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파정(石坡亭)의 건축 가치와 둘러보는 재미
[최성호의 사람 사는 건축] 석파정 이야기② 1850년대 지어진 후 중국풍 반영 당시 ‘매우 사치스러웠다’는 기록 빼어난 사랑채·별당 건축술 ‘눈길’ 기능공 정성 ‘인상적’...대표적 정원문화
①에 이어짐
소치 허련이 머물면서 남긴 기록
석파정에 대해 설명한 글은 <소치실록>과 양의영(梁義永)의 <유북한기(遊北漢記)>에서 나타난다. 두 글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공통으로 설명하는 것도 있다. 내용을 보면 <소치실록>이 더 자세하고 현재 모습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이런 차이는 소치의 경우 한 달 이상 이곳에 묵었고, 양의영은 북한산을 오르는 길에 잠시 들려 본 탓이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둘 모두 공통된 내용으로는 ‘월천정’이란 정자와, 물을 끌어들여 왔다는 부분이다. 그리고 매우 사치스럽고 화려했다는 것도 똑같이 기록하고 있다. <유북한기>는 1858년, <소치실록>은 1866년의 기록이다. <소치실록>이 나중이니 시설도 추가된 부분이 반영됐을 것이다. 일단 <소치실록>의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소치실록>에서 나오는 건축물로는 현대루(玄對樓), 월천정(月泉亭), 별당, 육모정(六茅亭), 작은 정자, 수각 등이 나온다. 현대루는 지금 석파정 사랑채를 지칭하고, 중국식 집은 석파랑으로 이건된 별당이며, 육모정은 실측조사에서 위치를 확인한 것으로, 사랑채 건너편 언덕에 있었다. 그리고 작은 정자와 수각은 같은 정자를 말하는 것으로, 현재 ‘수류성관풍루(水流聲觀楓樓)’라고 팻말을 써놓은 중국풍 정자가 아닐까 한다.

지금의 현황과 <소치실록>기록을 보면 사라진 것이 육모정과 월천정이다. 육모정은 위치가 확인됐지만, 월천정만 위치가 불명확하다. <소치실록>에는 월천정만 나오는데, <유북한기>에는 월천정과 함께 품천정(品泉亭)도 나온다. <유북한기>에서 이들 정자는 ‘한 칸’이라고 했다.
사라진 정자와 연못들
또 당시에 연못을 조성했던 곳이 두 곳 있다고 했다. 이 곳에는 정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위쪽 연못은 중국식 정자와 너무 가깝다. 또한 중국식 정자 앞에도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연못은 그렇다고 해도 각 연못에 정자를 지었다면 현재 중국식 정자와 너무 가깝다. 이런 사실로 추정해보면 품천정은 나중에 중국식 정자를 지으면서 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아마도 중국식 정자는 1858년 이후 1866년 이전에 중국식 별당과 함께 지어지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그리고 사랑채 앞마당에서 본 동쪽 경관이 매우 좋다. 이런 곳에 정자를 만들어 앞산이 바라보이는 좋은 경관을 즐겼을 것이다. 정원을 만든 사람이 이것을 놓칠 리 없다. 처음 월천정과 품천정이 세워졌다가 먼저 품천정이 중국식 정자로 대체됐고 월천정은 계속 남아 있다가 어느 때 사라진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소수운렴암’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 위쪽에는 통일신라시대 석탑이 있다. 양식상 9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근래에 경주에서 옮겨온 것이다. 무엇보다 많이 변한 것은 동쪽 진입 부분이다. 현재 서울미술관이 들어서 있는 곳으로 1988년 배치도를 보면 이곳은 예전에 낮은 언덕이었다. 사랑채 앞마당보다 3m이상 높아 안채 지붕 정도 높이였다. 이 언덕은 서울미술관을 짓는 중에 없어졌다. 이 언덕에 나무가 심어져 있다면 외부에서 안채가 잘 보이지 않았을 것이고, 건물들이 숲에 둘러싸여 지금보다는 안온한 분위기였을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이건(移建)된 ‘별당’
현재 석파랑에 있는 별당은 1958년 손재형이 이건한 것이다. 이건은 옮겨 지었다는 말이다. 옛 사진에 의하면 애초에 석파정에 있던 별당은 서울시 지정보호수 제60호로 지정된 반송(盤松) 옆에 자리했다. 지금과 같은 ‘ㄱ’자 형태가 아니고 ‘一’자 모양이었다. 이 별당은 1858년에 쓰인 <유북한기>에는 기록이 안보이고 1866년에 쓰인 <소치실록>에 나온다. 이것으로 유추해보면 중국식 별당은 1858년 이후 중국식 정자와 같이 지어지지 않았을까 한다. 별당은 이건하면서 형태가 변했다. 이전 별당은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온돌이 한 칸 반 씩 붙은 좌우대칭형 건물로 추정된다. 이건하면서 우측방의 아궁이를 없앴고 좌측을 한 칸 더 늘리며 4칸 집이 됐으며, 좌측 전면을 한 칸 더 늘려 ‘ㄱ’자 형태가 됐다. 이렇게 방을 늘인 것은 이건한 손재형씨가 별당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려 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한다.
이건한 별당에서 두 가지를 눈여겨봐야 한다. 첫 번째는 시공방법이다. 이건 후 도면을 보면 안에 있는 구조체와는 별개로 전돌로 외벽을 쌓았다. 즉 한옥구조와 외부벽체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 것은 옮겨 시공할 때의 기술적 한계로 인한 것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는 옮겨지은 사람의 정성이다. 우선 벽돌을 쌓은 기능공의 솜씨가 대단하다. 이런 수준의 기능공을 요새는 보기 어렵다. 그리고 한옥지붕 목기연(木只椽)에 해당되는 것을 전으로 구워 만들었는데 이런 것은 경복궁 아미산 굴뚝에서도 볼 수 있다.

손재형 옛집에서도 이런 굴뚝을 볼 수 있는데 궁에서 사용하던 것이다. 문제는 벽돌이나 전으로 만든 목기연은 해체할 때 깨지기 쉽다는 점이다. 그리고 새로 이축할 때 수량도 맞지 않았을 것이다. 전으로 만든 목기연을 해체한 것을 그대로 사용했는지, 아니면 새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부분까지 잘 보전해서 이건한 것은 정말 대단한 정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기타 건축물
사랑채와 안채는 잘 지은 집인데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특징이 있다. 첫 번째, 사랑채 평면이 특이하다. 사랑채는 겹집으로 전면에 퇴칸을 두었다. 특이한 것은 큰 방 가운데 기둥이 있어 밭(田)형태로 공간을 나누었다. 이렇게 중간에 기둥을 넣어 방을 나눈 것은 기능성보다는 큰 방을 가로지를 대들보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째, 누마루가 뒤까지 이어져 세 칸 반의 규모가 됐다. 누마루가 커진 것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안채는 완전한 ‘ㅁ’자 형태로 대청이 없다. 대청 없는 한옥이 없었는데 여기가 그렇다. 별서 특성상 안채 활용이 높지 않다고는 하지만, 윤치호 일기를 보면 대원군 부인도 이곳에서 기거했다. 이전에는 김흥근 가족과 그의 친척 여자들도 자주 기거했을 터인데, 대청 없이 집을 지은 이유가 궁금하다.
별채는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전면 6칸, 측면 2칸으로 앞으로 반 칸 퇴칸이 있다. 왼쪽 끝 방은 예전에 고종이 묵었던 방이라고 한다. ‘1고주 5량’ 집으로 납도리집이다. 기단은 장대석을 세단 쌓은 세벌대이고 우측 누마루 쪽은 장대석을 두 단 쌓은 이벌대다. 기단을 높게 한 것은 아마도 전망을 고려한 듯하다. 되도록 높게 해서 전망을 확보한 것이다. 그리고 누마루 쪽을 이벌대로 낮춘 것은 누마루 아래 아궁이 때문이다. 마루아래 설치된 아궁이에 불을 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이벌대로 한 것이다.
당시 최고 건축기술로 지은 집
별채를 지을 때 많이 생각하고 지은 집이라는 것은 뒤쪽 굴뚝을 보면 느낄 수 있다. 굴뚝과 건물을 연결하는 연도 하부에 돌을 파서 구멍을 냈다. 구멍은 뒤 화계로부터 내려오는 빗물의 배수 때문이다. 물이 고이지 않고 흘러가도록 돌을 파서 구멍을 낸 것이다. 단단한 화강석을 파서 구멍을 낸다는 것 역시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렇게 한 것을 보면 이 집이 매우 수준높은 집임을 보여준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좌측 툇마루 하부를 받치는 ‘까치발이 판석’이다. 왜 이런 것으로 했는지 의문이지만 하여간 판석을 설치해 툇마루를 받치는 것은 이곳에서 처음 봤다.

중국풍 정자는 독특한 형태로, 석파정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건물이다. 정자로 이어진 작은 다리가 굴곡이 있어 흥미를 끈다. 정자는 한 변이 2.64m인 정사각형 정자다. 115x115㎜ 기둥 12개를 사용하였는데 갓기둥은 지붕아래까지 가고 중간 기둥은 창방까지만 올라간다. 창방 위도 같은 크기의 부재가 동자형태로 받치고 있어 갓기둥만 하중을 받는 것이 아니고 하중이 분산된다. 지붕을 목재와 동판을 접어 만들었기 때문에 무겁지 않은 덕에 가는 기둥을 사용할 수 있었다. 지붕은 동판을 수키와처럼 돌출시켜 접어 기와집 느낌이 나도록 했다. 정자하부도 한국 정자처럼 장초석으로 세우는 것이 아닌 벽돌로 아치를 만들어 중국풍이 나도록 했다.
석파정 안내판에는 이 정자에 대해서 ‘수류성관풍루(水流聲觀楓樓)’라고 하고 있다. ‘물소리를 들으며 단풍을 즐기는 누각’이라는 뜻이다. 주변을 보면 단풍나무가 가득하다. 이름 그대로 가을에는 빨간 단풍을 즐길 수 있는 분위기다. 정자는 붉은 주칠로 칠해져 있다. 이 정자와 정자 주변이 빨간 단풍과 함께 온통 붉은 색일 것이다. 가을에 반드시 다시 찾아 ‘관풍루(觀楓樓)’의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다.
메가폴리스인 서울 도심에서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 않지만 찾아보면 곳곳에 그런 건축물이 숨어 있다. 석파정이 그렇다. 무엇보다 석파정은 자연친화적인 조경을 지향하는 우리 정원문화가 살아있는 대표적인 곳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