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와 일본해 ‘이름’ 대신 ‘기본값’ 다툴 때다
한일간 오랜 ‘이름’ 논쟁의 변곡점 이제 동해-일본해 병기는 ‘당연’ ‘무엇을 기본값으로 할까’의 각축 디지털 표준 설계하는 주체 돼야 구글 지도, 애플 지도와도 협의해야
IHO S-130 전환후 논쟁의 새로운 좌표
동해(East Sea)와 일본해(Sea of Japan)를 둘러싼 논쟁은 수십 년간 한국 외교의 상징이었다. 우리는 끈질기게 ‘옳은 이름’을 되찾기 위해 싸워왔고, 외교 무대와 국제기구에서 설득의 언어를 다듬어왔다. 그러나 2020년, 국제수로기구(IHO)가 기존의 인쇄물 표준 S-23을 디지털 기반의 S-130 체계로 전환하면서 판이 달라졌다.
더 이상 문제는 ‘어느 이름이 맞는가’가 아니다. 이제 핵심은 ‘어떤 시스템에서 어떤 명칭이 기본값으로 작동하는가’이다. ‘외교의 시대’에서 ‘표준 설계의 시대’로, ‘설득의 정치’에서 ‘데이터 거버넌스의 정치’로 이동한 것이다.
인쇄물 해집도 표준인 기존 S-23은 단일 문서에 단일 명칭을 정해 세계가 따르는 체계였다. 따라서 분쟁은 인쇄물상 ‘단일 표기 vs 병기’라는 선택 문제로 수렴되었으며, 협상은 언제나 외교적 압박과 여론전을 동반했다. 그러나 S-130은 종이 지도 개념을 완전히 버린다.
S-130의 핵심은 다층 데이터 레이어 구조다. 여러 명칭을 동시에 데이터로 저장해두고, 지도 목적, 언어 설정, 축척, 사용자 환경 등에 따라 표시되는 명칭이 달라진다. 즉 병기는 더 이상 “허용해야 하는가/하지 않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 무엇이 먼저 보이게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표기가 아니라 노출 규칙, 감정이 아니라 운영 권한, 이름이 아니라 기본값이 쟁점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옳은 이름’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이 먼저 보이도록 설계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기술과 제도 역량이다.

보이지 않는 경쟁: 기본값을 둘러싼 권력
S-130 체계는 병기 가능성을 표준 내부에 구조적으로 포함한다. 그 결과, ‘동해 병기’ 요구는 이제는 외교적 예외 요청이나 역사적 보정 요구가 아니다. 병기는 이제 표준 설계의 정당한 구성요소다. 이는 한국 외교가 수십 년간 직면했던 딜레마를 해소한다.
과거 우리는 “왜 병기가 정당한가”를 설명해야 했다. 이제는 “병기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논의할 수 있다. 한국은 설득의 대상에서 설계의 주체로 발언 위치가 이동했다. 이 변화는 조용하지만, 전략적으로 매우 큰 변화다.
S-130 시대의 경쟁은 이전보다 더 은밀하고 기술적이며 장기적이다. 다음과 같은 세부 규칙들이 실제 경쟁의 핵심이 된다. 아래의 <표>가 함축하듯이, 이제 승패는 한 번의 협상이나 회의에서 결정되지 않는다. 경쟁은 가시성(visibility)과 접근성(accessibility)을 얼마나 오랫동안 축적하느냐로 결정된다. 다시 말하면, 이 문제는 ‘이름의 전쟁’에서 ‘기본값의 전쟁’으로 이동했다.

한국의 새로운 전략: 담론을 넘어 구현으로
일본은 오랫동안 “단일 표기 유지야말로 관행과 안정성을 보장하는 중립적 선택”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 전략은 S-23 체제에서는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S-130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S-130 이후 ‘중립성’은 단일 표기가 아니라, 병기 기반의 사용자 선택 보장으로 해석된다. 즉, 중립성의 기준 자체가 바뀌었다. 이제 일본은 기존 전략을 그대로 유지할 경우 ‘표준의 유연성과 공정성을 거부하는 국가’라는 인상을 줄 위험이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우리가 필요한 것은 외교적 호소나 캠페인이 아니다. 핵심은 국제표준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과정에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능력, 즉 ‘표준 거버넌스 역량’을 갖추는 일이다. S-130 체계에서는 병기 여부가 외교적 선언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어떤 데이터 레이어가 기본값으로 설정되고, 어떤 조건에서 어느 명칭이 화면에 우선적으로 노출되는가를 결정하는 기술·절차·플랫폼의 구조 속에서 병기는 비로소 현실이 된다. 따라서 전략의 무게중심은 “우리의 입장을 설명하는 것”에서 “표준을 함께 설계하는 주체가 되는 것”으로 이동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국제수로기구(IHO) 내부 표준 설계 과정에 대한 상시적 개입이 요구된다. 기술위원회, 데이터 모델 작업그룹 등 실질적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지점에 전문가를 상주시키고, 병기 표기를 단순 요구가 아닌 기본 레이어 조합 규칙으로 제도화하는 설계안을 제시해야 한다. 특히 동해와 일본해를 상호 연결하는 교차참조(X-Reference) 규칙과 상황에 따라 병기가 기본값으로 노출될 수 있는 공존적 기본값(Co-Default) 원칙은 지금 당장 표준 문서에 반영 가능한 실천적 항목들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국제수로기구(IHO) 내부의 기술 논의에만 한정하는 순간 전략의 절반은 자동적으로 소거된다. 해양지명 표준은 이미 다중 국제표준 체계와의 정합성 속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UN 지명전문가그룹(UNGEGN), 지리정보 표준을 관장하는 ISO/TC211, 공간 데이터 상호운용을 다루는 OGC(Open Geospatial Consortium) 등은 모두 지도·검색·데이터 플랫폼이 실제로 참조하는 표준 체계들이다. 다시 말해, 병기 표기는 IHO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 공간정보 표준 생태계 전체의 문제이다. 이 연동을 확보해야 병기는 기술 표준 차원에서 “지워지지 않는 존재”가 된다.
마지막으로, 표준은 결국 사용자의 눈에 보이는 화면에서 실현된다. Google Maps, Apple Maps, Bing, OpenSeaMap 등 글로벌 지도·항행 플랫폼과의 데이터 호환 및 기본값 협의가 필수적이다. 사용자가 검색창에 어떤 언어로 입력하든, 두 표기가 자연스럽게 함께 제시되고, 확대·축소·전환 과정에서도 병기가 사라지지 않는 ‘마찰 없는 병기 경험’을 표준 사용자 경험으로 정착시켜야 한다. 다시 말해, 병기는 더 이상 “무엇을 주장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규칙을 설계하고 어떤 시스템에 참여하느냐의 문제다. 그리고 이제 한국은 설득의 시대를 넘어 설계의 시대로 들어서야 한다.
동해 문제는 이제 ‘이름’이 아니라 ‘질서’의 문제다
동해 표기 문제는 “우리의 이름을 되찾는 싸움”으로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 이 문제는 국제사회가 해양공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정의할 것인가, 다시 말해 지구적 인지 질서의 설계 문제로 변했다. 이름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표준을 바꾸는 것이며, 상대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이며, 단기 외교전이 아니라 장기적 제도 역량 축적의 문제다.
S-130은 이미 문을 열었다. 이제 질문은 단 하나다. 우리는 ‘옳은 이름’을 외치는 나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올바른 기본값’을 설계하는 나라가 될 것인가. 이제 선택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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