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문과 논리와 똑똑한 이과 바보

[목성인과 칸트와 친절한 AI씨] ①편, 지식을 전하는 소통을 글쓰기 목적으로 삼는다면 실제 우리의 소통법엔 문제없을까?

1.

지식을 잘 전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글을 쓰는 게 좋을까?

2.

나는 목성에 갔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말은 놀이 수단이지 대화의 도구는 아니었다. 그들의 언어를 제대로 된 문장으로 번역하면 도무지 의미가 전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말하고 토론까지 하는 모습이 기이하다 여기니, 실은 자신들은 텔레파시로 지식을 전한다고 말했다. 존재하는 무생물과 생물로부터도 텔레파시로 정보를 얻는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목성은 신이 사는 곳이냐고. 나는 이 이상한 행성을 헤매다 겨우 돌아왔다. 얼마 전의 일이다.

3.

지식은 개념으로 이루어졌다. 이과 지식이든 문과 지식이든 어느 분야의 지식이든 모두 언어로 표현된 지식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쉬운 단어와 명확한 문장은 이쪽이든 저쪽이든 지식을 준다. 어려운 단어와 불명확한 문장이라면 분야를 막론하고 지식을 전하기 어렵다.

먼저 단어를 살펴 보자.

자기들끼리만 통용되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다고 한탄해서는 안 된다. 흔히 이과는 영어 알파벳 약어를 남발하고, 문과는 한자어를 과용한다. 지식을 전하고 싶으면 가급적 약어와 전문 용어를 쓰지 않는 게 좋다. 당신이 그런 약어와 용어를 쓰지 않았다고 해서 사람들이 당신의 지적 수준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약어와 용어를 남발한다. 아마도 그 까닭은 거의가 타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지식을 전하는 데 관심이 적거나, 이너서클에서 소통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언어 수준이 지식을 전할 만큼의 능력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역지사지 관점으로 타인의 입장에서 자기 표현을 점검할 것을 권한다. 이너서클에서 청춘과 노년을 낭비하지 말고 더 넓은 세계에서 활약해 주기를 바란다. 역량이 부족하다면 어휘력 연습을 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싶다. 어휘력은 국어사전 한구석에 숨어있는 기똥찬 단어나 잔뜩 어깨에 힘준 지식인의 단행본에서 얻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평범하게 사용하는 보통의 언어를 더 주의깊게 경청함으로써 획득하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단어, 직장인의 담소에서 들리는 표현, 입술 냄새 나는 언어가 좋다.

약자와 전문 용어를 써야 한다면, 약자를 풀어 주고, 용어를 쉽고 ‘충분하게’ 정의해 준 다음에,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물론 귀찮은 일이다. 귀찮아서 그냥 넘어가기 일쑤다. 그런데 소통이란 원래 피곤한 ‘일’이다. 내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타인의 머릿속으로 보내는 것은 텔레파시로 간단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더 잘 전달하려면 더 알맞은 언어가 필요하다. 우선 그 최소 단위의 언어인 단어 선택에 유의해야 한다. 사람마다 어휘력이 다르기 때문에 귀찮더라도 어쩔 수 없다.

계급사회에서는 아랫사람에게 받아적으라고 강요하듯 간단히 말을 던질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런 방식은 저항감을 낳는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소통 문화는 우리에게 더 평범한 단어 선택을 ‘요청’한다. 그러나 권위적인 사람은 타인의 어휘력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자기 편리하게 단어를 선택하고, 그것을 강요하고 싶어한다.

4.

설령 단어를 쉽게 풀어서 이야기해도, 문장이 복잡하면 지식이 잘 전해지지 않는다. 문장력의 문제라기보다는 논리에 흠이 있거나 혼란스러운 문제임을 염두에 두자. 글은 화려한데 당최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는 경우가 있고, 문장은 대수롭지 않지만 기분 좋은 글을 체험할 때도 있다. 이 차이는 무엇일까? 사람들의 문장에는 다양한 사건들이 있다.

(1) 예를 들어, {X1, X2, X3, X4}로 이루어지는 집합 A가 있을 때, 먼저 A를 설명해 준 다음에, X1, X2, X3, X4를 이야기하는 것이 건전한 상식이다. 그러나 A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고, 성급하게 X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동서남북의 방향을 모르더라도 여행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여행으로는 제대로 지식을 얻을 수 없다. X에 관하여 논문, 정책 제안서, 판결문을 쓸 때(특히 영미권에서), 집합 A에 대해 먼저 자세히 설명하는 까닭은 그 X에 대한 더 충분한 지식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상당수 사람들이 귀찮다는 이유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

(2) 만약 X1→X2→X3→X4의 순서 관계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X1를 설명한 다음에 X1의 결과인 것처럼 X4를 바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논리적으로 심각한 결손이지만, 정작 그들은 이 문제를 알아채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머릿속에 X2와 X3이 편안하게 들어있으므로 X1→X4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그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X1은 원인이 되고, X4는 결과이다. 그러나 그 설명을 듣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X2와 X3은 오리무중이다. 설령 X1→X4이 매우 논리적인 견해이며(화자의 머릿속에는 X1→X2→X3→X4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견해를 근거로 어떤 지식을 전하려고 할지라도, X2와 X3이 없으면 수많은 우연이 X1과 X4 사이에 개입될 수 있다. 그러면 원인과 결과의 결속력은 약해지고, 괜히 과장하는 것처럼 비쳐진다. 화자와 동일한 머리 구조가 아닌 청자들에게 그런 지식은 설득력을 잃는다. X2와 X3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표현되어야 비로소 알맞은 인과관계가 만들어짐을 잊지 말자.

경험적으로 보건대(고로 믿지 않아도 좋다), 이과형 사람들의 문장에서 자주 (1)번 사건이 발견되었고, 문과형 문장에서 (2)번 사건이 흔히 발견되었다. 그러나 지식의 전달에 무관심하거나 무능력한 사람들의 문장에서는 두 가지 사건 모두 발견된다. 물론 지식을 잘 전하는 사람들의 문장에서는 문과 이과 구별을 불문하고 이같은 사건들이 별로 발견되지 않았다.

5.

사람들의 문장에는 지식의 특징을 둘러싼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한다.

(3) A={X1, X2, X3, X4}이라는 집합에서 X3이 특히 중요하다고 가정하자. 이런 경우에는 반복을 하든 비교를 하든 비유를 하든, X3을 몇 번이고 강조하면서 더 자세히 이야기해줘야 한다. 사람들은 내 마음 같지 않다. 강조하지 않으면 자꾸 오해하고, 제멋대로 편리하게 생각한다. 나는 X3를 가리켰음에도, 집합 A를 생각한다거나 자기들의 관심사에 따라 다른 X1, X2, X4에 눈길을 놀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X1, X2, X3, X4를 비슷한 분량으로 설명하는 평화로운 사람들이 있다.

(4) 그런데 X3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A라는 집합은 A={X3}이 아니다. 그러므로 X1, X2, X4의 존재를 언급해 줘야 한다. 한 줄이어도 좋다. 하지만 X3만 언급하면서 문제가 생겼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머릿속에 X1, X2, X4가 매우 당연하게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설명을 듣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X1, X2, X4는 오리무중이다. 그것들이 당연하게 들어있는 것도 아니다.

이과형 사람들의 문장에서 자주 (3)번 사건이 발견되었다. 그들이 억울해할지도 모르겠다. 분명 설명해 줬는데 어째서 사람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것일까? 사람들의 귀가 공평하게 듣는다면 머리는 공평하게 까먹는다. 한 번 설명한 것만으로 저 무서운 공평함을 극복하기 어렵다. 문과형 문장에서 (4)번 사건이 흔히 발견되었다. 그들도 억울해할지 모르겠다. 분명 그 특징을 아주 ‘자세히’ 설명해 줬는데 어째서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것일까? 글이 문제가 아니라 맥락이 숙제이다. 글에도 나침반이 요청된다. 그런데 지식의 전달에 무관심하거나 무능력한 사람들의 문장에서는 두 가지 사건 모두 발견되었다. 물론 지식을 잘 전하는 사람들의 문장에서는 문과 이과 구별을 불문하고 이같은 사건들이 잘 발견되지 않았다.

6.

칸트는 개념이 생각을 만들어 낸다고 말했다. 개념이란 머릿속에 있는 단어를 뜻한다. 수만 개의 단어가 머릿속에 있다. 거기서 단어를 꺼내 ‘어떤 상황’에 적용하는 일이 생각이다. 꺼낸 단어가 다르면 생각도 달라질 수 있다. 지식은, (1) 머릿속에서 꺼낸 단어들과, (2) 그런 단어들의 연결을 통해 이루어진다. (1)과 (2)를 합친 것이 글이 되고, 그 글을 통해 지식이 전달된다.

그러므로 (1) 글로 지식을 전하려는 사람들은, 화자가 자기 머릿속에서 꺼낸 단어를 청자도 머릿속에서 꺼낼 수있도록, 애써야 한다. 청자에게 그런 단어가 없을 수도 있다. 청자를 탓할 게 아니라, 화자가 청자의 머릿속에서 그런 단어가 알맞게 자리잡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단순히 떠드는 게 목적이 아니라 지식을 전하려는 소통을 글쓰기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약어를 쉽게 풀어주고, 전문용어를 충분히 설명해 주며, 알맞지 않은 단어는 다른 후보로 바꿔주는 친절함을 잊지 말자.

(2) 단어와 단어의 연결은 ‘논리 집합’에서 이루어진다. 집합이 다르면 연결되지 않는다(연결한다면 비논리). 같은 집합 안에 있는 단어여도 가중치가 다를 수 있다. 가중치가 있는 단어는 진하게 표현돼야 한다. 집합 안에서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연결에 순서가 있을 때, 그 순서를 일컬어 ‘인과관계’라 한다. 집합과 원소를 구별해서 설명해 주고, 순서를 빼먹지 말고 표현하며, 가중치도 고려해서 글을 쓴다면, 대체로 성공할 것이다. 실제로 AI가 그렇게 설계돼서 일하고 있다. 인간의 머리도 다르지 않다. 내 머릿속에서 발생한 이런 일들이, 내 글을 읽는 상대방의 머릿속에서도 생겨나기를 원한다. 우리는 그런 ‘머릿속 상황’을 목적으로 글을 쓴다. 목적이 달성되는 그때 비로소 지식이 전달되고 좋은 소통이 이루어진다. ②편에 이어진다.

글쓴이

코디정 언어활동가

코디정은 오랫동안 경계를 넘나들며 수많은 텍스트를 읽고 편집하고 써왔다. 변리사로 경제활동하며(특허법인임앤정), 대학교에서 강의하기도 하고(숭실대학교 국제법무학과 겸임교수), 책을 편집하기도 하며(이소노미아 편집장), 유튜브를 운영하기도 한다(코디정의 지식채널). <생각과 표현을 보호하는 지식재산레슨>, <괘씸한 철학 번역> 등 아홉 권의 책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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