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개 족벌(族閥)이 국가 30% 차지하는 나라
[김영주의 ‘유럽에 대한 한국인의 오해’] 발렌베리家 찬양했던 한국언론의 무지 ‘네오 나치’가 정당 활동하는 스웨덴 발렌베리, 독일-연합국 양다리 걸쳐 번영 국가가 지나치게 의존...반면교사되어야
작년 5월에 스웨덴과 핀란드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 신청서를 제출했다. 스웨덴의 좌파연합 막달레나 안데르손 내각은 군사중립국을 포기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작년 10월 총선에서 우리로 치면 ‘태극기부대’ 격인 스웨덴민주당(SD)이 원내 제2당으로 약진하며, 우파 연합 내각이 출범했다. 신임 울프 크리스텐손 총리도 나토 가입 기조를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찍이 스웨덴이 이렇게 한쪽으로 치우쳤던 적은 없었다.
발렌베리 가문의 등장
스웨덴이 오늘날처럼 유럽의 약소국이 된 것은 1809년 핀란드 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에게 패배한 뒤부터다. 이 전쟁의 대가로 스웨덴은 핀란드를 잃었고, 왕조까지 교체되었다. 1864년 프로이센과 벌인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은 스웨덴이 약소국이라는 것을 또다시 유럽에 증명해준 사건이었다. 프로이센의 철혈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혜성처럼 등장했던 이 전쟁에서 스웨덴은 아무런 국제적 행동도 시도하지 못했다. 스웨덴은 적극적인 중립국이라기보다는 타의에 의해 자연스럽게 완충국으로 존재하는 나라가 되었다.
이 혼란기를 거치며 ‘스웨덴의 삼성’ 발렌베리(Wallenberg) 가문이 스웨덴을 장악한다. 아버지가 린셰핑 대주교였기에 부유했던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는 미국 체류 시기인 1837년 경제 공황을 목격한다. 1830년대까지 미국의 자본가들은 목화를 담보로 영국 은행들로부터 받은 대출로 서부를 개척하고 있었는데, 목화 가격 급락과 영국의 대출 제한으로 미국 850개 은행 중 343개가 문을 닫았던 것이다.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는 스웨덴으로 돌아가 37살의 나이에 신분제 지역의회(Ståndsriksdagen) 의원이 된다. 그는 토호들이나 장사꾼들과 인맥을 쌓았고, 1857년에는 스톡홀름 개인은행을 설립했다. 그는 경제공황을 거울삼아 사채 발행이 아니라 예금으로 자금 조달을 하는 개인은행을 기획했고, 우편환이나 무이자 약속어음을 소개하면서 스웨덴 금융시장의 총아로 떠올랐다. 그는 당대의 철도 건설 붐에 투자해 1864년에는 스웨덴 최초의 은행 주식회사인 스칸디나비아 신용유한회사까지 설립하게 된다.
일상적이었던 빈곤
19세기 후반 스웨덴의 연대기에는 극심한 빈곤과 대이민 기록이 점철되어 있다. 대다수의 유럽인들도 이 시기까지 빈곤의 나날을 보냈지만, 스웨덴의 가난의 역사는 눈에 띈다. 스웨덴에는 적어도 13세기부터 ‘로테공(Rotegång)’이라는 농촌공동체 관습이 있었다. 교구가 관리하는 빈민구제책인데, 6가구가 1로테(rote)로 묶여 빈민가정이 그 안을 돌며 숙식을 해결하는 관습이었다. ‘파티가욱훈(fattigauktion)’은 말 그대로 ‘빈자경매’인데, 1년 단위로 교구 안에서 노동력으로 활용할 빈자를 경매하던 관습이었다.
당시 스웨덴은 키루나 철광을 중심으로 산업화가 시작되었지만, 인구의 거의 90%는 최소한의 공간에서 최소한의 난방으로 영양실조 속에 살았다. 1918년에서야 ‘아동경매’가 금지되었지만, 스웨덴이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 고아들을 많이 입양했던 것도 ‘빈자경매’ 문화가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었다는 반증일 수 있다. 얼마 전 온라인에서 이야깃거리가 됐던 ‘스웨덴 게이트’도 이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1867년의 기록적인 흉년은 ‘대흉년(Storsvagåret)’이라고 부른다. 밀가루 1/3과 이끼 2/3로 껍질빵과 죽을 만들어 먹으며 버텼기 때문에 ‘이끼의 해(Lavåret)’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후 3년을 ‘유산의 시대(Missväxtåren)’라고 부르는데, 아이 유산이나 미성숙아가 많았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에는 전체 인구의 1/5인 약 100만 명이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심정으로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독일의 협력업체라는 운명
스웨덴은 북독일연방 시절부터 경제가 성장하던 독일의 협력업체로 산업화를 시작했다. 통일된 독일제국이 1880년대에 회사난립시대에 들어서고 본격적으로 유럽의 공장이 되면서, 스웨덴의 산업화도 가속이 붙었다. 은행가들과 정치인들은 1911년에 은행법을 개정해 금산분리를 없앴고, 1916년에 금산복합 지주회사 인베스터 AB를 설립해 스웨덴 기업들과 독일 투자의 창구로서 자금 흐름을 장악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마자 스웨덴은 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스웨덴 중앙은행 외환보유고의 대부분은 독일 국채였다. 대륙의 교전국들은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스웨덴에서 군화부터 식품 및 철강까지 수입하게 되었고, 이 시기에 만성적인 대독일 적자가 해소되었다. 스웨덴의 수출량은 1910년에서 1915년 사이에 50% 증가 후 약간 감소하는 정도였지만, 가격 상승 호재로 같은 기간에 무역흑자는 300%나 증가하면서 대독일 적자를 해소한 것이다.
그러나 1916년부터 서부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졌고, 영국의 해상봉쇄는 기정사실이 됐다.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중립국 선박들을 공격하면서 스웨덴은 독일로부터 코크스와 석탄은 물론 곡물 수입까지 막혔다. 경제 규모가 작고 독일 경제에 의존도가 높았던 스웨덴은 호황도 빨리 왔지만, 불황도 빨리 왔다. 결국 스웨덴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딱히 얻은 것이 없었다.
‘양다리 중립’이 가져온 번영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을 때, 야코브가 발렌베리 가문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스웨덴-독일 무역협상과 스웨덴-영국 무역협상에 참여하면서, 적극적으로 양쪽을 돕는 중립을 모색했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의 어정쩡한 중립은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은밀히 양쪽 모두를 고객으로 두었다.
지금은 발렌베리 가문 계열사들이 스웨덴 GDP의 1/3 정도만 차지하고 있지만, 당시엔 발렌베리 가문이 곧 스웨덴이었다. 나치 독일이 집권하고 재무장을 시작한 1933년부터 6년동안 협력업체 스웨덴은 호황을 맞는다. 선진국 평균의 80% 불과했던 스웨덴의 1인당 GDP는 이 시기를 거치며 거의 95%까지 육박하게 된다.
스웨덴은 나치 독일이 노르웨이를 침공할 때 철도를 빌려주었고, 키루나의 철광석을 노르웨이 나르비크 항구를 거쳐 나치 독일의 군수 산업에 공급했다. 발렌베리 가문의 장기인 금융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이 소유한 통신사 에릭슨, 볼베어링의 SKF, 볼보와 사브의 전투기와 군용 차량 엔진 등이 나치 독일을 위해, 그리고 나중엔 영국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이 때문인지 현재 스웨덴은 네오 나치가 정당으로 까지 발전한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가 됐다.

삼성도 한때 공부했던 발렌베리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스웨덴도 경제 침체를 겪지만, 다른 나라들에 비한다면 경미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미국과 서유럽을 살린 한국전쟁 호황이 스웨덴에게는 완전히 선진국의 지위를 안겨주었다. 스웨덴은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스웨덴 기업들은 전범기업으로 분류되지 않았다. 발렌베리 가문이 전범기업 보쉬를 위해 명의수탁까지 했던 보쉬 사건(Boschaffären)이 터졌지만, 어찌된 일인이 영국의 비호로 흐지부지 되었다.
2003년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으로 골치를 썩던 고(故) 이건희 회장이 경영 및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과 논의하러 스웨덴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우리 언론은 발렌베리 가문에서 두 명만 경영에 참여한다며 찬양했지만, 그들이 절세를 위해 3개의 재단으로 쪼개 재산을 관리하는 비상장회사 FAM AB와 투자은행 인베스터 AB를 갖고 있는 것이나, 소유권 방어의 무적 스킬인 ‘황금주(gyllene aktie)’를 갖고 있는 것에는 침묵했다. 한국엔 태평양전쟁 기간에 미국과 일본제국에 양다리를 걸칠 만큼 이렇다할 기업도 제대로 없었다. 금산분리 원칙이 살아있고, 재벌을 보는 국민들의 감시도 여전해 한나라의 1/3을 차지하는 발렌베리 가문 같은 기업은 나올 수 없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