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이란 무엇인가
[목성인과 칸트와 친절한 AI씨] ⑤편 현상이란 무엇인가 양자역학의 관찰자처럼 “현상은 생각의 대상이 된 데이터” 지성은 상상력으로 현상을 처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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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먹은 양식은 분쇄, 운반, 분배, 흡수 과정을 거쳐 몸 안 37조 개의 세포에 공급되는 영양분으로 변하거나 아니면 몸 밖으로 배출된다. 인체 안에 서식하는 세균과 바이러스의 수효가 인간 세포보다 더 많다고 하니, 한 사람의 몸은 얼마나 크길래 저 많은 존재가 있는 것일까? 그런데 이 작은 우주 안에는 훨씬 ‘작고 방대한’ 형용 모순의 우주가, 무려, 무수히 많고, 그 우주에서는 모든 것이 양자역학의 지배를 받는다. 그래서 저 음식이라는 ‘형태 있는 것’을 원자 단위까지 추적하다 보면, 그것들은 미지의 심연에 빠져 영 알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그렇다면 ‘형태 없는 것’은 어떨까?
눈이며 귀며 코가 부지런히 활동한 덕분에 수많은 데이터가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이 형태 없는 데이터는 형태 있는 세포 안으로 들어가 머릿속 어딘가에 머무는데, 우리는 그것을 속속들이 알 수 없기 때문에, 그저 데이터라 부를 뿐이다. 그리고 철학자들은 그 데이터를 일컬어 인간의 감수성이 받아들인 ‘표상’이라 불렀다. 표상은 머릿속 심연 속에 빠져 그 행방을 알지 못한다. 대부분의 표상은 심연 중의 심연 속에 빠져 불러낼 수 없지만, 어떤 표상들은 불러내서 붙들어 둘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그 데이터를 콕 집어 ‘생각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 생각의 대상이 된 표상을 일컬어 칸트의 후손들은 ‘현상’(appearanc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데이터는 형태가 없는 것이므로 현상은 세포나 원자처럼 기관이 아니라 모종의 기능에 불과하다. 그것은 그저 ‘생각의 대상‘으로 기능하는 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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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목성에 갔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 이것과 저것을 연결하지는 못한다. 알 수 없는 경전을 되뇌고 난해한 세계를 찬미하지만, 그 세계에 접근하지는 못한다. 목성은 아날로지가 없는 세계였다. 나는 이 이상한 행성을 헤매다 겨우 돌아왔다. 얼마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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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사람들이 ‘양자(quantum)’라 칭하는 작은 알갱이, 이 세계의 모든 것을 구성하는 저 작은 흐름은 묘연하다. 양자는 한 개이다. 그러나 이 한 개의 입자는 두 개의 문을 열고 동시에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물리학자들은 유령처럼 거동하는 이런 양자를 인간이 정확히는 알 수 없노라고 이구동성으로 보고한다. 표상도 마찬가지다. 머릿 속에 있는 것들은 뿌옇고 아득하며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다. 우리는 이 머릿 속 유령을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양자역학에서는 관찰자의 등장이 특이점으로 작용한다. 관찰자가 등장해서는 저 보이지도 않는 알갱이를 보려고 하는 순간, 양자는 묘연함을 버리고 정체를 드러낸다. 이제는 두 개의 문을 동시에 열지 않는다. 그러므로 관찰자에게 보이는 양자의 모습은 존재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과학자가 이런 현상을 가리켜 ‘붕괴(collapse)’라는 단어를 쓴다. 어떤 과학자들은 양자의 흐름이 붕괴된 게 아니라, 다른 우주로 흘러갔다고 해석한다. 이들 견해의 참 거짓은 천국과 지옥이 있느냐의 문제처럼 오리무중이지만, 신기하게도 관찰자가 사라지면 이 작은 알갱이는 관찰자의 부재를 귀신같이 알아챈다는 것이고, 그래서 다시 유령으로 회귀한다.
형태 없는 것은 어떨까? 표상은 감각을 통해 머릿속으로 들어온, 혹은 머릿속 심연에서 꺼내온 온갖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머릿속에서 관찰자처럼 행동할 수도 있다. 그러면 표상이 아득함 속에서 정체를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현상’이었다. 우리가 관찰자를 그만둔다면 현상은 사라지고 표상이 된다. 현상과 표상은 모두 형태 없는 데이터에 불과하고, 우리가 편의적으로 칭한 단어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양자와 달리 장소 자체를 알 수 없다.
양자역학에서 관찰자의 등장은 도구를 동반한다. 양자는 형태가 있는 입자이기 때문에, 형태를 관찰하려면 관찰 도구가 필요하다. 그런데 머릿속 표상은 형태가 없으므로 그런 도구도 없다. 그렇다면 머릿속에서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길래 관찰자가 되는 것일까? 인간은 ‘생각하려는 행동’을 함으로써(뒤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지성이 개입함으로써) 관찰자가 될 수 있다.
만약 x라는 데이터가 머릿속 어딘가에 있다고 가정하자. 그 x는 표상이다. x는 내 머릿속에 있을 뿐, 나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나는 이제 그 x를 생각하려고 한다. 그러면 그 x가 달라진다. 얼굴 없이 유령처럼 머릿속 세계를 유랑하는 데이터가 아니라, 얼굴을 보이는 데이터가 된다. 칸트는 이런 차이를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표상이기는 해도 다른 표상과 구별되는 표상으로서 ‘현상’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 x는 현상이라 칭해진다. 요컨대 현상은 생각의 대상이 된 데이터다. 철학자들은 생각의 참된 대상을 머리 바깥에서 찾지 않았다. 정밀하게 생각하는 그들의 논리는 이러했다. 인간의 머리 안쪽과 머리 바깥은 너무 멀다. 머리 바깥에 위치하는 사물이 머릿속으로 들어올 때, 그것은 인간 머리 형식으로 변환되기 때문에, 더 이상 머릿속 데이터는 머리 바깥에 있는 것과 동일하지 않다. 그러므로 내 머릿속에 있는 무궁화 꽃과 내 바깥에 존재하는 무궁화 꽃은 서로 대응하기는 해도 동일한 것이 아니다. 형태 없는 것과 형태 있는 것이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데이터가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과정은 불가역적이다. 우리 인간은 머릿속에 있는 데이터를 머리 바깥으로 다시 방출하는 초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세상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는 모든 학문은, 세상 그 자체에 대한 지식을 직접 탐구하는 게 아니라, 세상 그 자체에 대한 머릿속 데이터를 탐구하는 것이다. 탐구는 아주 농밀하게 생각하는 행동이므로, 생각의 대상인 현상이 농밀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따라서 학문은 현상을 탐구하는 것이 되니, 아주 엄격하게 말하자면, 모든 학문은 현상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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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상은 생각의 대상일 뿐이지 아직 생각되지 않은 표상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런데 생각이란 무엇일까? 철학자 데카르트는 생각에 관한 가장 유명한 문장을 남겼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 문장을 소리 내서 읽어 보라. ‘생각’을 말하고 ‘존재’라는 단어가 들리기까지 2초 걸렸다. 그런데 철학자들의 시간은 우리와 다르다. 마치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양자를 슬로 비디오처럼 움직이는 야구공 속도로 설명하는 물리학자처럼, 철학자들은 현상을 느리게 관찰한다. 우리도 어느 정도 철학자인 양 굴면서, 생각에서 출발하여 존재에 도착하는 시간을 2초에서 2시간이 되도록 느리게 설정한 다음, 관찰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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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은 머릿속에 있는 데이터라는 점에서 표상이며, 사물이 머릿속에 나타난 것이라는 점에서 대상이다. 인간은 순간을 사는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현상은 한 개의 데이텀(datum)이 아니라 수많은 데이터가 포개진 것이다. 만약 내가 60초 동안 현상을 관찰한다면, 그 현상은 60초 동안의 시간 속에서 단절없이 이어진(즉 1초에 한 개가 아니라 무한히 연결되는) 무수한 다발이어야 한다. 현상은 다른 불순물이 완전히 제거된 순수한 형태의 독립된 표현물도 아니다. 머릿 속에는 수많은 데이터가 있고, 그런 다양함이 동종으로 이종으로 결합되거나 혼합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감수성(sensitivity)에는 데이터를 선별하고 모아주며 다시 재배치하는 기능이 없다. 감수성은 내 바깥에서 아니면 내 안에서 데이터를 가져오는 역할 만을 하기 때문에, 칸트는 이런 감수성이 편집 능력을 갖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머릿속 무엇이 데이터를 편집하는 역할을 할 것인가? 그런 역할을 하는 머릿속 요소를 일컬어 철학자들은 지성(Understanding)이라 일컫는다. 이 지성이 생각을 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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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칸트는 지성의 영역과 감수성의 영역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감수성의 영역은 데이터가 머무는 영역이다. 의미의 영역이 아니라 수용의 영역이다. 생각의 영역이 아니라 감지의 영역이다. 바깥에서, 아니면 내 기억속에서, 대상을 감수성 영역으로 가져오는 것을 일컬어 ‘직관’이라 불렀고, 머릿속 형식으로 변환된 데이터를 ‘표상’이라 불렀으며, 표상 중에서 지성의 관심을 받는 표상을 ‘현상’이라 칭했다. 직관, 표상, 현상은 모두 감수성 영역에 있는 것이며, 그러므로 감각적인 것이다. 하지만 아직 ‘생각된 것’은 아니며, 그저 데이터에 불과하다. 지성이 개입함으로써 비로소 데이터는 정보가 된다.
지성은 어떻게 개입하는 것일까? 감수성은 편집 능력이 없어서 무수히 포개져 있는 머릿속 표상은 무질서하고 혼란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지성이 감수성 영역에 개입한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천재적인 분석을 펼친다. 칸트는 감수성 영역 안에 있는 데이터와 지성 영역 안에 있는 데이터는 서로 형식이 다르다고 봤다.
지성이 처리하는 데이터는 감수성이 수용한 데이터 전부가 아니라 압축 파일에 해당하는 데이터여야 한다. 오늘날 기술로 말한다면, 칸트는 컴퓨터의 코덱(codec) 기능이 지성 안에 있어야 한다고 봤던 것이다. 즉 데이터를 압축해야 하고 그 압축을 풀어야 한다. 그래서 저 18세기의 대철학자는 데이터를 탐색하는 기능, 데이터를 압축하는 기능, 그 압축을 풀기 위한 데이터 복제 기능을 지성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컴퓨터 기술에서 코덱이 없거나 작동하지 않으면 동영상은 재생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머릿속에서 그런 게 작동하지 않으면, 어떤 데이터가 머릿속에 들어오더라도 전혀 생각되지 않는다(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 텍스트는 알맞은 ‘코덱’이 머릿속에서 기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지성의 코덱 기능을 일컬어 칸트는 상상력(imagination)이라 칭했다. 즉 상상력이 감수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무수한 데이터(즉 표상)를 탐색해서 선별하고, 선별된 데이터를 하나로 합친 다음, 복제해 놔야만 비로소, 지성이 감수성 영역에서 지성 영역으로 넘어온 감지 데이터(Perception)를 (압축을 풀고)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생각의 준비였다.
생각이란 걸 하려면, 데이터가 감수성의 영역에서 지성의 영역으로 넘어와야 한다. 왜냐하면 지성이 생각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이제 데이터가 넘어왔다. 그런데 아직 0.1초도 지나지 않았다. 우리 지성이 데이터를 받았을 뿐이다. 이제 데이터를 처리해 보자.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 ⑥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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