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오점, 오펜하이머와 홍범도 장군

[어느 이론물리학자가 보는 세상] 매카시즘에 美인권과 민주주의 후퇴했고, 훌륭한 학자와 과학자를 많이 잃었다 홍범도 사태도 역사적 오점으로 기억될 것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로버트 오펜하이머(오른쪽). 사진=위키피디아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로버트 오펜하이머(오른쪽). 사진=위키피디아

오펜하이머 청문회의 시대적 배경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제작한 영화 <오펜하이머>는 9월 7일 누적 관객수가 3백만 명 가까이 될 만큼 인기를 끌고 있다. 상영시간이 3시간이 넘고, 오펜하이머의 비밀취급 인가를 둘러싸고 벌어진 보안청문회가 중심이 되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끈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원자폭탄을 제작하는 프로젝트였던 맨해튼 프로젝트를 다루는 것 때문일 수도 있고,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이 지닌 복잡성 때문일지도 모르고, 때아니게 이미 폐기된 반공주의가 한국에 다시 등장하는 것과 맞물려서일지도 모르겠다.

영화에서 다루는 오펜하이머의 청문회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미국에 불어닥친 두 번째 ‘빨갱이 공포(red scare II)’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열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 소련이 부상하는 것을 지켜본 미국 시민들은 공산주의가 자국의 이익을 서서히 갉아먹을 것으로 의심했다.

1950년 2월 9일, 미 위스콘신주 상원의원 매카시는 웨스트버지니아주 휠링의 여성 공화당 클럽에서 열린 링컨의 생일 연설에서 폭탄 발언을 했다.

“국무부에서 공산당원 및 스파이 조직원으로 지목된 모든 사람의 이름을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지만, 205명의 명단을 지금 내 손에 쥐고 있습니다.”

이 발언이 일반인들을 사로잡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매카시의 연설이 있기 6개월 전쯤에 소련은 카자흐스탄에서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그해 9월 중순에야 이 소식을 접한 미국민들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은 소련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은 하겠지만, 적어도 한참 후일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수년이나 일찍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소련에 있던 과학자들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뒤에는 소련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고정간첩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서도 소련이 원자폭탄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정보를 넘긴 물리학자는 독일에서 영국으로 망명한 클라우스 푹스(Klaus Fuchs)였다. 그는 플루토늄으로 만든 원자폭탄 ‘팻 맨(Fat Man)’을 만드는 방법을 소련에 고스란히 넘겼다. 소련이 완성한 RDS-1 또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이름을 따서 미국에서는 조-1(Joe-1)이라고 불리던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 팻 맨과 똑같이 생겼다는 것만 봐도 푹스가 넘긴 정보가 소련 물리학자들에게 얼마나 요긴했는지 보여준다. 푹스는 1950년 2월 2일 체포되었고, 9년 4개월 동안 복역한 뒤에 동독으로 망명했다.

고정간첩들의 정체가 드러날 즈음,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이런 일련의 사태는 매카시의 주장이 힘을 얻는 데 크게 작용했다. 1950년부터 거의 10년 동안 미국에 빨갱이 사냥의 광풍을 불러올 매카시즘의 시작이었다. 미국 역사상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아넣었던 기간이기도 했다. 훗날 미국 상원의원이었던 로버트 버드(Robert C. Byrd)는 이 어두웠던 기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미국 상원에서 매카시 같은 사람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으며, 이보다 더 고통스러운 시기를 겪은 적도 없었습니다.”

매카시즘 광풍과 과학자들의 수난

한때 공산주의에 우호적이었던 과학자들의 수난은 캘리포니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50년, 캘리포니아 대학교 이사회의 의장 존 네일런(John F. Neylan)은 당시 캘리포니아 상원의원이었던 잭 테니(Jack Tenney)가 발의한 <캘리포니아 충성 맹세(California loyalty oath)>를 캘리포니아 대학교 모든 교수와 직원도 따라야 한다고 명령했다. 캘리포니아 충성 맹세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나는 공산당 당원이 아님을 맹세하고, 이 맹세 아래 내 의무에 반하는 그 어떤 당이나 공산당에 동의하지 않음을 맹세합니다.”

네일런과 몹시 친했던 어니스트 로런스도 충성 맹세를 적극 지지했다. 놀란의 영화 <오펜하이머>에서도 잘 나오지만, 로런스는 이미 버클리에 방사연구소를 세울 때부터 연구소에 속한 연구원들이 정치적인 발언을 하거나 정치적인 모임에 참여하는 걸 무척 싫어했다. 로런스는 친하게 지내던 오펜하이머가 정치에 관해 말할 때마다 극도의 혐오감을 드러냈다. 전쟁이 끝난 뒤, 로런스의 이런 태도는 한층 더 강화되었다. 그러나 UC버클리에 있는 과학자 중에는 속으로 불평하면서 그 충성 맹세에 서명한 사람도 있었지만, 맹세를 거절하고 대학에서 쫓겨나거나, 다른 대학교로 옮기는 물리학자들도 있었다.

이 당시에 FBI와 미국 하원 반미활동위원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로부터 고초를 당한 물리학자들은 많은 경우에 오펜하이머와 연관이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1949년에 한 차례 청문회에 불려 간 적이 있지만, 혐의없음으로 끝났다. 그러나 오펜하이머가 소장으로 있던 고등과학원의 이사였던 루이스 스트라우스(Lewis Strauss)는 오펜하이머와 사이가 몹시 나빴다. 그는 오펜하이머를 궁지에 몰아넣을 계획을 오랫동안 궁리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48년 동안 FBI의 국장을 지낸 존 에드거 후버(John Edgar Hoover)가 있었다.

실제로 빨갱이 사냥을 주도하는 것처럼 보였던 인물은 매카시였지만 뒤에서 오펜하이머를 제거하기 위한 모든 작업을 했던 사람은 후버였다. 이런 이유로 미국 역사학자 엘렌 슈레커(Ellen Schrecker)는 매카시즘은 후버리즘(Hooverism)으로 정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오펜하이머를 잡을 덫을 까는 건 쉬웠다. 1930년대부터 공산주의에 호의를 느꼈던 오펜하이머는 공산당에 기부하기도 했고, 그의 주변에는 공산당 당원이거나 공산당에 우호적인 친구들도 많았다. 그의 아내조차 한때 공산당 당원이었다. 스트라우스는 그에게 공산주의자라는 굴레를 씌우고, 원자폭탄과 관련된 극비 자료를 넘겼다고 모략할 기회를 엿보았다. 1954년은 미국에서 공산당 마녀사냥이 기승을 부릴 때였다. 그리고 스트라우스 뒤에는 오펜하이머에 관한 사찰 정보를 손에 쥐고 있던 FBI 국장 에드가 후버가 있었다. 두 사람은 전면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오펜하이머를 곤경으로 밀어 넣을 덫을 놓았다.

1954년 4월 12일 월요일, 오펜하이머의 일급 비밀취급 인가를 취소할 것인지 결정할 보안청문회가 시작되었다. 청문회는 거의 한 달 동안 열렸고, 오펜하이머의 과거 행적과 사생활이 낱낱이 파헤쳐졌다. 오펜하이머의 변호사에겐 오펜하이머에게 불리한 정보에 접근할 권리도 주어지지 않았다. 청문회는 마치 오펜하이머를 범죄자 취급하는 재판과 같았고, 불공정하기 짝이 없었다. 청문회에서는 2대1로 오펜하이머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고,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에서는 최종적으로 오펜하이머에게 주어진 비밀취급 인가를 취소했다. 이로써 오펜하이머는 더는 정부와 관련 있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소수의견을 내놓았던 청문위원 워드 에반스(Ward V. Evans)는 “보안청문회가 오펜하이머의 비밀취급 인가를 취소한 것은 미국의 오명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예언처럼 2022년 12월 16일, 미국 에너지부 장관이었던 제니퍼 그랜홈(Jennifer M. Granholm)은 오펜하이머의 복권을 선언하였고, 오펜하이머의 보안청문회는 미국 역사에 수치스러운 한 장면으로 남았다.

2021년 8월 15일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위치한 홍범도 장군 묘역에서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고국으로 봉환됐다. 사진=연합뉴스
2021년 8월 15일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위치한 홍범도 장군 묘역에서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고국으로 봉환됐다. 사진=연합뉴스

‘역사적 오점’으로 남은 결정

1950년대 미국을 휩쓸었던 매카시즘으로 미국이 얻은 건 무엇일까? 인권과 민주주의는 후퇴했고, 훌륭한 학자와 과학자를 많이 잃었다. 역설적으로 1960년대 초, 탄압이 가장 심했던 UC버클리에서 “자유발언 및 인권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시위와 맞물려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죽기도 했다. 그러니까 1980년대에 한국에서 벌어졌던 상황이 1960년대 미국에서도 일어났다. 미국의 ‘빨갱이 사냥’은 어떤 점에서 미국 시민들에게 민주주의와 인권의 중요성을 심어준 셈이기도 했다.

2023년 한국에서도 이미 폐기된 반공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런 반공주의, 빨갱이 사냥이 남긴 것 중에 좋은 건 없었다. 1950년대 미국의 역사를 살펴봐도 그렇고 우리의 과거를 짚어봐도 그렇다.

2021년 8월 15일. 독립운동을 하며 갖은 고초를 겪은 뒤, 타국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난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셔 왔다. 공군에서는 서로 다른 기종 여섯 대의 전투기가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실은 수송기를 엄호했다. 딱 2년이 지났을 뿐인데, 육군사관학교에서는 교정에 설치되어있던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하기로 했다. 그가 소련의 시민이었다는 게 이유였다.

2022년에 복권된 오펜하이머도 그랬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모든 게 원래 상태로 되돌아올 것이다. 결국, 이번 사태는 훗날 일어나서는 안 될 현 정부의 우스꽝스러운 오점으로 기억될 것이다.

글쓴이

김현철 인하대 물리학과 교수

필자인 김현철 교수는 현재 인하대 물리학과 교수 및 프런티어학부대학 학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강력의 탄생> (2021)과 <그렇게 물리학자가 되었다> (2022)가 있다. 30년 넘게 핵물리학과 강입자 물리학 분야에서 연구하고 있고, 지금까지 핵물리학과 입자물리학 분야에서 200여 편의 논문을 출판하였다.

댓글

    함께 읽을 글

    칼럼 전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