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는 왜 ‘나치’ 하이데거를 사랑했나②

[홍성광의 독일 철학자들의 사랑 이야기] 50년에 걸친 연인과 증오, 화해와 위로 하이데거에게도 ‘악의 평범성’을 보았을까 아렌트, ‘하이데거의 실패는 부인 탓’ 믿어 재회 끝 화해...다섯달 간격으로 영원한 이별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 당시의 한나 아렌트.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 당시의 한나 아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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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에 이어서

하이데거 지지로 돌아선 아렌트

1941년 한나 아렌트와 그녀의 남편 하인리히 블뤼허는 스페인 리스본을 거쳐 미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이들은 1941년 5월 뉴욕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부부의 수중엔 단돈 25달러밖에 없었다. 뉴욕 맨해튼 웨스트 95번지의 초라하고 좁은 방에서 그녀는 『전체주의의 기원』을 집필했다. 그녀는 벤야민의 자살 소식을 듣고 「W. B.」라는 제목을 붙인 작별의 글을 썼다.

“목소리는 멀리 있고 슬픔은 가까이에 있다.

이들은 목소리이고 이들은 죽은 자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미리 전령사로 보냈다,

그들이 우리를 잠으로 이끌도록”

파리에서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발터 벤야민이 맡긴 소중한 원고를 아렌트는 뉴욕에 갈 때도 가지고 갔다. 그녀는 후일 이에 주석을 달고 편집 출간함으로써, 발터 벤야민은 20세기의 중요한 문화적 아이콘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그런데 한나 아렌트는 왜 다시 하이데거 지지자로 돌아섰을까. 나치의 박해를 받아 숱한 죽을 고비를 넘겼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라는 책자를 집필하며 나치의 잔혹함을 거듭 확인한 그녀가 왜 다시?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점 역시 이것일 것이다. 앞서 히틀러를 향한 하이데거의 공개적 충성 서약은 아렌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하이데거의 총장 취임사는 그에 대한 환상을 낱낱이 부수었고, 망명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아렌트는 하이데거를 비롯한 독일 지식인들이 히틀러를 지지하고 서구 문명을 배신했으며, 무분별과 비겁함을 보여주었다고 맹비난하게 되었다. 특히 하이데거의 아내 엘프리데는 만사를 제쳐두고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1950년 이후 한나 아렌트는 제3제국에 대한 하이데거의 협력과 지지의 의미를 최소화하고 정당화하는 데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는 나중에 하이데거가 다른 동조자들보다 더 빨리, 더 철저하게 자신의 ‘실수’를 수정했다며, 그 기간에 독일 문학계와 학계가 겪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위험을 감수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언급은 어느 것도 사실로 입증되지 않았다. 아렌트는 1950년에 하이데거와 처음 재회한 이후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이데거를 위한 아렌트의 헌사는 그에 대한 흔들림 없는 관용과 충성, 사랑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다.

처음 만날 때인 1920년대 중반 두 사람 사이는 하이데거가 주로 말했고, 아렌트는 잠자코 경청하는 식이었다. 하이데거 모놀로그는 자신의 철학적 사유, 고대와 현대 철학, 문학, 음악, 자연에 관한 것이었고, 이는 청소년 시절부터 아렌트를 사로잡아 온 주제들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바흐와 베토벤, 릴케와 토마스 만을 좋아했고, 시간에 대한 성찰이 담긴 토마스 만의 장편 『마의 산』에 대해 열광했다.

아렌트는 첫번째 남편 귄터 슈테른을 통해 하이데거의 인종적 편견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슈테른은 스승과 긴 토론을 한 끝에 하이데거의 “정치적 반동주의 성향과 극우 민족주의”를 확신하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카를 야스퍼스도 1920년대에는 하이데거가 반유대주의자가 아니라고 잘못 알고 있었다. 1945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검증위원회에서 야스퍼스는 “하이데거가 1933년에 적어도 몇몇 경우에 반유대주의자가 되었다는 것을 입증한다”라고 진술했다. 반면 야스퍼스는 다른 보통 교수들과 하이데거의 행적을 동등하게 언급함으로써 나치 이념을 향한 그의 복종을 최소화하려 애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랬던 야스퍼스가 유대인 아내 때문에 1937년 교수직을 박탈당할 때, 하이데거는 그를 위해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해고된 하이데거와 조사위원장 된 아렌트

1944년 독일군 향토방위대에 징집당했던 하이데거는 독일이 패전한 이듬해 7월 나치 청산위원회가 구성돼 그곳에 출두해야 했다. 한때 천재 철학자였던 그는 온갖 변명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했다. 1934년 이래로 하이데거는 나치 당국과 관계를 끊었고, ‘장검의 밤’ 사건(Nacht der langen Messer: 1934년 6월 30일 히틀러가 돌격대 참모장 에른스트 룀과 반 히틀러 세력을 숙청한 사건-편집자주) 이후로 그런 극단적인 행위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 나치에 거리를 두기 시작해 총장직에서 물러났음을 친구인 야스퍼스가 증언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 뒤로 하이데거가 감시당하고 위협당했으며 의심을 받았다는 것까지도.

하지만 야스퍼스는 결국 그에 대한 부정적인 보고서를 작성함으로써 하이데거의 교직원 자격 박탈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46년 1월에 하이데거는 해직되어 봉급의 일부를, 그다음에는 연금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참회의 말 한마디 없이 그는 깊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심연의 가장자리에서 추락한 하이데거는 스승 프리드리히 횔덜린 처럼 광기를 선택했으나, 그 시인과는 달리 석 달 만에 정신이 돌아왔다.

미국으로 떠났던 한나 아렌트는 1949년 유대인 문화재건위원회 조사위원장을 맡아 자주 유럽 각국과 독일을 방문했다. 그해 12월 그녀는 오랫동안 재회를 기다려 왔던 야스퍼스 부부를 스위스 바젤에서 만났다. 야스퍼스는 그녀에게 하이데거와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보여주었다. 그 답례로 아렌트는 젊은 시절 하이데거와 있던 연인 관계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러자 야스퍼스는 “오, 이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가!” 하고 응수했다. 두 사람 모두 하이데거에 대한 악감정에 가까운 의구심을 지니고 있었고, 자신들의 삶에 하이데거가 남긴 정서적 대혼란에 대해서도 여전히 매듭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아렌트는 야스퍼스를 만난 이후 하이데거를 만나고픈 생각이 점점 사라져갔다. 그러나 1950년 2월 7일 아렌트는 친구로부터 하이데거의 주소를 알아내어 자신이 묵는 호텔에서 첫 재회를 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두 사람의 과거 연애에 대해 자신의 아내가 알고 있다고 짧게 언급했다. 아렌트는 남편 블뤼허에게 편지를 보내 하이데거가 그 어느 때보다 정직하고 개방적이라고 말했다. “우리 생애에서 처음으로 우리는 서로 진정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내게는 그렇게 여겨졌어요.”

두사람의 재회, 질투하는 하이데거의 아내

하이데거는 아렌트에게 ‘자신을 유명 철학자가 아니라 악의적인 비방과 혐의로 망가져 버린 늙은 남자로 봐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하이데거는 우울증과 실어증을 앓고 있었다.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그의 시련에 호응했으며, 이어 연민을 느꼈고 마음마저 동요했다. 다음날인 2월 8일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집을 찾아가 부인 엘프리데를 만났다. 이를 지켜본 하이데거는 두 여자의 대화에 대해 ‘논쟁’이 아니라 자발적인 ‘화해’, 즉 명확하고 개방적인 분위기에서 세 사람 모두에게 신뢰가 형성된 화해였다고 간주했다. 반면 아렌트는 엘프리데의 직설적이고 단호한 태도에 적이 당황했다. 아렌트는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 ‘이상한’ 대화 도중에 엘프리데를 향한 ‘돌연한 유대감’과 ‘갑작스럽고 압도적인 깊은 공감’을 느꼈다고 썼다. 그러나 두 여인의 감정은 실은 더 복잡했다.

그 시절 하이데거에게는 세상과의 소통을 위한 홍보대사가 필요했다. 아렌트는 그 역할을 순순히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저명한 유대인이 하이데거를 지지하면 하이데거의 반유대주의 혐의가 어느 정도 상쇄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두 여자의 조화롭고 자발적인 화해는 쉽지 않았다. 엘프리데는 남편이 사랑한 여자, 그것도 유대 여자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아렌트도 엘프리데의 반유대주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엘프리데는 두 사람의 과거에 대해 석연치 않은 궁금증이 여전했고, 이에 대한 해명을 바랐다.

한나 아렌트와 남편 하인리히 블뤼허.
한나 아렌트와 남편 하인리히 블뤼허.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저서를 미국에서 출판하는 일에 극구 반대했지만, 첫 재회 이후 그를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하는 에이전트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하이데거의 나치 전력을 가리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아렌트의 남편 블뤼허도 철학을 위해서는 아렌트가 하이데거의 편에 서야 한다고 아내를 격려했다.

그러나 아렌트가 하이데거의 무죄를 주장한 것은, 충성심이나 공감, 혹은 정의감에서라기보다는 그녀 자신의 자부심과 존엄을 지키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하이데거가 자신 이외에는 그 누구와도 정신적 유대감을 공유하지 않았다고 굳게 믿었다. 그녀는 심지어 엘프리데가 하이데거의 모든 불운의 근원이며, 남편의 명성을 손상시켜 주변에 적대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확신하기도 했다.

1950년에 하이데거가 아렌트에게 보낸 편지에는 권력의 영광을 되찾아 보려는 그의 욕망이 담겨 있었다. 1951년 2월에 아렌트는 다시 하이데거를 방문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두 여자의 ‘분란’을 우려한 하이데거는 굳이 방문하는 수고를 하지 말라고 요청한다. 아렌트의 편지는 번번히 엘프리데에게 검열당했고 그녀의 방문은 환영받지 못했다.

다음해인 1952년 5월 19일에 아렌트가 하이데거 집을 방문했다. 엘프리데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하이데거는 주기적으로 우울증에 시달렸는데, 아렌트는 그가 악한 여성의 손아귀에서 고통받고 있으며 무력하고 무방비한 상태에 처해 있다고 상상했다. 하이데거의 나치 전력에 대해서 무죄를 주장했듯이, 아렌트는 하이데거 부인의 ‘정치적 신념’을 극우의 저속한 신조 탓으로 돌렸다. 그녀는 이로써 이념을 공유한 부부를 따로 분리해 생각하기도 했다.

노년의 마르틴 하이데거.
노년의 마르틴 하이데거.

권위를 회복하려던 하이데거

1955년이 되어서 하이데거는 다시 예전의 권위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제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무죄를 주장해 주고, 명예 회복에 도움을 줄 아렌트의 효용성이 떨어졌다. 1955년 독일 여행에서 아렌트는 하이데거를 만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제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삶에서 엘프리데가 차지하는 절대적인 위치를 인정해야만 했다.

1958년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 미국에서 출판되었고, 독일어판 번역본은 『활동적인 삶(Vita activa)』이라는 제목으로 1960년에 나왔다. 인간의 정치활동에 관한 아렌트의 사유를 담은 이 책은 작업과 노동으로 구분되는 행위와 말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책은 마부르크 대학 초창기 시절에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아렌트가 이 책을 하이데거한테 헌정하려던 것을 보류하는 바람에 그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하이데거는 두 사람 간의 문제인데 아렌트가 혼자 독자적인 결정을 내리고 독립적인 인간으로 사고하고 행동한 것에 분노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아렌트의 성공적인 삶으로 인해 자신을 숭배했던 사도 한 사람을 뺏기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한테 충실했을 때나 그렇지 않았을 때도 언제나 사랑에 빠져 있는 아렌트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1966년에 하이데거는 지난 일은 잊기로 했다는 듯이 아렌트에게 긴 편지를 보냈다. 다음해 아렌트는 1952년 이후 다시 하이데거를 방문했다. 그녀는 엘프리데와 화해하지 않고는 하이데거와 관계 회복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렌트는 엘프리데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하이데거는 발터 벤야민에 대한 아렌트의 글을 읽었다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렌트를 칭찬했다. 1969년에 아렌트는 또 남편 블뤼허와 함께 하이데거 부부를 방문했다. 같은 해에 카를 야스퍼스는 여러 가지 질병과 청력 상실로 고통을 겪다가 하이데거와 끝내 화해하지 못한 채 3년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86세의 나이였다.

1969년 4월 엘프리데는 돈이 필요하자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필사본을 팔기로 했다며 아렌트에게 도움을 청했다. 1973년에는 하이데거의 건강이 나빠지자 엘프리데는 바깥세상과의 접촉을 통제했지만 그럴수록 하이데거는 더 우울해졌다. 그는 아렌트를 만나는 일만은 간절히 원했다.

생애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아렌트에게 보내는 하이데거의 편지는 따뜻했고 깊은 배려가 담겨 있었다. 1975년 아렌트는 유럽 문명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덴마크의 <소닝 상>(Sonning Prize)을 수상했다. 하이데거는 시상식에 관한 언론 보도를 놓친 것이 애석하다고 표현했다. 1974년에 이르러 하이데거는 아렌트가 제안한 자신의 저작 선집 출간에 동의했다. 하이데거는 아렌트의 체력 소모와 슬픔, 그녀의 상황 등에 대해 염려했다. 서로 주고받는 편지에는 이제 체념의 어조가 담겼다.

아렌트는 1974년 “그 누구도 당신이 했던 것처럼 강의할 수 없어요. 당신 이전에도 그런 사람은 없었어요”라고 편지에 썼다. 아렌트는 1975년 8월 중순 마지막으로 하이데거를 방문했고, 그로부터 넉 달 후인 1975년 12월 4일 한나 아렌트는 세상을 떠났다. 하이데거는 그로부터 다섯 달 후인 1976년 5월 28일 영원한 침묵의 세계로 떠났다. 그녀의 나이 69세. 그의 나이 87세였다. 유대인 소녀와 나치로 타락한 천재 철학자의 50년에 걸친 사랑이었다. 실존주의에 대한 열정으로 만난 두 사람의 사랑은 실망과 체념을 거쳐 죽음의 허무로 끝을 맺었다.

글쓴이

홍성광 번역가

홍성광은 서울대 독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독문학박사로, 독일 문학 및 철학 관련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독일 명작 기행』, 『글 읽기와 길 잃기』, 역서로 루카치의 『영혼과 형식』,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 니체의 『비극의 탄생』,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계보학』, 토마스 만의 정치 에세이 『예술과 정치』, 『마의 산』(상·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상·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외』,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젊은 베르터의 고뇌』, 실러의 『도적들』,『간계와 사랑·빌헬름 텔』, 헤세의 『데미안』, 『수레바퀴 밑에』, 『싯다르타』, 카프카의 『성』,『소송』,『변신 외』,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총론』(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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