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과학이란 무엇일까?

[어느 이론물리학자가 보는 세상] ‘과학’, ‘과학적’이란 말의 참 뜻은 뭘까 과학적 태도는 의심과 비판을 동반한다 과학 흔들릴 때, 미신과 주술이 힘 얻어

사진출처=연세대 고등과학원.
사진출처=연세대 고등과학원.

한국에서 과학자란 어떤 위치일까? 동료 한 분이 이런 말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아버지에게 물리학과로 가겠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 그의 아버지는 이렇게 답하셨다.

“네가 받은 성적이면 법대도 갈 수 있고 의대도 갈 수 있는데, 왜 하필이면 물리학과냐? 너는 왜 그런 피지배 계급의 학문을 하려고 하느냐?”

과학이 ‘주장의 액세서리’ 된 시대

이보다 더 적확하게 오늘날 과학의 위상을 표현한 말이 있을까? 과학이 중요하다고 소리 높이지만, 정작 내 자식이 과학자가 되겠다고 하면 내키지 않는다. 과학이 중요하다고 여겨도 과학이 무엇인지 잘 모를뿐더러 연구소에서도 정작 연구직은 행정직보다 못한 대우를 받기도 한다. “과학적”이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쓰지만, 정작 “과학적”이라는 형용사의 올바른 뜻은 모른다. 오늘날 우리에게 과학이란 그저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한 액세서리에 불과하다.

한국에서 과학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을 하려면 우선 과학이라는 단어가 어떤 과정을 거쳐 한국어에 자리 잡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학(科學)’이 한국어에 유입되어 쓰이기 시작한 건 1900년대 초반의 일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이 과학이라는 단어의 쓰임새는 오직 한 가지 의미로만 쓰였다. 과학은 조선 시대에 과거를 보기 위해 준비하던 공부를 일컫는 말이었다. 오늘날의 의미로는 대학 입시나 고시에 필요한 공부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과학이라는 단어를 영어의 사이언스(science)를 번역한 단어로 가장 먼저 자리매김한 곳은 일본이었다. 메이지 유신 후, 일본에서 서양학문을 수용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유럽 언어의 전문어들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전문어의 뜻을 축약해서 담아내려면 한자를 쓰는 게 효과적이었다. 과학이라는 단어도 이런 번역의 과정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 단어다. 영어에서 과학을 일컫는 ‘사이언스(science)’라는 단어도 1400년대에 옛 불어의 단어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고, 불어의 ‘시앙스(science)’는 12세기쯤 라틴어 단어 ‘시엔티아(scientia)’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 시엔티아라는 단어는 ‘앎’ 또는 지식을 뜻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이언스는 실험과 관측을 거쳐 축적된 지식, 자연에 관한 지식, 또는 학문의 체계를 갖춘 각 분야를 뜻하는 단어가 되었다.

일본어에서 사이언스를 뜻하는 과학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쓴 사람은 일본 개화기의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였지만, 이 단어를 학문적 용어로 쓰기 시작한 사람은 니시 아마네(西周)였다. 네덜란드에서 유학한 그는 서양의 학문을 일본에 도입하려고 서양에서 정의된 용어들을 고심하며 일본어로 번역하였다. 그중에 과학이란 단어도 있었다. 19세기 말 조선에서는 유길준이 쓴 <서유견문>에 이 과학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온다. 거기서 과학은 학문의 체계를 뜻하는 단어로 쓰였다. 신문에서 과학이 등장하는 건 1909년 이후였다. 그러니까 과학이라는 단어는 일본어로 한 번 걸러져 한국으로 들어온 신조어인 셈이었다. 오늘날에는 물리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의 여러 분야를 통칭하는 말로 굳어졌다.

‘기술’ 앞의 형용사로 남은 과학

한국이 근대화되어가면서 과학이 원래 지니고 있던 의미보다는 기술과 결합하여 과학기술의 의미가 더 두드러졌다. 1970년대 들어서 과학과 기술의 관계를 공고히 하면서 과학보다는 ‘과학기술’이라는 단어가 더 많이 쓰인다. 그러나 기술은 과학과 다르다. 영어로 테크놀로지(technology)라고 부르는 기술은 헬라어 단어 ‘테크네(τέχνη)’에서 왔다. 이 단어는 “물건을 만드는 방법”을 뜻한다. 손도끼에서부터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로켓에 이르기까지 기술은 인간에게 유용했다. 과학은 때로 새로운 기술을 내놓기도 하고, 기술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20세기 들어서 과학은 그전까지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고도의 첨단기술을 창안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과학과 기술이 모두 중요해지면서 과학과 기술이 서로 밀접하게 하나로 묶이게 되었지만, 과학은 기술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과학과 기술의 긴밀한 관계를 나타내던 “과학기술”에서 과학은 기술을 수사하는 형용사로 남았다. 기초과학이라는 단어 역시 자연과학에서 추구하는 과학 본연의 정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지금 당장 산업과 연결시킬 수 있는 기술을 강조하는 원천기술의 의미로 쓰인다. 그 이유는 사이언스의 원래 의미를 한국어에 담으려는 노력 없이 받아들여진 탓도 있고, 선진국을 따라가야 한다는 강박과 조급증 때문일 수도 있다.

좀 더 근원적으로 우리에게는 과거 역사에서 과학을 경험한 적이 없었던 터라 과학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20세기 초 위대한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는 <과학의 가치>에서 이런 말을 했다. “만약에 우리가 오직 즉각적인 유용성에만 관심이 있다면, 과학은 존재할 수 없다.” 과학의 본질을 꿰뚫는 말이다. 과학이 발전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이유도 여기 있다. 그는 과학자를 일컬으며 이런 말도 했다. “...만약 실용적인 사람들만 존재했다면, 그리고 그들보다 앞서 가난하게 죽고, 효용을 생각하지 않고, 이타적인 헌신자들이 없었다면, 수많은 실용적인 사람들을 풍요롭게 한 산업이 발전하는 일 따위는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푸앵카레의 말마따나 역설적이지만,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기술은 그런 기술을 개발하려는 노력보다는 그와는 전혀 상관 없는 과학적인 추구에서 오는 경우가 더 많다.

과학적 태도는 항상 의심을 동반한다

과학에서 나온 형용사 “과학적”이라는 말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대할 때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를 정의해준다. 과학적 태도는 의심을 동반한다. 누군가의 권위에 의존해서 어떤 주장을 믿거나 따르는 건 편하지만, 과학적인 태도는 반드시 의심을 동반한다. 의심하므로 고독할 수밖에 없다. 16세기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을 정면으로 반박했을 때도 그랬고, 법정에서 가택 연금 판정을 받아 물러나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읊조렸던 갈릴레오 갈릴레이도 그랬다. 20세기 초 아인슈타인도 기존의 권위를 따랐다면, 뉴턴 역학의 허점을 지적한 상대성 이론을 결코 내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과학적 태도는 항상 의심과 비판을 전제로 한다. 버트런드 러셀은 과학자를 구분하는 것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왜 그것을 믿느냐?”라는 질문이라고 했다. 무엇을 믿으려면, 데이터가 있어야 하고 이론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인문학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반면에 과학은 인간이 살고 있는 터전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과학은 인문학과 더불어 인류 문명의 두 기둥을 형성한다. 이런 점에서 인문학 못지 않게 과학 역시 중요하다. 과학은 알면 좋지만 몰라도 상관 없는 그저 그런 학문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인간이 미신과 주술에서 벗어나도록 한 건 과학이었다. 오늘날 유사과학이 여전히 판을 치는 건 과학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시사한다. 과학의 위치가 흔들리면, 미신과 주술이 다시 힘을 얻는다.

글쓴이

김현철 인하대 물리학과 교수

필자인 김현철 교수는 현재 인하대 물리학과 교수 및 프런티어학부대학 학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강력의 탄생> (2021)과 <그렇게 물리학자가 되었다> (2022)가 있다. 30년 넘게 핵물리학과 강입자 물리학 분야에서 연구하고 있고, 지금까지 핵물리학과 입자물리학 분야에서 190여 편의 논문을 출판하였다.

댓글

    함께 읽을 글

    칼럼 전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