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은 어떻게 생겨났고 발전했을까

[최성호의 사람 사는 건축] 건축으로 본 안양의 발전 첫 출발은 정조시대 ‘만안교’ 경부선 부설후 신흥도시로 부상

한여름철의 만안교와 주변 풍경. 사진= 최성호
한여름철의 만안교와 주변 풍경. 사진= 최성호

요새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근대 건축에 관심을 가지고 돌아보고 있다. 이미 대구 근대건축에 대한 글을 올렸지만, 여러 도시에 있는 우리나라 근대건축에 대한 자료를 살펴보며 앞으로도 근대건축물에 대한 글을 쓸 예정이다. 안양의 만안교는 근대 건축물은 아니지만 단순히 문화재를 넘어 현재 안양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만안교가 있기까지의 과정과 만안교 때문에 변화한 안양을 살펴보려 한다.

정조대왕 때 축조한 만안교

경기도의 안양은 안양리라고 불렸던 조그마한 동네에서 출발했다. 조선후기 정조대왕이 원행 때 과천길 대신 시흥길을 이용하면서 사람 통행이 늘어나고 발전하게 된 것이다.

1호선인 관악역을 내려 1번 출구에서 안양시내 쪽으로 600m 정도 가면 정조 때 축조한 돌다리인 만안교(萬安橋)가 있다. 만안교는 단순히 ‘도(道)유형문화재 제38호’라는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넘어, 현재 안양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안교가 있었기에 현재의 안양이 있게 됐다고 해도 될 정도다. 안양시 만안구라는 명칭도 만안교에서 나온 것이니 만안교가 얼마나 안양의 성장에 기여했는지 알 수 있다.

다리 아래 산책길에서 본 만인교. 사진= 최성호
다리 아래 산책길에서 본 만인교. 사진= 최성호

만안교는 정조대왕의 명에 의해 만들어진 다리다. 정조 13년(1789년)에 현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인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 묘인 영우원(永祐園)을 화성의 현륭원(顯隆園)으로 옮기며, 정조의 원행(園行)이 시작됐다. 이후 1793년 12월 11일 신도시인 화성의 규모가 결정되고 1794년 화성 성역이 시작되면서 정조의 원행이 더 잦아졌다.

시흥길이 생기기 전 원행을 하는 길은 노량진에 가설된 주교(舟橋)를 건너 현재 사당동과 과천을 지나는 길이었다. 그런데 이 길이 고개가 많아 다니기가 불편했기 때문에 정조가 새로운 길을 찾아보라고 했다. 일설에는 인덕원에서 과천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냉정리 고개(찬우물 고개)에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김상로의 형인 김약로 묘가 있었는데 원행 중 정조가 쉬면서 ‘이를 보기가 싫으니 노정을 바꾸라’고 하명했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야사일 뿐이다. 과천길은 고개가 많아 불편해 새로 길을 찾으라고 한 것이다. 새로운 길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정조 18년 4월 2일에 나온다. 경기감사 서용보는 정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현륭원에 거동할 때에 연도에 있는 지방 가운데 과천(果川) 지역은 고갯길이 험준하고 다리도 많기 때문에 매번 거동할 때를 당하면 황송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누를 길이 없습니다. 또 길을 닦을 적에 백성들의 노력이 곱절이나 들어가므로 주상께서 이런 폐단을 깊이 염려하여 여러 차례 편리한 방도를 생각해보라는 명이 있었기에 전후의 도신(道臣)들이 모두 금천으로 오는 길이 편하다는 내용을 이미 진달하였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기록에 ‘살펴본 결과 길이 평평하고 넓고 거리 차이도 없어 이 길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고, 다음해 원행을 할 때 사용하도록 남당성(南塘城)을 쌓고 남은 돈 1만 3천여 냥을 쓰겠다’고 했다. 이 돈으로 만들어 것이 만안교다.

만안교는 정조 19년(1795년) 10월 4일 완공됐다. 이때 일성록 기록을 보면 “석교의 홍예수문(虹霓水門)은 5칸으로, 길이가 100자이고 너비가 22자이고 높이가 15자이며, 좌우 선창(船艙)*의 석축(石築)은 총 160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만안교는 홍예수문이 7칸이다. 현 만안교 옆에 있는 만안교비*에도 수문을 5칸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원래는 5칸이었던 것을 언젠가 7칸으로 개축한 것으로 보인다. (주* 선창船艙 : 물가에 배를 대고 짐을 싣거나 부리게 만든 시설. 여기서는 석교 주변의 흙이 쓸려가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쌓은 석축을 말한다. * 만안교비 내용 : 延可十五丈袤可四丈高可三丈爲閘者五逮上. 길이는 15장이고 폭은 4장, 높이는 3장이고 수문은 5개가 있다. 만안교비에 표기한 자는 주척周尺으로 1척은 약 2m 다.)

국도 1호선 공사로 옮겨진 만안교와 만안교비

현재 만안교는 원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있는 위치에서 안양시내 쪽으로 450m정도 내려간 곳에 영화아파트가 있는데 영화아파트 외벽에 과거 만안교가 있었던 곳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현 위치로 이전한 것은 국도 1호선 확장 때문이다.

이전은 1979년에 계획돼 만안교는 1년 뒤인 1980년에 옮겨졌다. 만안교는 이미 1979년 당시 경부선을 부설하면서 물길이 변해 다리로서의 기능을 잃었다고 한다. 1979년 이전 사진을 보면 만안교는 국도 1호선의 교량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만안교 위에 난간까지 설치돼 있었다. 1979년 경향신문 기사에 의하면 길이 31.4m 폭 8m였다고 한다.

만안교 옆에는 만안교비가 있다. 이 역시 만안교가 옮겨오면서 같이 옮겨진 것이다. 지붕 형태로 된 이수가 올려 있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비다. 거북모양의 귀부를 보면 석공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정조의 관심사였던 만큼 실력 있는 석공이 만든 것이다. 앞쪽에는 붉은 글씨로 ‘萬安橋(만안교)’라고 쓰여 있고 뒤쪽에는 다리가 세운 경과를 써놓았다. 이 이름은 정조가 내렸다. 만안교는 착공한 지 3개월 만에 완공됐다. 글을 지은 사람은 이 다리를 만든 경기관찰사인 서유방(徐有防)이고, 전면 글은 유한지(俞漢芝), 뒷면 글은 조윤형(曹允亨)이 썼다.

만안교가 옮겨질 때 같이 옮겨진 만안교비. 사진=최성호
만안교가 옮겨질 때 같이 옮겨진 만안교비. 사진=최성호

만안교에 대해 경기관찰사, 병마수군절도사, 강화, 개성 유수부가 동원된 큰 공사라고 하는 글이 있지만, 비문을 보면 서유방이 관찰사와 병마절도사 그리고 수원, 강화, 개성, 광주 유수를 겸직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므로 여러 고을이 동원된 큰 공사는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기본적으로 관찰사가 병마절도사를 겸하고 있고, 여러 직을 겸직하는 경우가 있어 서유방이 여러 직을 겸직한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또한 수원, 강화, 개성, 광주부는 서울 방위를 책임지는 곳이므로 경기관찰사 겸 병마절도사가 관장할 수 있는 곳이다.

만안교비 정면 모습. 사진=최성호
만안교비 정면 모습. 사진=최성호

안양의 발전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교통의 발달은 도시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다.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경의선을 급하게 부설해야 했다. 신속한 철도부설을 위해 땅 수용 등의 문제로 시간이 늘어질 가능성이 있는 큰 도읍을 비켜갔다. 이런 철도부설 덕에 기존 도읍보다 커진 곳이 있으니 대표적인 곳이 문산, 신의주 같은 곳이다. 예전에는 파주에서 중요한 곳이 주내였지만 철도역이 생긴 후 문산이 더 큰 읍으로 발전했다. 신의주도 의주를 제치고 평안북도 제일의 도시가 됐다.

이처럼 도로나 철도가 새로 부설되는 것에 따라 도시 성쇠도 결정된다. 안양 발전도 교통 변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 현재 안양지역은 과거에는 과천현과 금천현에 나뉘어 있었다. 과천현은 관악산을 중심으로 이북은 현재 압구정을 포함한 한강까지, 이남으로는 현재 인덕원과 평촌까지 관할지였다. 고려 때 금주(今州)라 불렸던 금천현은 조선시대초 금천(衿川)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금천은 경계 변화가 있었지만 북쪽으로는 지금 영등포, 남쪽으로는 안양의 석수동와 박달동까지가 관할이었다.

정조대왕의 명으로 새로운 원행 길이 만들어지면서 금천이 시흥(始興)으로 이름이 바뀌고 시흥과 안양에 새로 행궁이 세워졌다. 그리고 이전에 목교였던 다리를 석교로 만들면서 만안교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새로 길이 만들어지고 나니 시흥길을 따라 통행이 많아지면서 도시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시흥길은 후에 국도 1호선이 되고 이 길을 따라 경부선이 놓이며 더욱 발전했다.

시흥군 청사 따라 도시중심도 오락가락

그러나 지금 이름인 안양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안양은 1914년까지 시흥현과 과천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런 시군 편제가 일제강점기에 크게 변했다. 일제는 군(郡)은 인구 10만을 기준으로 통합하도록 했다. 이때 시흥군, 과천군, 안산군이 시흥군으로 통합됐고, 현재 안양지역은 일제 강점기 때 서이면(西二面, 1917~1941)이 됐다. 1941년 10월부터는 안양면으로 됐는데, 1949년 8월까지 그대로 존속됐다. 즉 안양이란 이름은 이때 확정됐다.

무엇보다 철도 부설이 안양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안양을 지나면서 철도 노선을 따라 공장이 속속 들어섰다. 1928년 조선방직, 조선견직 등 큰 규모의 회사가 건립되면서 도시가 급속하게 성장하자 성장의 중심이었던 안양리를 면 이름으로 정한 것이다. 이후 군청사가 이곳으로 옮겨졌고 시흥군의 중심이 됐다.

일제 강점기때 시흥군 청사는 시흥군 군내면 시흥리에 있었다. 그러나 1905년 시흥군 영등포리에 영등포역이 개설되면서 영등포가 급격하게 발전했다. 그러자 시흥군청사가 1910년 12월 영등포로 이전했다. 이후 경성 재편계획에 따라 1936년 2월 14일 영등포지역이 경성에 편입되면서 이곳에 있던 시흥군 청사가 안양으로 이전했다. 이로써 안양이 시흥 지역의 중심이 된 것이다.

이후 시흥은 서울의 팽창에 따라 1963년 1월 1일부터 영등포 관할로 되면서 급속히 축소됐다. 과거 큰 읍이었던 시흥은 2018년 12월 29일 시흥역명이 금천구청역으로 바뀌었고, 시흥이란 이름은 금천구 시흥동으로 흔적만 남게 됐다. 조선시대 지역 이름이었던 금천으로 돌아가면서 시흥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글쓴이

최성호 건축가

필자인 최성호는 오랫동안 한옥과 한국문화를 공부해온 건축설계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건축사다. 블로그도 운영하고 있다. 필자의 블로그 주소는 https://blog.naver.com/seongho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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