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 알폰스 무하를 위하여

[황진규의 클래식 음악현장] ‘아르누보의 대가’ 알폰스 무하 며느리 작곡가 제럴딘 무하 2차대전·공산주의가 낳은 비극 시아버지 작품 지켜며 작곡생활

'아르누보의 대가'로 알려진 알폰스 무하
'아르누보의 대가'로 알려진 알폰스 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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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작곡가들의 생애를 탐구하다가 한 가지 결론에 다다른 적이 있습니다. ‘예술가와 가까이 지낸다는 것은 인생에 재앙이라는 것’이었죠. 그리고 그 예술가가 진정한 예술가일수록, 위대한 예술가일수록 재앙도 비례해서 커진다고 말이죠. 위험한 발언일 수도 있지만 저는 지금도 그렇게 믿습니다.

참된 예술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예술에 쏟아붓습니다. 따라서 예술 이외에 다른 것에 대해서는 ‘무능력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본적인 생활능력조차 없는 경우도 많고요. 그래서 자신의 삶을 주변 사람들에게 의탁하고, 그들의 에너지까지 빨아들여 자신의 예술로 승화합니다. 마치 뱀파이어처럼 말이죠.

이런 식으로 위대한 예술가의 가족이나 지인이라는 악연 탓에 자신의 삶을 망친 사례는 예술사에서 흔히 접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심지어 예술가 사이에서도 성립합니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과 그의 제자 카미유 클로델, 또는 화가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부부가 그 예가 될 수 있겠지요. 이런 경우는 대개 두 당사자 한쪽 또는 양쪽 모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사자 중 어느 쪽에도 책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얽혔다는 이유만으로 인생이 굴곡지게 되는 경우도 아주 없지는 않더군요. 작곡가 제럴딘 무하(1917~2012)가 그 주인공입니다.

처음에 ‘Geraldine Mucha’라는 이름을 접했을 때는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어떻게 읽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거든요. 이 작곡가의 인적사항을 파악하고 나서야 읽는 법을 알게 됐습니다. 이 작곡가의 남편은 이르지 무하라는 이름의 체코 작가였고, 이르지는 알폰스 무하(1860~1939)의 아들이었습니다. 저 유명한 아르누보 화가 말이죠.

알폰스 무하의 아르누보 작품들. 그의 작품들은 아르누보 시대를 이끌었으며, 오늘날에도 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을 중심으로 상업미술계에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알폰스 무하의 아르누보 작품들. 그의 작품들은 아르누보 시대를 이끌었으며, 오늘날에도 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을 중심으로 상업미술계에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알폰스 무하의 며느리’라는 이름 아래

제럴딘 무하는 원래 이름이 제럴딘 톰슨이었고, 스코틀랜드 출신의 성악가 부모에게서 태어났습니다. 18세 때 영국 왕립 음악 아카데미에 입학해 음악을 배웠죠. 평범한 작곡가로 순탄한 인생을 살아갔을지도 모를 그녀의 운명은 1941년에 한 파티에서 젊은 남자를 만난 뒤 송두리째 뒤바뀝니다. 아까 말씀드린 체코에서 도망친 망명자, 이르지 무하가 그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알폰스 무하는 대개 아르누보 화풍의 거장으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그의 작품 가운데 현대 미술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주로 아르누보 시대의 작품들이죠. 하지만 그는 아르누보의 유행이 끝난 1910년 이후로 조국 체코에서 슬라브 민족의 역사를 다룬 <슬라브 서사시> 연작을 그림으로써 체코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로 떠오르게 됩니다.

민족주의 색채가 짙은 알폰스 무하의 작품 '슬라브 서사시' 연작 중 하나. 무하는 아르누보 작품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조국인 체코에서는 노년에 그린 민족주의적 작품들의 평가가 더 높습니다.
민족주의 색채가 짙은 알폰스 무하의 작품 ‘슬라브 서사시’ 연작 중 하나. 무하는 아르누보 작품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조국인 체코에서는 노년에 그린 민족주의적 작품들의 평가가 더 높습니다.

그리고 나치 독일이 1939년 3월에 체코를 점령하고 나서 제일 먼저 체포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무하였던 것도 이런 활동 때문이었지요. 게슈타포는 알폰스 무하에게 혹독한 심문을 가했고, 당시 이미 고령이었던 무하는 이로 인해 폐렴에 걸려 같은 해 7월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알폰스의 아들 이르지는 더 이상 체코에 있을 수 없어 국외로 망명하게 되었죠. 영국으로 간 이르지는 제럴딘 톰슨과 만나 사랑에 빠져 1942년에 결혼합니다. 그리고 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나서 부부는 체코 프라하로 이주하지요.

위대한 며느리이자 작곡가인 제럴딘 무하. 젊은 시절의 모습.
위대한 며느리이자 작곡가인 제럴딘 무하. 젊은 시절의 모습.

제럴딘의 고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습니다. 공산화된 체코 정부는 알폰스 무하의 아르누보 시절 작품들에 대해 ‘감각적이고 상업주의적이며 퇴폐적’이라고 트집을 잡아 압수하려 들었는데, 이는 사실 무하 작품의 가치가 나날이 올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명분과는 달리 알폰스 무하의 작품들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는 얘기죠.

이런 상황에서 제럴딘은 만나본 적조차 없는 시아버지의 작품을 지켜내기 위해 홀로 분투해야만 했습니다. 남편 이르지 무하는 당시 우라늄 광산에서 강제노동을 하고 있었거든요. 이게 겉보기만큼 위험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천연 우라늄이 내뿜는 방사선은 인체에 별다른 해가 되지 않는 수준이라고 하니까요. 어쨌든 강제노동이 편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이르지 무하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유산을 강탈당할 위험과 이에 맞서 아내 혼자 갖가지 고초를 겪는 상황이 무척 괴로웠을 겁니다.

다행히 1950년대 중반 들어 정치적 억압이 완화되자, 이르지 무하는 강제노동에서 풀려났고, 무하 부부는 알폰스 무하 작품의 전시회를 영국에서 대대적으로 열어 알폰스의 명성을 더욱 끌어올렸습니다. 하지만 소련이 1968년 체코를 침공하자 체코의 정치는 다시 얼어붙었고, 해외여행도 엄격하게 제한되게 되죠.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제럴딘은 남편과 상의한 끝에 원치 않는 별거를 선택하고 고향 스코틀랜드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알폰스의 작품을 서유럽에서 더 원활히 전시할 수 있게끔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이후 20년 동안 그녀는 몇 년에 한 번 정도만 남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89년에 ‘벨벳 혁명’으로 체코의 공산 정부가 무너지자 비로소 프라하로 돌아가 남편과 재결합했죠.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은 1991년 이르지는 사망했고, 제럴딘은 2012년에 죽을 때까지 프라하에서 혼자 지내게 됩니다. 그러니까 20년 동안 헤어져 있던 남편과 고작 2년을 같이 산 다음 또 20년을 과부로 살아간 겁니다. 이 얼마나 기구한 삶인가요.

2012년 9월 26일 열린 제럴딘 무하의 95세 생일 기념 공연 모습을 담은 단편영화 ‘제럴딘 무하의 얼굴’

작곡가 제럴딘 무하의 음악 세계

그러나 제럴딘 무하는 이런 힘든 삶을 살아가면서도 작곡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고향 스코틀랜드에 대한 그리움을 작곡으로 달래기도 했지만(1954년에 쓴 ‘스코틀랜드 옛 노래에 의한 변주곡’이나 1998년 作 ‘관악 오중주’ 등), 제2의 조국이 된 체코의 전통음악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죠. 심지어 남편과 함께 체코로 이주하기 전에 쓴 작품(현악 사중주 제1번, 1944)에서도 그 흔적이 엿보인 답니다.

제럴딘 무하의 작품 가운데 협주곡, 관현악곡 같은 대규모의 작품이 상대적으로 드문 것은 아마도 그녀가 살아간 파란만장한 삶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규모가 큰 작품을 쓰려면 한 곡에 진득하게 매달려야 하는데, 여건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래서인지 제럴딘의 작품 중 상당수는 실내악곡 아니면 독주곡입니다.

제럴딘 무하의 작품 ‘에리카를 위하여’. 화면에 나오는 모든 이미지는 알폰스 무하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젊었을 때 쓴 곡들이 대개 활기찬 데 비해, 더 훗날 쓴 곡들 가운데 상당수는 일종의 상실감과 그리움이 묻어나죠. ‘앨리스데어를 위한 자장가’(Lullaby for Alisdair)나 ‘에리카를 위하여’(For Erika) 같은 곡이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제럴딘의 작품은 20세기 작곡가로서는 이례적일 정도로 선율적이며 서정적입니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 외에도 다분히 쇼팽풍인 ‘마주르카 템포로’ 같은 곡도 그 예이죠. 그러니까 제럴딘 무하의 음악 세계는 스코틀랜드와 체코의 민속음악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고 거기에 독특한 서정미를 결합했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겁니다.

시아버지 알폰스 무하의 작품 앞에 선 제럴딘 무하. 그녀는 남편과 사별한 후 아들 존 무하와 함께 ‘무하 재단’을 설립해 알폰스 무하의 예술을 전 세계에 알리는 일을 이어나갔습니다.
시아버지 알폰스 무하의 작품 앞에 선 제럴딘 무하. 그녀는 남편과 사별한 후 아들 존 무하와 함께 ‘무하 재단’을 설립해 알폰스 무하의 예술을 전 세계에 알리는 일을 이어나갔습니다.

제럴딘 무하는 위대한 화가였던 시아버지 때문에 고난에 찬 인생을 보냈지만 이를 기꺼이 감내했고, 이와 더불어 작곡가로서 묵묵히 자신만의 예술을 추구해 나간 인물이었습니다. 꼭 ‘알폰스 무하의 며느리’라는 딱지를 붙이지 않더라도 그녀의 작품은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을 만합니다. 더 많은 사람이 그녀의 작품을 접하게 즐기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글쓴이

황진규 음악 칼럼니스트

황진규 음악 칼럼니스트는 월간 <그라모폰 코리아>에서 편집기자로 근무했으며, 월간 <코다>, <인터내셔널 피아노>, <스트라드>, <스트링 앤 보우>, <콰이어 앤 오르간>, <안단테>, <라 뮤지카>, <월간 SPO> 등의 잡지에 원고를 기고하였다. 또 서울시립교향악단, KBS교향악단, 서울스프링실내악음악제, 금호아트홀 등의 프로그램 노트를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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