 비난이 쏟아지자 즉각 철회한 것 역시 즉흥적 의사결정의 전형이다. 필자는 어쨌든 영빈관이 필요하다는 쪽이다. GDP 세계 10위 국가가 국빈을 맞을 영빈관 하나 없는 건 곤란하다. 미국의 블레어 하우스, 중국의 조어대, 일본의 국보인 아카사카 이궁은 물론이고 평양의 백화원 초대소에 버금 갈 공간이 필요하다.
이 필요성은 벌써 오래 전부터 제기돼 왔다. 청와대 영빈관 갖고는 안된다는 말이 나온지 필자의 기억으로도 15년은 넘어간다. 그런데 이런 사안을 국민적 논의나 최소한의 설명도 없이 슬쩍 예산안에 올렸다가 반응이 안좋으니 대통령이 단칼에 취소해 버린다? 마치 국가 예산으로 윤석열 대통령 개인 별장을 몰래 지으려다 들켜서 황급히 취소하는 것 같은 모양새다.

국가 경영에서 즉흥적 판단의 폐해는 막대하다. 지도자가 의사결정을 즉흥적으로 하면 결정 전과 결정 후 양쪽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결정 전의 대표적인 문제는 공직사회의 복지부동이다. 어차피 대통령이 즉흥적으로 결정할테니 정책을 준비할 때 여론과 파장을 고민하지 않고 대충 던지게 된다. 특히 즉흥적 결정은 나중에 잘못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자기가 책임져야 할 부분은 미리 슬쩍 빼버릴 수도 있다.
결정 후의 문제는 여론의 반발이나 정책실패가 일어났을 경우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책임은 즉흥적으로 결정한 대통령에게 있는데 그렇다고 대통령에게 책임지라고 할 수도 없다. 공무원들이 입안 과정에서 대통령의 즉흥적인 결정을 예상하지 못했을 경우 그 결과를 놓고 우왕좌왕할 수 밖에 없다.
이명박 대통령은 정상외교에서 즉흥적인 개인기가 뛰어났지만 즉흥적 결정으로 국정에 손해를 끼친 일도 있다. 2012년 8월10일 이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독도를 방문했다. 헌정사상 대통령의 독도방문은 처음이었다. 역대 대통령들이 독도에 가지 않은 이유는 헬기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우리가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으니 일본이 아우성 쳐도 무시하는 게 유리하다는 정치적 판단 때문이었다.
독도방문계획은 청와대 의전팀이 2년간 준비했지만 외교안보팀의 심사숙고한 판단으로 성사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2012년 8월의 대통령 지지율이 17%까지 추락한 게 방아쇠를 당겼다. 이 대통령은 결국 2년 간 지킨 인내심을 버리고 독도행 헬기에 올라탔다. 여론은 당연히 환호했다. 지지율이 10% 포인트 이상 급등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지지율은 다시 하락세로 돌아섰고, 한일관계는 더할 수 없이 악화됐으며, 독도 논란은 한 걸음도 달라진 게 없다.
진정성·고심 없는 애드립은 안통한다
대통령이 캐주얼하게 보이고 국민이 원하는 걸 즉석에서 실천하는 것은 괜찮은 PI이다. 군사독재와 제왕적 대통령제의 역사를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국민에게 다가오는 대통령을 원했던가. 하지만 국민이 TV 화면을 통해, 또는 거리에서 마주치는 대통령의 모습은 그것이 전부가 돼서는 안된다. 단 10초 국민에게 비치는 대통령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참모들은 열시간 백시간을 들여 정밀한 액션플랜을 짜야 한다.
대통령이 허름한 해장국집을 가면 그 시점과 위치와 메뉴가 주는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대통령이 신발을 사러가도 경기활황을 과시하려면 구두를 사야 하고, 함께 침체를 극복하자고 하려면 운동화를 사야 한다. 대통령 부부가 강아지와 함께 한강변을 산책해도 자택 근처라고 해서 반포 한강시민공원을 선택하는 건 조심스럽다. 반포는 영끌을 해도 집 살 기약이 없는 부동산 광풍의 시대를 상징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윤석열 대통령이 해외정상들과 만찬 자리에서 러브샷도 하고, 전국노래자랑에 나가 부인 김건희씨와 듀엣으로 노래도 부르고, 주말에 용산가족공원에 가면 언제든지 만나 악수할 수 있는 지도자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또 정책이 국민의 반대에 부딪칠 경우 아무리 공을 들였고 정치적인 이익이 달려 있다 하더라도 과감하게 버리는 용단을 내릴 수도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판단과 행동은 즉흥적이어서는 안된다. 오직 실력으로만 뽑았다는 대통령실과 정부의 인재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을 진정성 있게 국민에게 소개했으면 한다. 대통령은 무대 뒤에서는 총감독이면서 무대에선 배우가 되는 독특한 위치에 있다. 총감독을 할 때는 스탭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도록 지휘해야 하고, 무대 위에 서면 준비된 각본대로 다른 배역들과 연기 호흡을 맞춰야 한다. 지휘는 소홀히 하면서 혼자 애드립을 남발하면 작품이 망한다.
다시 영화 살인의 추억으로 돌아가 보자. 배우 송강호는 훗날 인터뷰에서 “밥은 먹고 다니냐?” 이 한 마디가 애드립이기는 했지만 그냥 즉석에서 만든 게 아니라고 했다. 해당 장면 촬영을 앞두고 봉준호 감독이 “그 순간 당신이라면 뭐라고 말할 것 같아?”라고 물은 게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아서 사흘 밤낮을 ‘피를 말리는 기분’으로 고심하다 찾아냈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보여주는 캐주얼한 스타일의 이면에도 그 정도의 무게가 실려 있으면 좋겠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