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독립선언서 타전한 앨버트의 집 ‘딜쿠샤’

[최성호의 사람 사는 건축] 한국을 사랑한 AP통신 기자 ‘앨버트’ 부부가 살았던 2층 양옥집 이야기 독특한 벽돌쌓기 공법도 눈길

서울 종로구 행촌동 언덕녘에 있는 딜쿠샤.
서울 종로구 행촌동 언덕녘에 있는 딜쿠샤.

건축가가 찾아가 본 ‘딜쿠샤’

딜쿠샤(Dilkusha)는 3·1 독립선언서를 해외에 처음으로 알린 AP통신의 알버트 테일러 통신원이 살던 집이다. 국가등록문화재 제687호로 서울시 종로구 사직로2길 17(행촌동 1-88번지)에 있는데, 지난해 3월 1일 개관했다.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때 기업인이자 언론인으로 활동하던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1875~1948)와 메리 테일러(1889~1982) 부부가 살았다. 앨버트는 1896년 11월 광산기술자로 조선에 들어온 아버지 알렉산더 테일러의 부름을 받고 동생과 함께 다음 해에 이 나라에 왔다. 앨버트는 연극 배우였던 메리와 1916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만난 후, 인도에서 결혼하고 서울에서 살았다. 테일러 부부는 처음에는 한옥을 개조한 건물에서 지내다 현 위치에 집을 지어 이 곳으로 옮겨왔다.

이곳 동네 이름은 행촌동(杏村洞)이다. 권율 장군의 집터였던 곳으로, 행촌이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과거 600년 된 은행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이 집터는 부부가 서울성벽을 따라 돌다가 찾았고, 부부는 자기 집을 지으면 이곳에 짓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이후 소유주가 사망해 집을 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부부는 이곳 재산신탁관리자의 중재로 땅을 매입했다. 딜쿠샤는 1923년에 지어졌고, 지은 지 3년 만인 1926년 7월 26일 낙뢰로 전소된 뒤에 재건된 집이다. 딜쿠샤라는 집 이름은 인도의 ‘딜쿠샤 궁전’에서 따왔는데, 메리 테일러가 작명했다. ‘즐거운 마음의 궁전’이란 의미다.

3·1 독립선언서 세계에 알린 ‘집주인’

낙뢰로 전소될 당시 테일러 부부는 테일러의 건강 때문에 미국에 있었다. 그래서 서울에 있던 동생 윌리암이 재건해 앨버트 부부가 없는 동안 다른 외국인에게 세를 놓았다가, 앨버트 부부가 귀국해 실내를 다시 꾸몄다. 이후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테일러 부부는 가택연금을 당했고, 다음해 미국인들에 대한 추방령이 내려지자 강제로 출국당한다.

딜쿠샤의 주인 앨버트 테일러.
딜쿠샤의 주인 앨버트 테일러.

전쟁이 끝난 후 1945년 고문관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한 후 테일러 부부는 다시 한국에서 지내려고 했다. 그러나 1948년 6월 앨버트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계획은 무산됐다. 유언에 따라 유해는 1948년 10월 그의 아버지가 묻혀있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이때 부인인 메리가 입국했지만 집 정리가 잘 되지 않은 것 같다. 1959년 자유당의 조경구의원이 이 집을 매입했으나 1963년 조경구의 재산이 국고로 귀속되면서 이 집도 국가 소유가 됐다.

그 후 공동주택으로 사용되고 있다가 지난 2005년 테일러 부부의 아들인 브루스 테일러가 서일대 김익상 교수에게 의뢰해 딜쿠샤를 찾아냈다. 이듬해 브루스가 방문해 자신이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 살던 집임을 확인했다. 이후 2016년 서울시, 문화재청 등 관련 부처가 복원을 결정하고 브루스의 딸인 제니퍼가 테일러 일가 유물 1026점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자, 서울시 등은 딜쿠샤를 전시관으로 개조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지난 2017년 등록문화재 제 687호로 등록됐으며 2020년 복원공사를 끝내고 2021년 3월1일 ‘딜쿠샤 전시관’으로 개관했다. 내부 인테리어 복원에 대한 고증과 계획은 근대건축 실내 재현 전문가인 최지혜 국민대 겸임교수가 했는데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딜쿠샤, 경성에 살던 서양인의 옛집>이란 책으로 출간했다.

앨버트 테일러 부부가 살았던 '딜쿠샤'의 옛 모습. 자료=서울시
앨버트 테일러 부부가 살았던 ‘딜쿠샤’의 옛 모습. 자료=서울시

‘딜쿠샤’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

지금 우리가 만나볼 수 있는 옛집들은 딜쿠샤처럼 그 집에서 산 사람의 생애와 그 시대 생활상을 보여주는 전시관으로 꾸며져 있다. 그러나 이런 집을 볼 때마다 당대의 삶을 느끼기 보다는 그냥 전시관이란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게 사실이다. 이 집도 전시물 때문에 집에 대한 느낌이 감소된다. 전시물 보다는 가구를 더 배치하고, 지하층을 전시관으로 꾸미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긱이다.

‘딜쿠샤’라는 이름은 힌디어에서 왔다고도 한다. 힌디어로 ‘딜(Dil)’은 가슴, 심장을 뜻하고, ‘쿠샤(Kush(a), K(h)ush)’는 행복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나 도록 <딜쿠샤와 호박목걸이>에 기고한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은 논문에서 “인도 곰티강 유역의 러크나우에 폐허로 남아있던 유적에서 따온 것으로, 메리가 쓴 책에 ‘즐거운 마음의 궁전’이란 뜻의 페르시아어라고 밝히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부인인 메리가 쓴 조선에서의 회고담 <호박목걸이> 번역본을 보면 힌두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고 하고 있다. 이순우 논문 각주에서 소개한 책이 <Chain of Amber>로 돼있는 것으로 보아 이순우는 영어원전을 보고 쓴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원전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판단을 보류한다.

앨버트 테일러는 AP통신 통신원으로 활동해 고종의 장례식, 3·1운동, 제암리 학살사건을 해외에 알렸다. 이들 부부에게는 3·1운동관련 일화가 있다. 1919년 2월 28일 첫 아들인 브루스를 낳기 위해 메리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을 때 간호사 한 명이 독립선언문을 메리 침상 밑에 숨겨 놓았다. 이것을 알게 된 앨버트는 3·1운동 관련 기사를 작성해서 독립선언서 사본과 기사를 동생 윌리암에게 전했고, 윌리암은 구두 뒤축에 감춘 채 도쿄에 가서 AP통신 본사에 송고했다.

딜쿠샤 내부의 1층 벽난로 주변 모습.
딜쿠샤 내부의 1층 벽난로 주변 모습.

건축사 눈에 띈 독특한 ‘벽돌 쌓기’ 공법

테일러 부부가 짓고 살았던 딜쿠샤는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건축물대장에 기재된 면적은 연면적 626㎡(189.5평), 1층 267.05㎡(80.9평), 2층 264.5㎡, 지하층 94.8㎡다. 집 구조는 1, 2층 모두 중앙에 거실을 두고 좌우에 방을 배치했다. 현재는 모두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어 정확한 실용도는 확인하기 힘들다. 전시 팜플렛에 의하면 1층은 거실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식당과 주방, 서쪽에는 자녀나 손님을 위한 방이 있었다고 한다. 2층은 동쪽에 앨버트의 서재와 침실, 서쪽에 부인의 작업실과 침실이 있었고, 지하층은 창고였다.

1층 동쪽에 외부로 나가는 출입문이 있는 것과 도면상 벽난로가 없는 것으로 보면 동쪽 뒷방이 주방이었고 전망이 좋은 남쪽을 식당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서쪽 방은 복도를 통해 들어가게 돼있고 모두 벽난로가 설치된 것으로 보아 방으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2층은 동쪽 방은 큰 벽난로가 있어 앨버트의 서재, 북쪽 방은 앨버트의 침실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서쪽 방에서 앞쪽으로 돌출한 방은 부인 메리가 사용한 작업실, 작은 방이 부인 침실이었을 것이다.

건물 지붕구조는 트러스 구조다. 트러스 위에 판자를 덮고 그 위에 동판이나 기타 얇은 금속재를 덮은 것 같아 보인다. 초기에 어떤 금속재료를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동판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는 2층 동쪽 앨버트의 서재 천정 일부를 걷어내 지붕구조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외장재료는 ‘적벽돌’을 사용해서 ‘치장쌓기’를 했다. 외부로 노출되는 부분은 벽돌의 넓은 면이 보이도록 세워 쌓았다. 이렇게 쌓으면 벽이 얇아져 안정성이 문제가 되는 데, 안정성은 벽돌끼리 물려 쌓는 방식으로 쌓아 해결했다. 이렇게 쌓는 것을 전시물과 팜플렛에서는 ‘공동벽(空洞壁)쌓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보통 건축에서는 벽돌의 좁은 면 쪽이 보이도록 하는 ‘공간벽 쌓기’를 하는데, 이 집은 넓은 면 쪽으로 세워쌓았기에 특별히 ‘공동벽 쌓기’로 부르는 것이 아닌가 한다.

딜쿠샤의 외벽. 벽면 중간에 벽돌의 넓은 면으로 쌓아올린 모습이 보인다. 기둥은 좁은 면으로 쌓았다.
딜쿠샤의 외벽. 벽면 중간에 벽돌의 넓은 면으로 쌓아올린 모습이 보인다. 기둥은 좁은 면으로 쌓았다.

벽 쌓기에서 내부 쪽으로는 다시 공간을 두고 세워쌓았다. 이렇게 쌓다보니 빈 공간이 두 번 생긴다. 공간이 두 번 만들어지니 단열에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일반 벽돌 쌓기보다는 발전된 방식이다. 팜플렛에서도 근대건축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하고 희귀한 방식이라 했다. 문화재청 사이트에서는 이 벽돌 쌓기를 ‘Rat trap bond’라고 소개하고 있다.

‘Rat trap bond’는 관련 링크를 보면 “It is also known as a Chinese brick bond”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중국에서 고안된 조적방식이란 뜻이다. 벽돌쌓기 방법은 벽체 두께와 줄눈 디자인 때문에 설계 때 결정된다. 아마도 설계자가 이런 방식을 제안했을 것이다. 달쿠샤를 지을 터를 보러 갔을 때 건축가가 동행했다는 내용이 메리의 회고담 <호박목걸이>에 나온다. 그러나 설계자에 대한 설명이 없다. 책 <호박 목걸이>를 보면, 땅을 사서 집을 짓기까지의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됐음을 알 수 있다. 이를 감안하면 설계자는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던 외국인 건축가로서, 이미 중국에서 활동했던 사람이 아닐까 추측해봤다. 또 개화기부터 중국인 조적공이 조선에서 활동했다는 기록도 있으니 조적공 역시 중국기술자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건축을 전공한 필자로서는 딜쿠샤에서 가장 궁금한 부분이다.

당시 집앞 전망은 어땠을까

예전에 딜쿠샤를 찍은 사진을 보면, 딜쿠샤 앞에 큰 나무가 있었다. 처음 언급한 대로 600년 됐다는 은행나무일 것이다. 테일러 부부가 집터를 보러 갔을 때 ‘이 집터에서 바라다 보이는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이 있는데, 조선신궁 보다 높게 짓지 못하게 하는 법도 때문에 집터는 그에 따라 정해질 것’이라는 대목이 있다.(책 <호박목걸이>에서) 인왕산에 있는 국사당도 원래 남산에 있었던 것이지만 조선신궁보다 높은 곳에 있다고 해서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딜쿠샤가 은행나무 옆에 지어진 것을 보면 조선신궁보다 은행나무가 낮은 곳에 있었던 모양이다. 집주인은 마음속으로 제발 은행나무 위치가 조선신궁보다 낮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여간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됐다. 지금은 건물 등으로 조망이 가렸지만 당시에는 꽤 전망이 좋았을 자리다.

기증유물 특별전시회 '딜쿠샤와 호박목걸이' 포스터
기증유물 특별전시회 ‘딜쿠샤와 호박목걸이’ 포스터

이런 조망에 대해 <호박 목걸이>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도 은행나무 아래에 멈춰 서서 숨을 돌리고 우리의 새로운 소유물을 바라보며 뿌듯해 했다. 은행나무가 자라는 언덕 뒤로는 멀리 북한산이 보였고, 서쪽으로는 무악재 길이 보였으며, 동쪽으로는 아래쪽 계곡을 따라 늘어선 오래된 성벽이 경계를 짓고 있었다.” 조망이 좋은 언덕에 새집을 짓고 들어간 기분은 세상 모든 걸 다 가진 듯했으리라.

이밖에도 전시관을 돌아보면서 눈에 띈 것이 유리창이다. 당시 유리창은 모두 단판 유리라 매서운 겨울을 넘기기 쉽지 않았을 것이기에. 혹시 ‘방풍실 같은 것이 있지 않았을까’해서 이리저리 알아보니 방풍실은 없었던 것 같다. 대신 겨울나기에 대한 대비가 책 <호박 목걸이>에 있었다. 그 내용을 옮긴다.

“겨울을 위한 준비로 덧문과 창문을 이중으로 만들고, 두꺼운 벽걸이와 양탄자로 온기를 보존하며, 가림막을 세워 난로로 데울 공간을 제한하여 열손실을 방지한다. 여름에는 열 수 있는 문이란 문은 모조리 활짝 열어젖히되 모기가 들어오지 못하게 방충망을 꼭 설치해야 하고 포치에는 덩굴 식물이 올라갈 수 있도록 대나무 기둥을 세워 그늘을 드리워야 한다.”

딜쿠샤의 내부 모습.
딜쿠샤의 내부 모습.

그리고 회고록에는 집주인인 메리 테일러가 나름 공간 활용에 신경을 쓴 부분도 있었다. 궁궐에서 하던 방식대로 병풍을 활용해 방 크기를 조절했다. 높이가 3m나 되는 열 폭 병풍을 이용해 임시로 벽을 만들어 방 크기를 늘렸다 줄였다 했다. 아마도 이 병풍은 겨울에 공기를 데울 공간을 제한하는 가림막 역할도 했을 것이다.

글쓴이

최성호 건축가

필자인 최성호는 오랫동안 한옥과 한국문화를 공부해온 건축설계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건축사다. 블로그도 운영하고 있다. 필자의 블로그 주소는 https://blog.naver.com/seongho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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