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통치’의 함정에서 어떻게 빠져 나올까?

[장은주의 시민을 위한 정치철학] 사법부에 대한 기대는 접어라 ‘민주적 헤게모니’를 제대로 구축해야 민주주의와 정의에 헌신할 시민들 나서야

지난해 10월 검찰이 더불어 민주당사를 압수수색하려 하자, 민주당원들과 시민들이 “정치보복 중단”을 외치며 압수수색 시도를 비판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지난해 10월 검찰이 더불어 민주당사를 압수수색하려 하자, 민주당원들과 시민들이 “정치보복 중단”을 외치며 압수수색 시도를 비판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윤석열 시대의 스산한 정치 풍경

검찰총장 출신이 대통령이 되더니 아니나 다를까 우리 정치의 풍경이 온통 법적 사안들로 채워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비리를 들추어내겠다며 시작했던 ‘서해 공무원 피살사건’ 관련 수사부터 ‘대장동 사건’을 고리로 한 이재명 민주당 대표 수사와 구속영장 청구에 이르기까지, 윤석열 집권 1년 가까이 법이 등장하지 않는 정치적 사건이나 뉴스가 드물었던 것 같다. 정신이 없을 정도다. 곳곳에서 압수 수색이 벌어지고 관련 인사들이 구속되며 기소된다. 대통령실이 앞장 서 아주 사소한 일로 언론과 야당 정치인을 고발하는가 하면, 심지어 최근에는 윤 대통령이 직접 만들었다는 ‘건폭’이라는 용어까지 써가며 건설노동 현장의 노동자들을 법으로 협박하고 있다.

아무리 정치와 법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는 해도, 이처럼 거의 모든 정치적 사안들이 법 문제로 귀결되는 시간들은 우리 정치사에 존재한 적이 없었다. 군부독재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검찰총장 출신 윤석열 대통령 시대, 법은 이제 총칼은 물론 정치를 대체하는 만능의 통치 수단이 되었다. 과거 독재자들은 총칼의 위협만으로는 부족했던지 정치를 조롱하고 시민들 사이에 정치혐오를 조장함으로써 독재체제를 유지하려 했었는데, 윤 대통령은 법치로 정치를 대체해 버림으로써 새로운 종류의 권위주의적 통치양식을 선보이고 있다. 아마도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것이다.

이미 어느 정도는 짐작했고 얼마간 예견된 일이기는 했다. 윤 대통령은 임기 초반 검사를 비롯한 법조인 출신들이 대통령실과 정부 요직을 독차지하는 일을 ‘법치국가에서는 당연하다’는 식으로 정당화했는데, 오랫동안 검찰에 몸담았던 그에게 ‘법치’는 처음부터 자신이 수행해야 할 정치의 다른 이름이었던 게다.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에게 대화, 설득, 타협 등을 통해 사회의 갈등 사안들을 조율하고 문제를 해결해 가는 정치를 기대한다는 건 애초부터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검사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던 순간, 이미 정치가 설 자리는 없었던 거다. 새삼 법치의 본성을 물어보게 된다.

사법은 정치를 구원할 수 있을까?

혹시 사법부는 다르지 않을까? 그래도 사법부는 일그러진 윤석열 식 ‘검찰통치’를 바로잡아 줄 수 있지 않을까? 검찰 법치가 정치를 삼켜버린 시대, 이런 기대를 해볼 만도 하다. 국회의 다수당인 민주당은 어쩌면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탄핵소추안을 가결하면서 은근히 이런 기대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는 우리 헌법이 정한 절차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해도, 결과적으로 헌법재판소의 사법적 판단에 정치의 운명을 맡기는 셈이 되었으니 말이다. 과연 사법은 정치를 구원할 수 있을까?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을 인용할까?

사실 많은 법률 전문가들은 탄핵안 인용이 쉽지 않을 거라고 보는 것 같다. 이상민 장관의 경우 예전의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탄핵 사건 판결에서 잣대로 제시했던 ‘중대한 위법 행위’를 저질렀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란다. 게다가 헌법재판소는 ‘무작위 전자배당’의 방법으로 이종석 헌법재판관을 주심으로 지명했다고 하는데, 공교롭게도(아니면 의도적으로?) 그는 윤석열 대통령과 대학 동기일 뿐만 아니라 국민의 힘 전신인 자유한국당 추천으로 헌법재판관이 된 이다. 처음부터 판결의 공정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난 2020년 새해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하는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왼쪽), 한동훈 반부패 ·강력부장(오른쪽). 가운데는 강남일 당시 차장검사. 사진=연합뉴스
지난 2020년 새해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하는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왼쪽), 한동훈 반부패 ·강력부장(오른쪽). 가운데는 강남일 당시 차장검사. 사진=연합뉴스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의 사법부나 헌법재판소는 민주주의에 우호적이거나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판결을 내린 적이 거의 없다고 해야 한다. 수도 없는 예가 있지만, 최근 조국 전 법무부장관 가족 관련 판결이나 곽상도 전 의원 아들 50억원 퇴직금 수수 사건 등에 대한 판결만 보면 된다. 헌법재판소도 마찬가지다. 참여정부 시절 ‘수도 이전’을 하겠다는 민주적 정치과정의 결정을 ‘관습헌법’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대며 무효화시켰던 판결을 떠올려 보라.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은 또 어떤가? 헌법재판소나 사법부는 그 동안 기본적으로 정치 관련 사건들에 대해 정치적 상황이나 여론의 동향 등을 보며 매우 정치적으로 판결을 내려왔다고 해야 한다. 민주진영에 유리해 보이는 판결조차 이런 배경 위에서 이해해야지 그것이 무슨 사법부의 양심에 따른 결과일 거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 민주주의는 단순히 의회의 다수결주의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기본권을 성문화된 헌법을 통해 보장하는 ‘입헌 민주주의’다. 이런 체제는 민주적으로 구성된 의회의 입법이나 결정이라도 그것이 시민들의 기본권을 침해하지는 않는지, 또 적법성과 합리성을 기대할 수 있는지에 대해 사법부(우리나라의 경우 헌법재판소)가 ‘심사’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동안의 경험을 돌이켜 보면,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이런 교과서적인 법치국가적 민주주의 이념은 실현되기 힘든 공허한 이상일 뿐이었다고 해야 한다. 현실에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소수의 법조 엘리트들이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사법통치(juristocracy)’에 속수무책이었다.

사실 이는 우리나라만의 문제라고 하기는 힘들다. 최근 트럼프 전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들이 주도하는 미국 연방대법원이 주(州)의 낙태 금지조치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던 사건만 봐도 그렇다. 뿐만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사법부는 ‘다수의 전횡’을 막는다는 미명 하에 특히 노동권을 신장하고 복지를 증진시키는 일과 관련한 많은 민주적 결정들을 방해해 왔다. 이런 맥락에서 법치는,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에서도, 그 본성상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 모른다.

우리나라의 상황은 더 악성이라고 해야 한다. 법치, 곧 법의 지배(rule of law)라는 이념은 서구에서 애초 역사적으로 왕이나 독재자의 자의적 인치(人治)에 대한 대안으로서 모든 시민을 평등하게 존중하는 민주적 정의를 실현하자는 이상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아마도 법을 통치수단으로 이해했던 오랜 법가(法家)적 전통과 식민 통치의 영향 때문에 그런 ‘법의 지배’로서의 법치에 대한 이념보다는 권력자나 엘리트들이 행사하는 ‘법을 수단으로 한 지배/통치(rule by law)’로서 법치를 이해하는 관점이 계속해서 법조 엘리트들을 사로잡아 온 것 같다. 법은 기본적으로 권력 엘리트의 통치수단이었던 것이다. 이런 인식은 행정부에 속하면서도 스스로를 준사법기관이라 칭하고 자의적인 수사권과 기소권을 휘두르며 우리 사회의 최고 권력 기관으로 군림해 왔던 검찰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사법부도 마찬가지였다고 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우리의 입헌민주주의는 기껏해야 외형만 그럴듯한 어떤 ‘사이비’에 불과했다.

윤석열 정부의 ‘검찰통치’는 바로 이런 사법통치의 한국적 변형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 만큼 사법부에 대한 기대는 처음부터 접는 게 옳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했다. 윤석열 행정부와 (헌법재판소를 포함한) 사법부는 그 본성상 한 통속일 수밖에 없다. 사법부 엘리트들도 삶의 조건과 이데올로기적 배경 모두에서 윤석열 정부가 대변하는 우리 사회 기득권 세력의 일원일 뿐이다. 특히 검사들과 판사들은 인맥과 학연으로 단단하게 얽혀 있기도 하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사법부가 시민들의 기본권에 대한 최종적 수호자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이상을 견지하려는 판사들이 아예 없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사법은 결코 정치를 구원할 수 없다고 해야 한다.

민주주의만이 법치를 구원할 수 있다

다른 길은 없을까? 다시 이상민 장관 탄핵소추안 이야기로 되돌아 와 보자. 민주당이 믿을 구석이 있다면, 그것은 헌법재판관들의 무슨 양심 같은 게 아니라 진상이 온전히 규명되고 책임자들이 처벌받기를 바라는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의 처절한 호소와 그에 대한 시민들의 깊은 공감과 지지다. 그렇다면 민주당은 가령 광화문에 설치된 참사 희생자 분향소를 어떻게든 지켜내는 일에 매진하면서, 참사에서 확인된 시민들의 허탈감과 분노를 제대로 정치화 해 낼 수 있어야 한다.

민주당의 일상적인 정치적 기조와 실천도 바뀌어야 한다. 정치가 질식사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민주당은 끊임없이 시민들의 민주적 각성과 공감을 유도할 수 있는 아젠다를 발굴해서 광범위한 시민들의 굳건한 지지를 얻어낼 수 있게끔 정치화하는 데서 소홀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에너지 요금 폭등 때문에 신음하는 저소득층과 자영업자들이라든가 윤석열 식 법치-통치의 협박 때문에 노예적 생존을 강요당하고 있는 건설 노동자들처럼 민주당이 손을 내밀고 보듬어야 할 시민들이 너무 많다. 민주당은 막연한 구호나 입바른 소리로서만이 아니라 시민들의 피부에 가 닿을 구체적인 실행을 통해 민주 정치의 힘을 보여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광범위한 시민들의 지지에 기초한 ‘민주적 헤게모니’가 구축될 때, 그 때에야 사법통치는 비로소 고개를 숙일 것이고 법치도 제 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근본적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사이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좀 더 올바른 민주적 헌정체제로 개혁해야 한다. 여기서는 사법이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길을 최대한 차단할 뿐만 아니라, 툭하면 정치적 사안들을 사법적 절차로 풀어보려는 ‘정치의 사법화’ 경향도 최소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선거제도와 헌법, 나아가 정치문화까지 근본적으로 바뀔 때만 가능하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민주당이 정치개혁을 위한 노력을 중단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물론 지금 민주당으로서는 일단 눈앞의 숙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국회의 과반 이상 의석을 가진 민주당은 지금 윤석열 식 ‘법치-정치’가 쳐 놓은 함정에 빠져 벗어날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검찰은 예견된 대로 온갖 엉터리 명분을 갖다 대며 이재명 대표에 대한 구속 영장을 청구했고, 민주당은 지금 체포동의안을 부결시켜야 한다는 과제 앞에 놓이게 되었다. 물론 이 체포동의안은 일단 부결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쉽게 해소되지 못할 것임도 분명하다.

불체포특권을 포기하라는 국민의힘 쪽의 압박 같은 거야 으레 그러려니 해도, 이른바 ‘사법 리스크’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는 당내 일각의 비판 목소리와 검찰과 한통속이 된 언론의 보도에 큰 영향을 받는 부정적 여론을 다독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틀림없이 검찰은 또 다른 사안으로 다시 구속영장을 청구할 것인데, 몇 번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민주당으로서는 매번 체포동의안 부결로 응답하는 게 여러모로 힘에 부치는 일이 될 것이다. 윤석열 검찰은 꽃놀이패를 쥐고 있고, 민주당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인 것 같다.

다양한 이야기가 나온다. 답답해서 해 보는 생각이지만, 민주당이 뻔히 그 수가 보이는 윤석열 식 사법-정치의 함정을 오히려 거꾸로 이용하는 건 어떨까 싶기도 하다. 이재명 대표가 어느 시점에서 체포동의안 표결을 스스로 사양하고 당당하게 영장실질심사에 임하라는 이야기다. 얼핏 국민의힘 쪽에서 하는 주장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그런 주장을 수용하는 게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일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공은 사법부로 넘어갈 텐데, 우리 사법부는 바로 그 본성적인 정치성 때문에라도 쉽게 제1야당 대표에 대한 구속 영장을 발부하지 못하지 싶다. 사실 검찰의 영장 청구 논리에는 억지도 많고, 이재명 대표 주장처럼 증거인멸이나 도주의 우려도 전혀 없어 보이니 말이다.

물론 사법부의 정치적 본성을 다르게 생각하면, 이재명 대표가 진짜 구속되고 민주당이 대혼란에 빠지는 상황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어 보인다. 그래서 저런 수가 무슨 ‘정답’이 될 수는 없다. 마키아벨리라면 이런 상황에서 정치 지도자의 ‘비르투(탁월함: 역량과 덕성)’를 주문했을 것이다. 오늘날 그 비르투는 사회의 불의에 분노해서 얼마간 자신의 일상을 희생해서라도 기꺼이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 보통의 시민들과 함께 하는 데서만 획득되고 발휘될 수 있다. 어떻게든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의 시간이 오도록 만들어야 한다. 건투를 빈다.

글쓴이

장은주 영산대 교수

장은주는 영산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정치철학자다. 어떻게 하면 한국 민주주의가 좀 더 안정되고 성숙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필요한 철학적 인식을 다듬는 게 주된 관심사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괴테 대학에서 ‘비판사회이론’을 공부해서 학위를 받았는데, 한국 사회의 고유한 삶의 문법과 발전 동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독자적인 이론을 만들고 싶어 한다. 최근에는 시민들의 민주적 역량 함양을 위한 민주시민교육에 관심이 많다. <인권의 철학>, <정치의 이동>, <유교적 근대성의 미래>, <시민교육이 희망이다> 같은 책을 썼다. 최근에는 우리 사회의 능력주의적 공정 담론을 비판적으로 해부하고 ‘민주적 평등주의‘라는 대안을 제시한 <공정의 배신>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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