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앞섰던 셸링, 엉뚱한 아편 처방으로 사랑 잃어
[홍성광의 독일 철학자들의 사랑 이야기] 철학계의 신동으로 떠오른 젊은 셸링 당대 ‘걸 크러시’ 카롤리네와의 뜨거운 만남 자연철학 심취,아편으로 아내 고치다 죽게 해 유물론 기초 제시...실존주의 철학에도 기여
천재 철학자 셀링
독일 관념론 철학의 대가 프리드리히 셸링(Friedrich Schelling, 1775~1854)은 지금은 헤겔의 명성에 가려져 빛을 잃었으나 어린 시절 보기 드문 신동이었다. 피히테나 헤겔 보다 더 셸링이 독창성과 천재성뿐 아니라 열정과 진지함을 지닌 철학자였다. 그는 실존주의와 유물론에 기초를 제공한 인물인 동시에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의지 철학의 시원이 되는 철학자이기도 하다.
셸링은 신학교 동양어 교수인 아버지 밑에서 어려서부터 학문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이미 8세 때 고전어를 배웠고, 10세 때 라틴어 학교에 입학했으며, 15세 때 튀빙겐 신학교에 특별 입학 허가를 받아 입학했다. 그리고 기숙사에서 만난 룸메이트가 바로 다섯 살 위인 헤겔(1770~1831)과 시인 횔덜린(Friedrich Hölderlin)이었다. 횔덜린은 37세에 정신 이상으로 자신의 뜻을 충분히 펼치지 못했지만 가장 독일적인 시인으로서 인간과 대지, 그리스 신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준 인물이다.
프랑스 혁명에 환호한 세 친구는 서로에게 정신적 자극을 주며 우정을 쌓아갔다. 칸트의 비판 철학과 피히테의 자유사상은 당시 신학교에서 금지되었는데, 학생들은 두 철학자의 저서를 독서 모임을 통해 읽고 토론하곤 했다. 셸링은 이미 17세의 나이에 쓴 논문으로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칸트(Immanuel Kant),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에 정통해 있음을 보여준다. 이로써 셀링이 셋 중에서 단연 앞서 나가게 된다.

23세에 교수가 된 셸링
셸링은 피히테의 자아 철학을 받아들여 칸트의 현상과 사물 자체라는 이원론을 하나의 자연철학으로 통합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전체적으로 자연은 근원적으로 하나라고 주장하게 된다. 이것은 괴테의 원형식물론과 연결되는 이론이었다. 셸링은 괴테의 『식물변형론』에 자극받아 자연에도 자기 생산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하여 그는 자연 탐구는 궁극적으로 인간이 자연과 하나가 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괴테의 자연관에 동조한 셸링은 1798년 괴테의 추천서를 받아 예나 대학 교수로 임용됐다. 만 23세의 나이로 이는 전무후무한 일이다. 괴테는 셸링을 ‘매우 명석하고, 정력적이며, 최신 경향에 따라 조직화된 두뇌의 소유자’라고 높이 평가했다. 셸링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이 현실적인 것이며 진실한 것”이라고 설파했다.

‘뮤즈’ 카롤리네와의 만남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독립심이 강하며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카롤리네는 여러 낭만주의 시인과 사상가들의 ‘뮤즈’였다. 신학자이자 동양학 교수인 아버지가 괴테와 두터운 친분이 있었던 덕에 그녀는 어릴 때부터 괴테를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이 인생의 전환기마다 그녀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카롤리네는 당시 급성장하는 낭만주의 운동과 예나 세트(Jena Set)라는 지적 운동의 중심에 있었고, 가장 뛰어난 멤버였던 ‘뮤즈’였다. 요즘 말로 ‘걸 크러시’였다.
카롤리네는 21세에 의사 뵈머와 결혼해 아우구스테(Auguste Böhmer)를 낳는다. 그러나 그녀가 둘째 딸을 낳은 이듬해에 남편이 패혈증으로 사망한다. 그러자 그녀는 1789년에 마부르크로 이사했다가 1892년에 친구가 있는 혁명의 도시 마인츠로 가서 자유분방한 생활을 한다. 거기서 프랑스 장교를 만나 하룻밤 사랑으로 임신하게 된다. 프로이센 군대에 의해 혁명 분자로 의심받아 체포된 그녀는 임신 사실이 탄로날까 봐 두려워하면서 그렇게 되면 자결하리란 마음을 먹는다. 이때 구명 운동을 펼친 슐레겔(August Wilhelm Schlegel)과 결혼한 그녀는 남편과 함께 예나로 가서 점차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다. 슐레겔과는 사랑보다 우정으로 맺어진 결혼이었다. 이때 카롤리네는 『로미오와 줄리엣』 등 셰익스피어의 드라마를 독일어로 번역하기도 했는데 셰익스피어 연극이 독일에서 그토록 인기를 끌게 만든 장본인이다.
카롤리네가 예나 생활에 적응하고 낭만주의 모임에 활발히 참여하던 1798년 셸링이 예나에 도착한다. 셸링은 예나의 낭만주의 모임에서 12세 연상인 카롤리네를 알게되는데, 어머니이자 연인 같은 그녀와 정신적 교류를 한다. 하지만 그녀의 딸 아우구스테는 10살 연상의 셸링을 오빠이자 연인으로 생각하며 마음을 키우지만, 셸링은 오히려 카롤리네에게 더 연정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셸링을 딸의 배우자로 여기고 그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괴테는 당신을 아버지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고, 저는 당신을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사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에게는 두 분의 부모가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테가 어느 날 고열에 시달리며 앓자 셸링은 자신의 독특한 민간요법에 기초해 아편을 투약하지만 그녀는 일주일 만에 죽고 만다. 아우구스테의 죽음은 셸링은 물론 카롤리네 그리고 괴테에게 큰 충격을 준다. 아우구스테는 실은 괴테와 카롤리네 사이에 난 딸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1784년 8월, 카롤리네는 첫 결혼 직후 남편 뵈메와 함께 괴테를 방문하여 몇 주간 머물렀는데, 이때 괴테와 관계를 맺어 임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셸링의 전기 작가인 발터 에르하르트는 아우구스테가 카롤리네와 괴테 사이에 난 아이라고 주장했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예나에서는 아우구스테를 살릴 수 있음에도 셸링이 민간요법을 처치해 그녀를 죽게 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셸링은 카롤리네의 미모와 깊은 정신 속에서 자연과 정신의 일치를 바라보며 동일성 철학을 기획한다. 그녀와의 사랑을 키워나가면서 셸링은 아우구스테의 죽음에 대한 자책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난다. 그러자 카롤리네도 셸링과의 사랑이 깊어감에 따라 우정에 근거한 슐레겔과의 결혼 생활을 이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1803년 괴테의 도움으로 이혼하고 셸링과 결혼한다. 그녀는 딸을 죽이고 딸의 약혼남과 결혼한 악녀라는 소문에 시달린다. 마침 이때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셸링을 초빙하자, 둘은 그곳으로 간다. 하지만 거기서도 이미 안 좋은 소문이 퍼져 셸링 부부는 동료 교수들로부터 왕따 신세가 된다.
헤겔의 비판과 아내의 죽음
1807년에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셸링의 체계를 비판한다. 자신의 철학을 베낀 것으로 보이는 헤겔의 비판을 받자 셸링은 크게 낙담하고 우정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이제 어린 나이에 철학의 기린아로 등장한 셸링은 밀려나고 헤겔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1809년에 카롤리네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가슴이 하루하루 하얘진다’라고 전했는데, 이 때 아마 유방암 말기가 아닌가 추정된다. 그녀가 가슴뿐 아니라 전신에 심한 통증을 호소하자 셸링은 의사인 형에게 아편을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형은 아편의 여러 가지 부작용을 걱정하면서 아편 대신 약용 식물인 대황을 복용하라고 권유한다. 하지만 자신의 자연철학 지식에 근거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확신한 셸링은 아우구스테에게 그랬듯이 이번에도 아편을 복용케 했다. 하지만 아편을 복용한 카롤리네는 고열과 설사에 시달리다가 일주일만인 1809년 9월 7일에 죽고 만다.
때로는 어머니처럼, 때로는 누이처럼 셸링의 정신세계 속에서 철학하는 동기를 제공했던 카롤리네의 죽음은 셸링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 여파로 그는 삶의 의미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회의에 빠진다.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사색하면서, 죽음이란 인간의 본래 삶의 회복이며 생명의 근원에서 볼 때 좀 더 높은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죽음과 함께 우연적인 것은 모두 소멸하지만 정신의 온전한 개체성은 남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셀링의 재혼과 그의 영향
카롤리네의 죽음 이후 영혼의 위로를 갈망하던 셸링은 1811년에 아내 카롤리네와 친분을 나누던 파울리네 고터(Pauline Gotter)에게 새로운 연정을 느낀다. 그의 나이 36살. 괴테 친구의 딸로 자신보다 열네 살이나 어린 여자였다. 그리하여 1813년 셸링은 파울리네와 결혼하고 이듬해 첫 아들을 얻고 평범한 결혼 생활을 해나간다.
그 후 셸링은 에를랑겐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831년 헤겔이 사망한 뒤 공석으로 남아 있던 베를린 대학 철학부에 초빙받는다. 1841년에 행한 그의 취임 연설에는 프리드리히 엥겔스, 키르케고르(실존주의 창시자), 미하일 바쿠닌, 아르놀트 루게(Arnold Ruge) 등 쟁쟁한 철학도들이 참석한다. 헤겔 좌파를 대변하는 이들은 셸링이 헤겔 왕국을 비판해 주기를 기대하며 그의 강의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셸링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이성적 설명보다는 인간을 포함한 세계의 근원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와 비합리적 근거에 대해 강의함으로써 한편으로 그들에게 실망을 안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는 “사유를 통해서는 존재를 파악할 수 없으며, 오히려 사유를 포기할 때 존재에 다가갈 수 있다”고 피력한다. 이러한 주장은 엥겔스와 바쿠닌 등에게 영향을 미쳐 ‘유물론 철학’을 형성하게 하는 동기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키르케고르에게 실존주의 철학을 형성하는 동기를 제공한다.
셀링은 1846년 건강이 나빠져 강의를 그만두고 저술 활동을 하면서 가족이나 친구들과 평온한 일상을 보내다가 휴양차 떠났던 스위스의 바트 라가츠에서 1854년 8월에 사망한다. 황태자 시절 셸링에게 철학을 배웠던 뮌헨의 황태자 막시밀리아 2세는 그곳에 묘비를 세우고 ‘독일 최고의 사상가에게 바침’이라는 비문을 적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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