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철학, 표상이란 무엇인가?

[목성인과 칸트와 친절한 AI씨] ④편 왜 ‘세계는 나의 표상이라 했을까’ 칸트를 모르면 찾지말라 한 쇼펜하우어 표상, 생각, 직관은 무엇이며 데이터와 정보는 어디에 해당하나

위의 집합 다이어그램에서 생각의 여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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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쇼펜하우어의 책은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24.

나는 목성에 갔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교습소를 운영하면서 지식을 찾아 여행 중인 히치하이커들을 끌어들였다. 나는 땅에서 풀이 자라나고, 그 풀을 먹는 생명체가 사는 지구라는 곳에서 살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자 목성인들은 형태를 고정해 놓고 사는 것보다 자욱하게 떠다니는 게 이롭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땅에서 사는 사람들이나 고정불변의 지식을 찾지, 기체가 된 존재에게 참된 지식이란 흘러가는 유체와 같다고 덧붙인다. 그러면서 판단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나는 이 이상한 행성을 헤매다 겨우 돌아왔다. 얼마 전의 일이다.

25.

내 인생에서 처음 접한 철학책이 쇼펜하우어였다. 책에는 온통 ‘표상’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는데, 도무지 이 단어의 뜻을 알 수 없었다. <태극기는 우리 민족의 표상이다>라는 예문에 쓰인 ‘표상’과는 의미가 달랐다. 국어사전을 봐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알 듯 말 듯 결국 몰랐다. 어린 나는 철학이란 감히 근접할 수 없는 특권자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많은 시간이 지나 다시 철학책을 펼쳐 보는 나이가 되었다. 쇼펜하우어의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문장은 ‘세계는 내 머릿속에 있다’라는 문장과 같은 의미이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 세계는 내 머릿속에 있다

이 두 문장은 의미적으로 동일하다. 그리고 이 등식은 쇼펜하우어 철학에 입문하는 티켓이며, 동시에 칸트 철학으로 들어가는 입장표이다. 쇼펜하우어는 칸트를 모르면 자기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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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상과 생각을 구별하지 못하면 철학에 입문할 수 없다는 말이다. 표상이 없다면 생각도 없다. 그렇지만 생각이 없다고 해서 표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표상은 생각이 아니다. 그러나 생각은 표상이다. 이것을 집합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27.

내가 회사에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는 동안에, 내 눈과 귀는 열심히 일했다. 무수히 많은 것을 목격했으며, 아주 많은 것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눈으로 본 것을 엉덩이가 기억하지는 않는다. 내가 귀로 들은 것이 허파에 보관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봤고, 들었던, 무수히 많은 ‘그런 것들’은, 내가 봤고 들었으므로 내 안 어딘가로 흡수되었을 텐데, 그것들은 내 안 어디에 있는가? 이런 질문은 어린아이가 더 쉽게 답할 수 있다. ‘머리’ 안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 보관되어 있음에도, 나는 ‘그런 것들’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어째서?

왜냐하면 내가 그것을 콕 집어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컴퓨터로 말하자면, 데이터를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에 들어왔지만 콕 집어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들, 그 뿌옇고 자욱한 것들, 그런 것들을 일컬어 ‘표상’이라고 한다. 엄밀히 말하면 좁은 의미의 표상이다. 우리 머리가 처리를 했든 하지 않았든, 우리가 생각했든 생각하지 않았든, 내가 기억하든 기억하지 못하든, 좌우간 머릿속에 있는 것 모두를 표상이라고 칭할 수도 있는데, 그때의 표상은 넓은 의미의 표상이다. 표상과 생각의 차이가 우리의 관심사이므로 좁은 의미의 표상만을 생각하기로 하자.

— 여기, 무궁화 꽃이 피었다.

무궁화 꽃은 그저 ‘사물’(thing)이다. 내가 그 꽃을 보든 말든 나와 무관하게 그 꽃은 거기에 있다.

그런데 내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꽃을 본다. 그러면 꽃은 더 이상 사물이기를 그치고 ‘대상’(object)이 되어, 내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그러면 그 꽃은 ‘표상’이 된다. 첫 번째 경우, 나는 그 꽃을 ‘아무 생각 없이’ 스쳐 지나갈 수 있다. 그러면 꽃은 표상에 머물러 있을 뿐이고, 내 머릿속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두 번째 경우, 나는 그 꽃에 이름을 부여할 수도 있다. “무궁화 꽃이네” 그러면 그 꽃은 표상에서 생각으로 진화한다. 비로소 그때 그 꽃의 형태가 드러나고 역사가 생기니, 그것을 일컬어 철학자들은 ‘존재’라 부른다.

나와 접촉한, 이 세상의 온갖 것들은 대부분 내 머릿속에서 아무런 형태 없이 표상의 상태에 있다. 우리 머릿속에는 무수히 많은 표상이 있다. 우리는 그중 극히 일부의 표상만을 핀셋으로 끄집어서 생각이라는 것을 한다. 그때 비로소 실체 없던 표상이 의미를 획득한다.

28.

표상은 영어로 presentation 혹은 representation으로 표현된다. 들뢰즈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표상이 아닌 ‘재현’으로 번역한다. 표상이든 재현이든, 아직 생각하기 전, 즉 아직 이름이 부여되지 않고 ‘머릿속에 있는 것’이 representation, 즉 표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 사상의 공(空) 개념은 서양사상에서 말하는 표상의 세계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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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표상이냐? 표상이 중요하냐?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각이 거기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류는 만물이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궁금해하고, 그런 어쩔 수 없는 궁금증으로 인해 종교가 나타났으며, 과학이 발전했고, 빅뱅에서 쿼크까지 탐구하게 되었다. 우리 인류는 이성적인 생명체라 한다. 그렇다면 이성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는가? 인간은 지식을 갖는다. 그렇다면 그 지식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이런 궁금증을 탐구하다 보니, 우리 머릿속의 시작점까지 이르게 됐고, 그 시작점이 바로 표상이었던 것이다. 철학자가 표상을 발견하기까지, 그리고 그 표상을 정당하게 평가할 때까지 철학이라는 학문이 탄생한 후 2천 년이 넘는 긴 세월이 걸렸다.

물론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표상보다 선행하는 것이 있지 않는가? 무궁화 꽃을 바라봤기 때문에, 그 꽃에 대한 표상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냐. 맞는 말이다. 그것을 일컬어 ‘경험’이라고 하고, 좀 더 물질적으로 말하면 ‘감각’이라 한다. 하지만 감각 기관은 두뇌와 다르다. 눈과 코와 귀가 생각하는 것은 아니며, 이성이 그곳에 머물지도 않는다. 그런 것들은 머리 바깥의 일이다. 우리는 머리 안쪽의 일만 살펴보기로 하자. 그러면 나타나는 생각의 시발점, 그것이 표상이었다.

30.

여기, 무궁화 꽃이 피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제1권은 무궁화 꽃이 어떻게 인간 머릿속에서 표상이 되는지를 다룬다. 무궁화 꽃이 ‘있는 그대로’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첫째, 감각되어야 한다. 둘째, 머릿속 형식에 맞게 변환되어야 한다. 후자를 일컬어 ‘직관’(intuition)이라 한다. 철학에서 말하는 직관은 일상 용어로 사용하는 직관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철학에서 직관이란 그저 ‘머릿속에 떠올림’이라는 단순한 뜻이다. 그런데 인간의 머릿속은 대체 어떤 곳일까? 뇌과학자들은 물질 관점으로 머리를 탐구한다. 철학자들은 정신 관점으로 머리를 탐구한다.

칸트는 인간의 머릿속을 다단계로 고찰했다. 아직 생각하기 전이라면, 그저 의미 없이 형식만 있는 곳으로 머리를 이해했다. 그 형식이란, 시간이라는 형식과 공간이라는 형식이다. 그리 어려운 얘기는 아니다. 예를 들어 ‘무궁화 꽃’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면, 있는 그대로 들어올 수는 없으니까, 어떻게든 변환돼야 한다. 그런데 생각을 하기 전이니까, 머릿속 안으로 들어온 그 ‘변환물’은 값만 있지 의미는 없다. 비유하자면, 그 변환 값은 (x, y, z) 좌표 값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때, 칸트는 그 변환물의 좌표 x가 공간, y가 시간, 그리고 z가 색깔이나 형태 같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x, y는 모든 이에게 공통된 것이고, z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인간 공통 요소만 따진다면, z는 빠지고 (x, y)만 남는다. 그걸 일컬어 ‘순수 직관’이다. 인류 공통 요소라는 뜻이고, 즉 (공간, 시간)이다. 그런데 아직 생각을 하기 전 단계이기 때문에, ‘무궁화’, ‘꽃’, ‘피었다’ 같은 의미는 빠져 있음을 유념하자. 표상이란 이렇듯 그저 ‘공간 어딘가, 시간 어느 즈음’ 정도의 변환물이라는 것이다. ‘무궁화’, ‘꽃’, ‘피었다’가 등장하려면, 좀더 절차가 필요하다(그 절차가 바로 생각이다).

이렇게 설명하고 보니, 다소 추상적인 얘기여서 뜬구름 잡는 얘기처럼 들리고, 어쩐지 어려운 느낌이 든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주 좋은 본보기가 근처에 있다. 인공지능이다. 컴퓨터 기술을 참고하면 표상에 관한 칸트 철학은 금방 이해된다.

31.

데이터와 정보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컴퓨터 시스템 안에 데이터가 있다. 만약 컴퓨터 시스템 안에 설치된 알고리즘이 그 데이터를 처리하지 않았다면(해석하지 않았다면), 데이터는 컴퓨터 시스템 안에 있을 뿐이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런 상태의 데이터에서 뭔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데이터를 정해진 룰로 처리/해석/분석한다면, 즉 설계된 알고리즘을 데이터에 적용하면, 그때 비로소 데이터에 의미가 생긴다. 그것을 일컬어 정보(information)라 한다. 데이터가 없다면 정보도 없다. 그렇지만 정보가 없다고 해서 데이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데이터는 정보가 아니다. 그러나 정보는 데이터이다. 이것을 집합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여기, 무궁화 꽃이 피었다.

컴퓨터 이미지 센서가 그것을 캡쳐하면, 센서와 연결되어 있는 메모리로 데이터가 보내진다. ‘무궁화 꽃’이 있는 그대로 저장되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로 변환돼야 한다. 다시 말하면, 아날로그 ‘무궁화 꽃’은 0과 1의 바이너리 코드(비트)와, 시간 순서가 부여되는 비트 스트림으로 변환된다. 즉 (바이너리 코드, 비트스트림)으로 변환되는 변환물이 되는 것이다. 칸트가 말하는 (공간, 시간)으로 변환되는 것과 같다. 이 상태로는 그저 데이터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디지털 변환물 자체에는 ‘무궁화’, ‘꽃’, ‘피었다’라는 의미가 없다. 그런데 컴퓨터 프로세서가 미리 설치된 알고리즘으로 그 데이터를 처리하여 해석할 수 있다. 그때 비로소 ‘무궁화 꽃이 피었다’라고 판단할 수 있고, 그 판단에 의해 정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간 ‘머릿속에 있는 것’을 일컬어 표상이라고 했듯이, 컴퓨터 시스템 안에 있는 것을 데이터라 한다. 표상에 개념을 적용하면 그것을 일컬어 생각이라고 한다. 데이터에 알고리즘을 적용하면 그것을 일컬어 정보라 한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데이터는 생각이 아니다. 아직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빅데이터’를 갖고 있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 빅데이터 중에서 얼마나 많은 데이터를, 혹은 얼마나 잘, 처리해서(인간으로 말하자면 ‘생각해서’) 정보를 얻을 것인가, 그것이 중요하다.

32.

표상에서는 지식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데이터에서는 지식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표상에서 생각으로, 데이터에서 정보로, 한 단계 더 전진해야 한다. 그러나 표상이 없다면, 다시 말해서 데이터가 없다면, 어떤 지식도 존재할 수 없다.

표상을 알았으므로, 이제 우리는 생각하기로 하자. 이렇게 결심하려고 했더니, ‘현상’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현상은 또 무엇인가? (제5편에서 계속)

글쓴이

코디정 언어활동가

코디정은 오랫동안 경계를 넘나들며 수많은 텍스트를 읽고 편집하고 써왔다. 변리사로 경제활동하며(특허법인임앤정), 대학교에서 강의하기도 하고(숭실대학교 국제법무학과 겸임교수), 책을 편집하기도 하며(이소노미아 편집장), 유튜브를 운영하기도 한다(코디정의 지식채널). <생각과 표현을 보호하는 지식재산레슨>, <괘씸한 철학 번역> 등 아홉 권의 책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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