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개혁, 본질은 수신료 분리 징수가 아니다
[박정인의 정치평론] 尹 “공영방송 왜 필요하냐” 지적해 KBS 장악의도 없다는 뜻인가 공영방송의 진정한 개혁 가능할까
KBS 수신료 분리 징수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KBS는 발등에 불이 떨어져도 심각하게 떨어졌다. 과거 정권이 KBS에 대해 수신료 문제를 카드 삼아 압박한 경우는 흔했지만 이번처럼 실제로 실행에 들어간 적은 수십년 간 없었다.
“공영방송이 필요한가”
이런 가운데 공영방송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의 시각에 눈길이 간다. 윤 대통령은 최근 비공개 자리에서 “공영방송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상 콘텐츠 매체가 허다한데 굳이 세금 같은 수신료를 받아가며 공룡 조직을 유지할 이유가 뭐냐는 생각이다. KBS에 대해 정치적인 불만을 넘어서 존재 이유 자체에 의문을 갖는다는 얘기다. KBS에게 그동안 진보 보수를 반복하면서 가해졌던 정권의 압박과는 차원이 다르다.
사실 KBS는 윤석열 대통령이 아니라도 그런 지적을 받을 이유들을 안고 있다. KBS가 재난방송, 장애인방송, 국제방송, 지역방송 등 공적 방송 책무를 수행한다고 하는데 이런 주장을 피부로 느낄만한 방송이 실제 송출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 자체가 거대한 공영방송의 필요성을 덜 느끼게 만든다.
대표적인 게 국가재난상황에서의 대응이다. 공영방송이라면 일본의 NHK가 지진에 대응하듯이 국가재난상황에서 국민에게 빠르고 정확하게 정보를 알려줄 의무가 있다. 그런데 오늘날 방송환경은 KBS가 그 일을 잘하든 못하든 국민이 별 관심을 갖지 않게 만들고 있다.
지난 5월 31일 새벽 북한이 위성 발사체를 발사했을 때 발령된 재난 경보만 봐도 그렇다. 휴대전화에서 경보가 울리자마자 다수가 찾은 매체는 ‘네이버’였다. 하도 몰려가는 바람에 사이트가 마비됐다. 지난 해 여름 폭우로 서울 강남역 부근이 재난 지역이 됐을 때 가장 실시간으로 현장 상황을 알린 매체는 KBS도 MBC, SBS도 아닌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이었다. KBS가 아무리 노력해도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을 따라잡을 방법이 없다.
장애인 방송, 지역 방송과 관련해 KBS가 딱히 다른 지상파나 케이블 방송에 비해 잘하는 것이 있는지 역시 의문이다. KBS가 있기 때문에 장애인이 일상을 영위하는데 도움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없다. 지역방송 역시 지역민방과 지역 MBC가 지역 KBS보다 못할 이유가 없다. 넘쳐나는 채널들을 볼 때 KBS가 아니면 방송 시간이 모자라서 지역이슈가 외면당할 것 같지도 않다. 특히 지역 이슈는 지역 라디오나 케이블 채널을 통한 전파가 더 효과적이다.
종합 편성 채널로서 KBS의 입장도 고민거리다. 우리나라에는 KBS 1, 2TV, MBC, SBS와 TV조선 JTBC, 채널 A, MBN 등 8개 종합 편성 채널이 있다. 종합 편성이란, 보도, 교양, 예능, 드라마 등 여러 장르의 방송을 하는 방송채널을 일컫는다. 이들이 생산해 내는 예능과 드라마 프로그램의 숫자는 이미 포화상태를 넘어섰다. 요즘은 더 나아가 케이블 방송의 전문 채널과 넷플릭스 같은 OTT가 예능과 드라마를 지배하는 시대다.
그런데 공영방송인 KBS가 왜 여전히 예능과 드라마 시청률 경쟁에 뛰어들고 있을까? 국민 가요 프로그램이 된 <전국노래자랑>이나 <가요무대> 정도라면 나름 명분이 있겠다. 하지만 <1박2일> 같은 예능 프로그램은 굳이 KBS가 하지 않아도 된다. 최근 방송 중인 KBS 2TV 드라마 <비밀의 여자>는 내연녀와 상속녀를 둘러싼 복수극이다. 짜릿하고 가슴 뛰는 드라마다. 하지만 국민의 방송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KBS가 굳이 만들지 않아도 그런 드라마를 만들 방송사나 제작사는 많다.
예능과 드라마는 광고를 내보내는 KBS 2TV가 하는 거니까 수신료와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2TV는 1TV와 분리해야 한다. 한쪽은 국민의 방송 한다면서 수신료 받고, 다른 쪽은 시청률 경쟁 하면서 광고를 내보내는 건 이율배반이다. (2TV 민영화가 얼마나 어렵고 복잡한 일인지는 잘 알기 때문에 더 부연하지는 않겠다.)
마지막으로 EBS 교육방송과 아리랑TV가 왜 KBS와 별도 법인으로 떨어져 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아리랑TV는 KBS 국제방송과 기능이 겹친다. 이들을 통합하는 문제는 사실 EBS와 아리랑TV 쪽의 반대가 크다. 따로 잘 살고 있는데 공룡 같은 조직과 합치라면 좋아할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국민 입장에서는 낭비다.
낭비가 많은 공영방송
낭비로 말하자면 KBS는 둘째 가기 서러운 처지다. 지난 2021년 9월 감사원 감사 결과 KBS는 15년 동안 직원들에게 과도한 연차수당을 지급해 1340억원을 낭비한 것으로 드러났다. 연간 1230만원을 지급받은 직원도 있었다. 지난 2014년 당시 민주당 최민희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KBS의 전체 직원 4805명 가운데 절반을 넘는 2738명이 연봉 1억원 이상을 받는 것으로 확인됐다.
눈치 빠른 분들은 알아채셨겠지만 앞서 제시한 방만경영 사례들은 민주당 집권 시절 감사원이나 민주당 의원이 지적한 것들이다. 윤석열 정부 들어 지적된 낭비 사례 가운데 더 자극적인 것들이 많지만 일부러 뺐다. 지금 정권의 KBS 손보기를 지지한다는 오해를 사기 싫어서다.
공식적인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KBS가 방만한 조직이라는 사실은 방송언론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다 안다. 현장에서는 같은 일을 하는데 투입되는 인원과 장비의 차이가 그대로 눈에 띈다. 동여의도와 서여의도 곳곳에 있는 KBS 사옥 안에 아침에 출근해서 조간신문 보다 점심 먹으러 가고, 느즈막히 돌아와 석간신문 보다 퇴근하는 한량들이 많다는 사실도 비밀이 아니다. 국민이 내는 수신료는 낭비되고 있다.
수신료 분리 징수는 방만한 KBS에 엄청난 타격을 입힐 것이다. KBS 예산에서 수신료의 비중이 45%라고 하니 당연하다. 지난 해 서울시의회 김기덕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서울의 적십자회비는 고지액이 662억원인데 납부액은 52억원이었다. 고지서를 받은 국민 가운데 7.8%만 회비를 냈다는 뜻이다. 물론 적십자회비는 성금의 성격이고 KBS 수신료는 준조세적인 특별부담금이란 점에서 달리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분리징수로 징수율이 큰 폭으로 떨어질 건 분명해 보인다.
이렇게 되면 지금 받는 수신료로도 모자라 더 인상하게 해달라고 몇 해째 애원하던 KBS가 얼마 못가 두 손 들거라는 전망이 가능하다. 이 단계부터 KBS 문제는 정치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사람이 바뀌고 논조도 따라 바뀔 것이다. 야당도 입장을 바꿀테고.
KBS 탓하기는 충분히 했으니 이제 수신료 징수의 역사를 들여다 보자. 수신료 통합징수를 처음 도입해 준 정권은 김영삼 정부였다. 그 당시는 정무수석이 방송사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고함 지르고 핏대를 올린다고 해서 혈죽(핏대) 선생이란 별명을 얻던 시기였다. 그것 갖고는 모자랐는지 정권은 KBS를 더욱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수신료를 전기요금과 통합하게 해줬다. 야당은 당연히 반대했고.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한 뒤에는 거꾸로 한나라당이 수신료 분리 징수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야당이 돼서 보니 KBS가 너무 친정부적인 방송을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난 뒤 상황은 또 바뀌었다. 여당은 통합 징수에 더해 수신료 인상까지 추진했고, 야당인 민주당은 수신료 분리 징수를 주장하고 나섰다. 박근혜 정부 때도 마찬가지였다.
윤석열 정부의 수신료 분리 징수안은 문재인 정부 당시 자유한국당의 주장과 흐름을 같이 한다. 지금 KBS의 지배구조나 논조 같은 상황이 문재인 정부 때와 달라진 게 없다고 보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민주당이 박근혜 정부 때까지 주장하던 수신료 분리 징수를 슬그머니 버리고 통합 징수 쪽으로 선회한 것은 KBS가 지금 자신들에게 나름 잘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결국은 KBS 장악의 문제다. 어느 정권이든 KBS 이사회를 자기 쪽에 유리하게 구성하고, 사장 자리에 자기 사람을 앉히려고 한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근거로 KBS의 방만한 경영과 제 역할에 못미치는 방송제작 시스템이 활용되는 것이다. 모든 정권이 KBS 개혁을 부르짖지만 개혁이 기대하는 종착역은 ‘정권의 나팔수’일 뿐이다.

윤대통령의 공영방송觀, 위험하면서 유용한 까닭
윤석열 대통령이 “공영방송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고 실제 말했는지 공식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KBS, MBC를 윤 대통령이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이제 충분히 알려졌다. 거기에 특유의 자유주의 경제관이 더해져서 공영방송의 존재가치에 회의를 갖게 된 것 같다. 대통령의 공영방송관은 대단히 위험하기도 하고 대단히 유용하기도 해 보인다.
우선 위험하다는 것은 공영방송의 존재 가치를 너무 안이하게 본다는 뜻이다. 앞서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KBS의 역할에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고 언급했지만 사실 공영방송은 고전적인 역할이 줄어드는 만큼 새로운 역할에 대한 기대도 크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중심을 잡는 역할이다. 미디어의 폭발적인 증가가 가져온 부작용 중 하나가 가짜정보와 진짜정보를 구분하기 어렵게 됐다는 점이다. 물론 다른 언론사와 방송사들도 이 구분을 분명히 하는 데 충실해야 하지만 가장 선두에 서야 하는 파수꾼은 역시 공영방송이다.
국민에게 정확하고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만큼 공영방송에게 중요한 역할은 없다. 지상파, 케이블 가릴 것 없이 전문가로 포장된 정치꾼들이 여야로 나뉘어 앉아 서로 헐뜯고 터무니 없는 주장만 늘어놓는 프로그램이 너무 많다. 진행자는 공정성, 객관성이라는 무책임한 명분으로 이들이 무슨 소리를 하던 내버려 둔다. 토론의 장이 아니라 가짜뉴스 생산공장이다. 이럴 때 공영방송의 역할이 절실하다.
비슷한 맥락에서 광고가 없는 방송의 중요성도 크다. 방송에서 시청률과 광고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과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일반 시청자들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예민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민간 기업이 한 푼이라도 손해보는 일을 하려 할리가 없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정당/시민단체간 정책 토론회>, 의미는 크지만 비용이 걱정스러운 <초고령사회에 대한 세계 석학들과의 대화>, 품이 너무 들어 다른 방송사는 엄두도 내기 어려운 <한반도 식물 생태계의 변화> 다큐멘터리, 장애가 불편이 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캠페인… 이런 프로그램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수신료를 받으면서까지 공영방송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공영방송이 필요없을 수도 있다는 건 방송 미디어 공간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고, 시청률과 이윤에만 눈이 멀어 약육강식이 난무하는 세상으로 만들어도 괜찮다는 위험한 발상이다.
그렇다면 공영방송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이 유용하다는 건 무슨 뜻인가? 공영방송의 필요성에 의문을 갖는 인식을 가진 대통령이 등장했다는 건 이제야 공영방송의 역할과 지배구조, 재정조달 방안에 대한 제대로 된 논의가 가능할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말하자면 공영방송을 내 편으로 만들 필요성 자체를 못 느끼는 대통령이라면 객관적인 입장에서 공영방송 개혁을 위한 논의의 장을 열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이다.
세계의 공영방송들은 이미 KBS와 비슷한 고민에 빠져 있다. 수신료로 재원을 충당하는 곳은 점차 줄고 있고, 역할에 대한 시청자들의 불만은 늘어만 간다. NHK는 정치적 외압을 막고, 경영을 효율화 하기 위해 기업인 출신을 CEO로 기용하는 관례를 만들었지만 자민당 체제 아래서 독립성과 경영효율을 함께 이루기가 버거워 보인다. BBC는 볼 건 없는데 수신료만 받는 방송이라는 비난을 피해보려고 2028년부터 수신료 징수를 폐지하기로 했는데 대안이 마땅치 않다.
세계의 공영방송들이 이렇게 자구책을 마련하기 위해 발버둥치는데 KBS는 아직도 폭풍 맞은 조각배처럼 정권의 향배에 따라 정치 논리에 휘말려 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개혁을 위한 진지한 논의가 절실하다. 논의는 어쩌면 ‘공영방송이 필요없는 존재일 수도 있다’는 맨 바닥의 인식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공영방송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윤 대통령의 의도는 아마도 미디어 산업 차원의 순수한 판단에서 비롯된 것 같지는 않다. 지금은 그렇게 말해도 정작 KBS가 두 손 들고 친정부적 방송으로 선회하면 언제든지 “역시 공영방송이야”라고 말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생각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정치에 휘둘리지 않는 진정한 공영방송에 닿아 있다면 대통령이 KBS 개혁 논의에 꼭 앞장서 줬으면 한다. 언젠가 KBS 사장이 교체될 때 누가 봐도 중립적인 인물이 등장하는 게 시작일 수 있다. 그럴 수만 있다면 KBS 구성원들도 뼈를 깎는 체질 개선에 나설 것이고, 국민도 기꺼이 지갑을 열어 수신료를 낼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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