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천재복서 황동룡...장정구도 놀랐던 주먹
[조영섭의 잊을 수 없는 순간과 선수들] 복싱의 4S를 모두 갖춘 특급복서 장정구·유명우와 스파링하며 인정받아 세계 타이틀전 앞 ‘망막 부상’에 조기은퇴
장정구 챔프와 함께 만난 사람
지난 주 일요일(23일) 제주도 한라체육관에서 제5회 제주도지사배 한·중·일 프로복싱 3개국 국가대항전이 펼쳐졌다. 대회를 참관한 필자는 원로인 한보영 해설위원을 비롯, 장정구, 박종팔 챔프 등 많은 복싱관계자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행사가 열린 한라체육관은 역사적인 곳이기도 했다. 지난 1983년 7월 WBA 플라이급 챔피언 라시아르(아르헨티나)에게 도전한 신희섭이 단 79초 만에 KO패로 주저앉는 경기가 열린 곳이었다.
이곳 제주도는 한국복싱 초창기 시절, 핵심적인 인물인 현해남, 한규철 선생의 고향이기도 했다. 또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아마추어복싱의 페더급 국가대표로 활동하면서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한 김성은, 1971년 아시아선수권을 제패한데 이어 1972년 뮌헨 올림픽에 출전했던 고생근, 1980년대에는 국제대회 3관왕을 달성한 고희룡 등이 제주도 출신이었다.

모두 5게임의 경기가 펼쳐진 이날 대회에서 3번째 경기에 나선 KBF(한국복싱연맹) 밴텀급 챔피언 오상헌(대구 코리아체육관)이 중국의 펑성과 벌인 8회전 경기에서 압도적인 타격술을 보이며 2회 KO승을 거뒀다.
경기 후 필자는 제주도에서 개인사업을 하는 황동룡 전 WBA 주니어 플라이급 6위에게 연락을 취해 자리를 했다. 이번 대회의 감독관으로 참관한 장정구 챔프와 함께 만찬하는 자리였다. 두 사람 간에 얽힌 숨은 비화까지 듣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천재 복서’로 불리던 황동룡
1962년 6월 전북 군산시 오룡동에서 태어난 황동룡은 그 동네에 있는 산 이름을 따 ‘월명산의 날다람쥐’라 불릴 정도로 체력과 스피드가 뛰어난 테크니션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가 서울에 있는 오뚜기 체육관(관장 박태식)에서 복싱을 시작한 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한 직후였다. 꾸준한 연습으로 기량을 쌓아가다 1979년 제32회 전국 신인대회에서 월등한 기량으로 코크 급(45㎏)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1980년 박태식 관장이 태릉선수촌에 국가대표 복싱 스탭으로 발탁돼 입촌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 군산에서 그는 김완수 관장(군산복싱체육관)의 맞춤형 지도로 기량이 급상승하며 중앙무대를 석권하기에 이른다. 1981년 6월 제11회 대통령배 시도대항 대회에서 한정훈을 판정으로 꺾고 라이트 플라이급 우승을, 그해 10월 제62회 전국체육대회에서 국제대회 3관왕 박제석마저 꺾고 2관왕을 차지했다. 1982년 대통령배 대회에서 플라이급으로 월장, 결승에서 윤석환을 잡고 2체급을 석권했다. 그러나 그해 7월 제9회 인도 뉴델리 아시안게임 선발전에서 권채오와 맞붙어 아깝게 판정패했는데, 권채오는 본선에 진출해 동메달을 획득하게 된다. 당시 신문기사에는 악착같이 덤벼드는 황동룡의 스피드와 체력 앞에 열세를 면치 못한 권채오가 석연찮은 판정승을 거뒀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설욕의 기회는 쉽게 찾아왔다. 패전에도 불구하고 1982년 9월 베네주엘라에서 개최된 제1회 <시몬 볼리바르컵>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하는 등 기세가 꺾이지 않은 황동룡은 다음해 2월 원주에서 개최된 킹스컵 선발전 플라이급 준결승에서 권채오와 맞닥뜨렸다. 결국 판정승으로 설욕에 성공했다. 다시 상승세를 탄 그는 이어 4월에 열린 한미일 3개국 친선복싱대회에서 국제대회 첫 우승을 차지하며 빛을 발한다.
여담이지만 이런 화려한 경력의 황동룡에게 같은 체육관에서 훈련하던 필자가 스파링 파트너로 나서면서 그의 주먹을 맞아보기도 했다. 필자의 눈에 황동룡은 복싱의 4S(스피드·스킬·센스·스태미나)를 겸비한 특급복서였다. 그와 스파링을 할 때마다 필자는 샌드백처럼 일방적으로 난타당했다.
제 13회 대통령배 아마추어 복싱대회가 1983년 5월 광주에서 열렸다. 황동룡이 전북 대표로 선발되었는데, 군 복무 관계로 불참했고 대타로 필자가 출전해 준결승에서 오광수(전남)에게 패하며 소중한 동메달을 획득했다. 그해 8월에는 로마 월드컵대회에 앞서 국가대표 2차 선발전이 열렸다. 황동룡은 라이트 플라이급으로 출전, 준결승전에서 서정수를, 결승에선 성광배를 연달아 RSC로 잡고 우승을 차지했다. 서정수는 훗날 국제대회 5관왕에 올랐고, 성광배는 세계군인선수권 금메달을 딴 강자들이었다. 당시 필자는 황동룡을 피해 플라이급으로 출전했고 결승에서 권채오를 잡으며 우승했다.
장정구· 유명우와 스파링 대결하다
황동룡은 그해 전국체전을 끝으로 아마추어 세계를 떠난다. 아마추어 88전 81승(23KO. RSC) 7패의 전적은 화려했다. 1984년 1월 프로 전향후 8월까지 4연승을 기록하던 중 당시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 장정구, 국내 랭커 유명우 선수와 번갈아가며 스파링 파트너로 마주했다. 아마 전적 1승 3패, 프로 전적 13연승을 질주하던 유명우와는 3차례에 걸친 스파링 게임을 펼쳤는데, 황동룡은 한 템포 빠른 스피드와 눈부신 연타로 주도권을 잡는 등 프로에서도 통할 수 있는 실력을 공인받았다.
자신감을 얻은 황동룡은 이번엔 거함 장정구를 파트너로 선택해 그해 6월 어느 날 영등포의 88체육관에서 일전을 펼친다. 중요한 사실은 그를 가르친 트레이너가 1983년 3월 26일 장정구가 사파타를 꺾고 정상정복에 성공할 때 그를 직접 조련한 이영래 사범이었다는 점이다. 장정구는 1984년 3월 31일 부산에서 3차 방어전을 치른 후 이 사범과 결별했다. 그 후 임현호 트레이너를 새로 영입해 두달 후인 8월 18일 일본의 도카시키와 4차 방어전을 치를 예정이었다.
예상과는 달리 그날 장정구 챔프는 극심한 체중감량에 시달린 탓인지 핼쑥한 채 나타났다. 첫번째 스파링에서 88체육관은 황동룡을 포함해 2명의 파트너를 준비했다. 한영현이라는 선수가 1차로 나서 장정구를 상대로 3회전 스파링을 끝냈고, 이어 황동룡이 링에 올랐다. 그는 빠른 스피드를 이용해 현란한 테크닉을 선보였다.
그렇지만 장정구는 역시 노련했다. 침착하게 보디워크와 헤드워크로 황동룡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면서 침착하게 대응해 나갔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스파링 중간중간의 클린치 상태에서 황동룡은 간헐적으로 장정구의 뒷머리를 때렸다. 이때 장 챔프는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사실 황동룡의 이런 행동은 이영래 사범이 가르친 꼼수였다. 이 사범과 장 챔프간에 보이지 않는 심리전이 링 위에서 펼쳐졌던 것이다.
스파링이 끝나고 장정구 일행이 퇴장하자, 김철호 88체육관 관장과 이영래 수석 사범은 예상외로 선전한 황의 스파링을 복기하며 서로 의기양양해 했다. 그리고 열흘쯤 뒤 장 챔프 일행이 88체육관에 다시 나타났다. 이번엔 장정구와 황동룡 두 사람이 맨투맨으로 6회전 스파링을 펼쳤다.
공이 울리자마자 초반부터 장정구는 작심한 듯 묵직한 강타를 황동룡을 향해 뻗었다. 직격탄을 맞은 그는 휘청거렸는데, 그 모습에 필자도 깜짝 놀랐다. 필자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던 황동룡이 링 위에서 비틀거린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날 그렇게 스파링은 장 챔프의 페이스대로 종결됐고 이영래 사범은 허탈한 표정으로 허공을 향해 연신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날 저녁 워커힐 아파트로 88 프로모션의 총사령관인 심영자 회장에게 호출된 이영래 사범과 김철호 관장은 혼이 났다. 장정구 챔프는 당시 황동룡을 평범한 하룻강아지 정도로 생각하고 첫 스파링을 치렀다. 그러나 복병에게 자존심이 상한 무림의 제왕(帝王) 장정구는 용서하지 않았다. 본때를 보여주려 작심하고 두번째 스파링 출정을 자청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난 일요일 제주도에서 황동룡은 장정구 챔프에게 38년전에 둿통수를 때린 행동이 경솔했다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장 챔프는 그런 황동룡의 퍼포먼스(performance)에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제주도 저녁 자리에서 황동룡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는 장정구에게 타점 맞추기가 힘들었다며 실력차를 절감했다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뜻밖의 부상, 천재 복서의 발목을 잡다
그렇게 장정구 챔프와 진땀 흘린 두차례 스파링을 끝냈던 황동룡은 1984년 8월 필리핀의 닉 다리세이 선수와 첫 국제전을 펼쳐 5회 KO승을 거두고 4연승(1KO)을 질주했다. 그리고 9월 멕시코의 강자 헤르만 토레스와 문화체육관에서 세계 랭킹전을 펼친다. 54전 48승(34KO) 1무 5패를 기록한 토레스는 1983년 9월 장정구의 WBC 타이틀을 넘보다가 판정패를 당했던 선수였다. 하지만 WBA 챔피언을 지낸 루페 마데라(멕시코)와 조이 올리버(미국)를 상대로 3연승 (1KO)을 기록한 슬러거이기도 했다.
현장에서 필자가 직접 관람한 이 대결에서 4전의 신예 황동룡은 54전을 기록한 백전노장 토레스를 상대로 전라운드에 걸쳐 우세한 공격을 펼치며 판정승을 거뒀다. 장정구와의 두 차례 스파링 경기를 통해서 그는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이다.

세계랭킹에 진입한 그는 곧바로 세계타이틀전을 준비했다. 당시 WBA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은 10승(3KO) 10패를 기록한 도미니카의 프란시스코 퀴로즈였다. 황동룡 측은 1985년 2월 2일 미국 마이애미비치에서 도전자 조이 올리버(미국)를 상대로 방어전을 펼치는 퀴로즈의 경기 이후에 승자에 도전하기로 계약을 했다. 그러나 그는 불운하게도 앞서 토레스와의 경기에서 입은 부상에 발목이 잡혔다. 단순한 부상이라고만 생각했던 망막 부상이 회복이 불가능한 것이라는 판정을 받았던 것이다. ‘천재 복서’ 황동룡의 안타까운 조기 퇴장이었다.
한편 WBA 라이트 플라이급 타이틀전에서 도전자 조이 올리버가 만만한 챔피언 퀴로즈를 꺾고 정상에 올랐다. 올리버가 보유한 타이틀은 1985년 12월 13일 유명우가 15회 판정으로 승리를 거두며 빼앗아왔다. 이영래 사범은 훗날 필자에게 황동룡 선수가 무탈했다면 복싱판에 큰 지각변동이 일어났을 것이고, 유명우의 정상정복도 요원했을 거라고 에둘러 말하기도 했다. 비운의 천재복서 황동룡은 제주도에서 개인사업을 하면서 그렇게 지난날의 아쉬움과 미련을 깊숙이 감춘 채 안정된 삶을 보내고 있다. 그의 건승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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