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하루아침에 몰락할 수도 있다
[장은주의 시민을 위한 정치철학] 도덕성 내세우던 86세대 ‘돈봉투’ 돌리다니 안일한 대응도 실망...’국민의힘’을 믿나? 1백년전 영국 자유당 몰락 ‘타산지석’ ‘소확행’ 따위 대신 근본적인 혁신 나서야
거대 양당의 적대적 공생관계
한국 정치에 놀랍지만 꽤 익숙해 보이기도 하는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전당대회 동안 이른바 ‘컨벤션 효과’로 상승세를 타던 국민의힘 지지율이 윤석열 대통령의 친일 행적과 ‘친윤’ 지도부의 어처구니없는 언행 때문에 하락하고 민주당 지지율이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터였다. 그런데 갑자기 2021년 민주당 대표 선거 때의 ‘돈봉투 사건’이 불거졌다. 누구라도 이 사건 역시 ‘검찰정치’의 일환일 것으로 생각할 법한데, 이정근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단순히 그런 식으로만 접근할 일은 아니라는 게 분명해지고 있다. 민주당이라도 제대로 된 역할을 해서 윤석열 검찰통치의 무능과 폭주를 견제해야 하는 이때,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지도부의 안일한 대응은 더 놀랍다. 아무리 적은 액수라도 민주주의를 정체성으로 내세우는 당의 대표 선출 과정에서 돈봉투가 오고 간 심각한 문제인데, 지도부는 송영길 전 대표에게만 모든 문제를 전가하는 듯 하는가 하면, 기껏해야 대의원들 밥값 정도여서 큰 문제가 아니라는 투의 이야기나 흘리고 다닌다. 국민의힘 부패 사건들을 피장파장 식으로 끌고 나오는가 하면, 당 혁신 방안이랍시고 전당대회에서 대의원의 비중을 축소하는 문제 따위나 꺼내고 있다. 가련한 의제 바꾸기를 통해 대충 사태를 얼버무려 넘어가 보겠다는 건데, 그저 한심하고 답답할 따름이다.
내가 볼 때 민주당은 지금 절체절명의 위기 상태다. 우리 유권자들은 국민의힘 부패 문제에는 관대할 지 몰라도 민주당에겐 그렇지 않다. 형평성이 아쉽겠지만, 국민들이 민주당에겐 더 엄정한 도덕성을 기대하는 탓이다. 이는 사실 민주당 정치인들이 도덕성을 정치적 자산으로 내세워 왔던 탓도 크다. 옳고 그름을 떠나 민주당이 스스로 쳐놓은 이 ‘도덕정치의 덫’이 지닌 현실정치적 무게는 결코 가벼운 게 아니다. 송 전 대표도 전형적인 86세대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 청렴하고 정의로운 이미지를 내세워 정치적으로 성공했더랬다. 이런 86세대 정치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민주당이 당대표를 뽑으면서 돈봉투나 돌렸다는 사실은 전형적인 ‘내로남불’이고, 특히 중도층을 중심으로 유권자들로서는 큰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음이 틀림없다. 만약 대안만 있다면, 유권자들은 민주당에 완전히 등을 돌릴지도 모른다.
물론 민주당은 믿는 구석이 있다. 한국 정치의 양당제가 구조적으로 만들어 낸 적대적 공생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우리 정치에서 민주당과 국민의힘 두 당은 이런 공생관계 덕분에 잘하는 게 하나 없어도 기득권을 유지하며 교대로 정권도 차지해왔다. 서로 죽으라고 물어뜯으며 ‘다른 수단에 의한 전쟁’이 된 정치를 하면서도, 양당은 사실은 다른 당의 존재를 자신의 존재 이유로 삼는다. 상대를 절멸시켜야할 적으로 여기지만, 다른 당이 진짜 죽으면 자기 당도 죽을 것임을 안다. 서로 ‘누가 못하나?’를 경쟁해도 상대를 기피하고 미워하는 유권자들이 결국은 자기편을 용서해 줄 거라고 믿는다. 여기서 영, 호남 지역은 각 당의 정치적 생존을 위한 최후의 보루다. 민주당은 이번에도 이 공생관계의 힘을 믿고 있는 듯하다.
민주당, 영국 자유당의 몰락에서 배우라
한국 민주주의의 비극은 이런 식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해체하려고 했던 지금까지의 모든 정치적 시도가 실패했다는 데 있다. 선거 때마다 제3 세력이나 제3당이 나타나곤 했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한국 정치의 이런 ‘구조적 악’을 낳은 소선거구제 중심의 선거제도를 개혁하자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역시 거대 양당의 미적거림과 방해 때문에 늘 좌초됐다. 이번에도 양당은 국회 전원위원회를 여는 등 변죽 소리는 크게 냈지만, 사실은 선거제를 제대로 개혁하겠다는 의지가 없음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어쨌든 민주당은 윤석열 정부의 실정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와 실망이 이번 돈봉투 문제도 어떻게든 덮어주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리고 내년 총선에서 국민들의 정권 심판 의지에 힘입어 어떤 경우에도 다시 민주당이 압도적 의석을 차지할 수 있지 않겠냐고 기대하는 모양이다. 의원들은 의원들대로 어떻게든 공천을 받아내기 위해 누구에게 줄을 서야 유리할지만 재는 형국 같다. 그렇지 않고는 이 엄청난 사건이 터졌는데도 제대로 된 성찰과 혁신을 입에 담는 정치인이 눈에 띄지 않는 이런 상황을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내가 볼 때 민주당 정치인들은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다. 1세기도 더 지난 일이지만, 영국 자유당의 몰락 과정이 떠올라서다. 영국은 우리처럼 소선거구제를 택하고 있다. 영국 자유당의 몰락 과정은 이 소선거구제가 정치에서 얼마나 괴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휘그당’에서 출발했던 영국 자유당은 거의 150년을 보수당과 함께 영국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을 이끌었던 중추 정당이었다.
수차례 집권했으며, 많은 역사적 성취도 남겼다. 이 당은 1906년 총선에서 겨우 157석 밖에 얻지 못했던 보수당을 누르고 무려 400석을 차지하는 압도적 승리를 이루며 집권했다.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이 180여석을 석권했던 일과 비교된다. 그러나 그러던 영국 자유당은 1924년 보수당이 419석을 얻었던 선거에서 불과 40석밖에 얻지 못하면서 극적으로 몰락했다. 물론 영국 자유당은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그 정치적 위상은 미미하기만 하다. 혹시 우리 민주당의 미래는 아닐까?
자유당이 몰락하던 1924년 선거에서 새로 부상하던 영국 노동당은 151석을 얻어 자유당을 압도했고, 이후 결국 자유당의 자리를 완전히 대체해 버렸다. 우리나라의 진보 진영은 바로 이런 영국 노동당을 모델로 ‘민주노동당’을 창당했더랬다. 물론 우리 민주노동당은 한때의 정치적 돌풍에도 불구하고 영국 노동당처럼 성공하지 못했고, 그 당을 잇는 진보 정당들은 안타깝게도 지금은 지리멸렬한 상태다. 그래서 정의당은 독일 모델에 눈을 돌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확대함으로써 존립 기반을 확보하려고 시도해 왔는데, 다들 아는 대로 그 시도 역시 처절하게 실패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영국 자유당이 몰락하듯이 민주당이 몰락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다르다.
그동안 많은 학자들은 20세기 초 새롭게 성장한 노동계급의 정치적 진출이 영국 노동당의 성공과 자유당의 몰락을 설명할 수 있다고 설명해 왔다. 우리 진보 진영도 이런 식의 이해를 바탕으로 ‘노동당 모델’을 쫓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해석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최근에는 영국의 자유당이 당내 분열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시대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는 등의 이유로 사실은 ‘자멸’하고 말았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영국 자유당의 몰락을 위해 꼭 노동당 같은 진보 정당이 성장해야 했던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보더라도 몇 년 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안철수 돌풍’이 일었을 때 그의 ‘국민의당’은 특히 호남에서 민주당 대신 의석을 거의 싹쓸이했고 비례대표 지지율에서도 민주당을 능가했더랬다. 당시 이 당의 ‘새 정치’ 구호나 이념적 위상이 애매했고 박근혜 정부의 실정을 견제해야 한다는 시민들의 위기의식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민주당에 좀 더 큰 힘을 실어줬기 망정이지, 자칫 이미 그때 민주당이 몰락했을 수도 있다. 이런 유사한 일이 반복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소선거구제는 민주당에게 180석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민주당을 순식간에 소수 정당으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 아무리 유권자들의 정권 견제 심리가 강하고 야권 분열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해도, 민주당이 지금처럼 계속 유권자들의 신뢰를 잃어가면 새로운 정당의 출현은 거의 필연적이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그 당이 대안이다 싶으면 유권자들은 그 당에 표를 몰아줄 것이고, 그러면 민주당은 끝나고 말 것이다. 최근의 여론 조사를 보면 민주당과 국민의힘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는 무당층이 30% 이상이라고 하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을까? 아마도 이런 배경에서 금태섭 전의원과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제3당을 추진하겠다고 나선 것일 터다.
민주당, 근본적 혁신만이 살길이다
물론 그 신당이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렇다고 민주당에게 꽃길이 보장되어 있지는 않다. 역동적인 한국 정치에서 앞으로 1년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민주당 ‘바깥’이 아니라 ‘안’에 있다. 지금처럼 민주당이 당내 계파 갈등을 제대로 처리하지도 못하고 돈봉투 사건 같은 문제 앞에서 환부 도려내기를 미적거리기만 한다면, 민주당의 미래는 암담할 것이다. 게다가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 문제도 또다시 언제 어떤 방식으로 재발할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너무 뻔한 상투어 같지만, 근본적 혁신 말고는 다른 해법이 있을 수 없다. 전당대회에서 대의원의 비중을 낮추는 차원의 얄팍한 접근 말고(그게 필요할 수도 있다), 좀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부터 민주당을 뜯어고쳐야 한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이후에도 당을 혁신한다며 부산을 떨었지만, 많은 시민들은 민주당이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고 한다. 이념이나 정강정책은 물론이고 주요 인물들이 사실상 똑같기 때문이다. 다른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민주당이 무엇을 하려는 정당인지에 대한 이념적 정체성부터 새삼 분명히 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영국의 자유당은 전통적인 ‘고전적 자유주의’ 이념에 안주하려던(오늘날의 신자유주의에 가까운) 세력과 많은 새로운 진보적 의제를 수용하여(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운) ‘새로운 자유주의’를 지향하던 세력 사이의 갈등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탓에 결국 몰락하고 말았다. 민주당에게 결코 남의 일이 될 수 없다. 이념과 정치 노선의 혁신부터 시작해야 한다.
민주당은 호남의 지역주의에 안주하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단지 수도권의 의석수가 압도적으로 많아서가 아니다. 민주적 진보개혁 정치가 응답해야 할 우리 사회의 모순들과 병리들을 제대로 짚어내면서 필요한 해법들을 찾아내서 유권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표와 바꾸려 했던 무슨 ‘소확행’ 따위가 아니라, 우리 사회와 시대의 근본적인 요구에 제대로 부응할 수 있게끔 지혜를 모아야 한다.
물론 다른 차원의 혁신도 해야 한다. 반드시 좋은 모범인지는 모르겠지만, 문재인 전대통령이 당 대표 시절 총선을 앞두고 김종인 비대위원장 체제를 출범시킨 일이 떠오른다. 외부 인사를 영입해서 제법 신선한 방식으로 당을 재정비했더랬는데, 그 과정이나 성과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더라도 그 방식만은 참고할 만하다. 요점은 그런 선례를 그대로 모방하라는 게 아니라 최소한 그런 정도의 개혁 진정성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민주당을 위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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