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은 어떻게 석파정(石坡亭)을 빼앗았나

[최성호의 사람 사는 건축] 석파정 이야기① 당시 세도가들 사이에 별장짓기 붐 대원군의 꼼수? 고종 행차 유도해 해방 이후 쌍용그룹 총수 별장으로도

육모정이 있는 맞은 편 언덕에서 본 석파정. 사랑채, 안채, 별채 모습이 보인다
육모정이 있는 맞은 편 언덕에서 본 석파정. 사랑채, 안채, 별채 모습이 보인다

사대부들의 별장 ‘별서’에 대해

조선시대 사대부의 정원을 ‘별서’라고 한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져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는 곳은 얼마 되지 않는다. 현재 남아있는 별서로는 소쇄원(瀟灑園), 명옥헌(鳴玉軒) 등이 있으며 송시열이 낙향하여 지낸 남간정사(南澗精舍)도 있다. 그 외에도 몇 있지만 어쨌든 최고의 정원은 궁궐 안에 있고, 그 다음으로 유명한 곳도 다 서울에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현(成俔·1439~1504)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한양 도성 주변에 경치 좋은 곳을 언급했는데, 그는 “한양성내에서 삼청동(三淸洞), 인왕동(仁王洞, 현재 옥인동주변), 쌍계동(雙溪洞, 현재 성균관 주변), 백운동(白雲洞, 현재 청운동), 청학동(靑鶴洞, 현재 남산 한옥마을부근)을, 성 밖으로는 장의사(藏義寺) 앞 시내가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장의사는 현재 세검 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절로 장의사지 당간지주가 세검 초등학교 마당 한구석에 있어 과거 절이 있었음을 확인해준다.

성현이 ‘성내 경치 좋다’고 언급한 삼청동에는 훗날 김조순(金祖淳, 석파정을 조성한 김흥근의 당숙)이 조성한 옥호정(玉壺亭)도 있었다. 장의사지 쪽은 워낙 경치가 좋다보니 연산군이 탕춘대(蕩春臺)라는 정자와 함께 이궁을 지어 놓고 즐겼던 곳이다. 성현의 기록처럼 지금 창의문(彰義門/자하문紫霞門) 밖은 경치가 좋기로 유명해 조선시대 화가들도 이곳 경치를 많이 그렸다. 이때문에 조선 초부터 별서가 자리 잡았다.

성문 밖에는 안평대군의 별서인 무계정사(武溪精舍, 서울유형문화재 제22호), 백석동천(白石洞天, 명승 제36호), 김흥근(金興根, 1796~1870)이 조성한 석파정(石坡亭, 서울유형문화재 제26호)이 있다. 무계정사는 바위에 새겨진 글만 남았고, 백석동천은 별서 터만 남은 반면, 석파정은 일부는 변했지만 시설 대부분이 남아있어 당시 정취를 감상할 수 있다.

석파정이 위치한 곳. 사진=네이버지도 캡쳐
석파정이 위치한 곳. 사진=네이버지도 캡쳐

영정조 시대 ‘세도가의 사치’

지금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해 있는 ‘석파정’을 김흥근이 조영할 때는 한양에 별서를 만드는 것이 유행했던 때인데, 조선후기의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있다. 왜(倭)와 중국은 임진란 이후 150년 동안 교역을 하지 않았다. 이들 나라가 직접 교역이 가능해진 시점이 1747년(영조23년)이다. 임진란이 일어난 1592년과 1747년 사이 150년 동안 조선은 중국과 왜 사이에서 중계무역으로 많은 이익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이때 획득한 부 덕분에 영정조 시대의 르네상스가 가능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렇게 축적한 부는 사대부의 삶도 바꿔놓았다. 경화사족(京華士族) 또는 경화세족(京華世族)으로 불리는 명문가들이 엄청난 사치를 누리고 살았다고 한다. 정조이후 순조 때부터 생겨난 세도정치(勢道政治)로 이런 세족들 중 몇몇 가문에 권력과 부가 집중됐고 이들 가문은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사치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런 부의 과시 중 하나가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대규모 ‘별서’를 짓는 것이었다. 앞서 말한 김조순(金祖淳, 김흥근의 당숙)이 조영한 옥호정, 김흥근이 조영한 석파정, 백석동천, 이강공의 별서였던 성락원(城樂園) 등은 1800년대 만들어진 별서들이다.

석파정은 석파정 바위에 새겨진 ‘삼계동(三溪洞)’ 글씨처럼 ‘삼계동’이라 불렸고, 정사를 조영한 김흥근은 이를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라고 불렀다.

겸재 정선이 그린 창의문(자하문) 풍경. 석파정은 창의문 아래쪽에 위치했다
겸재 정선이 그린 창의문(자하문) 풍경. 석파정은 창의문 아래쪽에 위치했다

석파정에 대한 최초 기록은 1721년에 나타난다. 석파정에 들어가 처음 보이는 넓은 암석에 ‘소수운렴암(巢水雲簾菴, 물에 둥지를 틀고 구름으로 발을 삼은 집)’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그 옆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있다.

寒水翁書贈 友人定而時 한수옹이 벗 정이에게 바친다

辛丑歲也 때는 신축년이다.

한수옹(寒水翁)은 숙종 때 문신인 권상하(權尙夏, 1641~1721)를 이르는 것이고 정이(定而)는 조정만(趙正萬, 1656~1739)을 지칭한다. 둘 다 송시열의 제자로 노론에 속했다. 이후 석파정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 소유권이 어떻게 김흥근에게 넘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 초창기 별서의 규모도 알 수 없다.

이곳을 지금과 같은 별서로 조영한 것은 김흥근(金興根, 1796~1870)이다. 김흥근이별서를 조성한 시기는 아마도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에 오른 1851~2년쯤에서 <유북한기(遊北漢記)>에 기록이 나오는 1858년 사이가 아닐까 추측한다. 그러면 김흥근의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가 언제 대원군의 호에서 따온 ‘석파정’이 됐을까?

석파정 초입인 소수운렴암 쪽에서 바라본 석파정 주변 풍광
석파정 초입인 소수운렴암 쪽에서 바라본 석파정 주변 풍광

임금이 행차하는 바람에

‘삼계동정사’가 대원군 소유로 변경된 이야기는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있다. <매천야록>에는 갑자년(1864년)에 있었던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김흥근이 북문 밖 삼계동에 별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대원군이 그 별장을 팔라고 청했지만 김흥근이 듣지 않자, 다시 청했다. “하루만이라도 노닐게 빌려주시오.” 김흥근이 마지 못해 허락하자 대원군이 임금(고종)에게 권하여 행차하게 하고 자기도 따라갔다. 김흥근은 임금이 머물던 곳에 신하가 다시 머물 수 없다고 하여 다시는 삼계동정사를 찾지 않았다. 이에 이것은 운현궁(대원군) 소유가 되었다.(매천야록/갑오년전/대원군이 김흥근의 별장을 빼앗다)

그러나 소치 허련(許鍊)이 쓴 <소치실록>에는 석파정이 대원군 소유가 된 과정 대신에 1866년 사월초파일(4월8일) 김흥근과 함께 소치가 삼계동에 가서 한달 이상을 묵은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이미 대원군에게 빼앗겼다고 한 <매천야록>의 기록과는 다르다. <소치실록>은 소치가 직접 쓴 것이니 정확하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1866년(고종 3년) 이후에 대원군 소유가 됐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리고 1867년(고종 4년) 8월 30일 승정원일기에 “탕춘대(蕩春臺)에 친림하는 상시사(賞試射) 때의 행전(行殿)은 삼계정(三溪亭)으로 하라”는 전교와 9월 20일에 “대가가 삼계정(三溪亭) 행궁(行宮)에 가서”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삼계동정사’가 행궁이 된 것이다. 임금이 머무르면 행궁이 되니 김흥근이 소유를 포기한 것이 아닐까 한다.

'성 콜롬바 병원'으로 사용되던 당시의 석파정. 사랑채 옆에 석파랑으로 이건 된 별당이 보인다
‘성 콜롬바 병원’으로 사용되던 당시의 석파정. 사랑채 옆에 석파랑으로 이건 된 별당이 보인다

쌍용그룹에 갔다가 가톨릭 병원으로도

석파정은 흥선대원군 가의 소유가 됐다. 이후 약 50년간 후손들에게 물려졌다. 윤치호의 기록에 의하면, 후손들이 이를 유지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1904년 10월 28일 윤치호 일기에는 “삼계동에 계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뵈러 갔다. 창의문 밖의 촌락은 대원군 가의 소유다. 지금 부모님이 임시로 묵고 계신 방들은 황제의 어머니인 대원군 대비가 사용하곤 한다. 그 별장은 좋은 위치에 있으나 관리 부족으로 급속히 황폐해져가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이미 1900년대 초에도 많이 쇠락한 것 같다. 이후에 기록은 없어 소유권이 어떻게 변했는지 확인이 되지 않는다. 대원군 가문에서 관리가 되지 않아 소유권이 개인에게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 석파정은 어느 때인가 가톨릭교계의 소유로 넘어가 1951년에서 1956년까지 ‘콜롬바 어린이집’으로 사용되다가, 1957년 이후 ‘성 콜롬바 병원’이라는 이름아래 결핵요양소로 이용됐다. 토지대장에는 1970년대부터 기록이 있는데 1970년대까지 (주)쌍룡 소유로 있었다. 이때는 쌍용그룹 총수의 별장이었다. 이후 두번 개인 소유로 바뀐 후 1998년 이후부터 (주)석파문화원 소유가 됐다.

한옥 연구에 특별한 ‘석파정 별당’

석파정 중 별당은 1958년 서예가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의 소유가 돼 현재 상명대학교 삼거리에 있는 ‘석파랑’이란 음식점 안으로 옮겨졌다. 별당은 중국풍 건물로 1974년 1월 서울유형문화제 제23호, 석파정은 서울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됐다. 이 당시 석파정은 (주)쌍룡, 석파정 별당은 손재형 소유였다. 만일 다른 사람 소유였다면 문화재지정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석파정 별당이 있는 석파랑은 현재 ‘손재형 옛집’으로 불리는데, 서울에서 헐린 유명한 옛집들의 부재를 가져다가 지은 집으로 한옥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봐야 할 집이다.

석파정은 일부 정자가 사라지고, 신라석탑이 들어서는 등 변형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서울미술관이 들어서면서 지형이 변한 사실과 주변에 집들이 들어서면서 예전과 같은 경관을 찾아보기는 힘들게 됐다는 점이다.

별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풍광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주변에 집 때문에 예전과 같은 풍광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별서의 가장 큰 매력이 상실됐다는 것이 아닌가 평가한다. 그러나 석파정 안은 수림이 우거져 안에서만큼은 잠시 도시의 소음을 잊어버릴 수 있다. 별서의 풍광을 즐기려면 석파정은 한 번 쯤 꼭 찾아볼 만한 곳이다. ②로 이어짐.

글쓴이

최성호 건축가

필자인 최성호는 오랫동안 한옥과 한국문화를 공부해온 건축설계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건축사다. 블로그도 운영하고 있다. 필자의 블로그 주소는 https://blog.naver.com/seongho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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