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공연장에서도 ‘시체관극’ 할까요

[황진규의 클래식 음악현장] 기괴하고 난감한 ‘시체관극’ 관람 ‘떼창’ 문화 있는데, 극단적 정숙을? 행여 우월의식 발현 아닐까 관객들은 등등하게 즐길 권리 있어

‘시체’가 있을 곳은 묘지이지 공연장은 아니지 않을까요? 사진은 영국 요크셔의 오틀리 공동묘지.
‘시체’가 있을 곳은 묘지이지 공연장은 아니지 않을까요? 사진은 영국 요크셔의 오틀리 공동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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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관극’을 아시나요?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시간이 나는 한 클래식 공연은 자주 보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다른 예술 장르는 솔직히 잘 모르기도 하고 관람할 시간도 없어서 접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것은 관람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죠. 그런 입장에서 이번 글을 쓸 자격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결국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냥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흥미로우면서도 난감한 소재였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생소한 용어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시체관극’이라는 말인데요, 무슨 뜻이냐면 ‘시체처럼 꼼짝도 않은 채 숨죽여 극을 관람하는 행위’입니다. ‘극’으로 끝나는 데서 짐작하실 수 있겠지만 주로 연극이나 뮤지컬 쪽 문화입니다. 무슨 얘기인가 싶어 호기심에 알아봤는데, 정말이지 저로서는 놀라움을 넘어 경악스러웠고 다른 세상 이야기 같았습니다.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클래식이든 결국 공연인 건 마찬가지인데, 왜 이렇게 문화가 다른가 싶기도 했고요. 이런 의문을 저만 느끼는 건 아닐 거라 생각해 이번 주제로 다루게 되었습니다.

꼼짝도 하지말고 보기만 하라고?

시체관극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일부 극성 팬이 다른 관객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를 전부 불편해하면서 ‘하지 마라’라고 규제하는 행동이 마치 시체처럼 눈만 뜨고 있길 바라는 듯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원래는 비꼬는 뜻으로 쓰기 시작한 표현인데 굉장히 큰 호응을 얻어 빨리 정착하게 됐다고 하죠.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규제하길래 그러나 싶을 겁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예를 들어 잠깐 자리를 고쳐 앉는 것도, 코를 만지는 것도 안 됩니다. 말 그대로 ‘나는 시체요’ 하면서 눈만 뜬 채 보라는 거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째려보는 건 기본이고(몸을 좀 움직였다고 공연이 끝날 때까지 정작 극은 안 보고 자기만 노려보더라는 증언도 있습니다.), 욕설을 내뱉거나 때리기까지도 한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에 비하면 공연 후 관련 커뮤니티에서 뒷말을 늘어놓는 것은 애교에 가깝죠. 일부 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경건의 폭력’이라는 표현은 이런 상황에도 들어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체관극’ 요구, 왜 생기는 걸까요?

음악이나 공연예술을 관람할 때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위해 정숙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팝이나 록, 메탈 등 일부 대중음악의 경우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청중이 공연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함께 노래하면서 즐기기도 하니까요. 이런 ‘떼창’ 문화를 신기해하는 외국인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대중음악이 ‘예술’에 해당하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걸 논하는 것은 이 자리의 주제에서 너무 벗어나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에 하지 않겠습니다(‘해당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게 제 입장이긴 합니다만).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요? 저는 ‘접근 가능성’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나 열려 있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얘기죠. 그럼 그 가능성은 무엇으로 결정될까요? ‘정보량’의 차이라고 하면 수긍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팝이나 록, 메탈 등도 무척 복잡하게 쓸 수 있겠지만, 청중이 따라 부르려면 보컬 파트만 알면 되니까요. 가사와 주선율만 알면 된다는 얘기죠. 클래식도 이론상으로는 마찬가지일지 몰라도, 성악 테크닉이나 다른 여러 면에서 청중이 참여하기가 대중음악보다는 훨씬 어렵죠. 기껏해야 유명한 우리나라 가곡 몇 곡 정도랄까요.

연극이나 뮤지컬이라면? 일단 방대한 분량의 대사/가사가 문제가 될 겁니다. 사실상 앞서 말씀드린 정보량의 얘기입니다. 그리고 이런 공연예술에서 그 방대한 분량의 ‘정보’는 전문가(배우나 가수)가 공들여서 전달해줄 영역이지, 관객 같은 비전문가가 나설 대상이 아닐 겁니다.

한국 팬들의 ‘떼창’ 문화는 간혹 가수들을 당황케 하기도 합니다. 영상은 비욘세의 2011년 내한공연 중 ‘Irreplaceable’.

연극과 뮤지컬에만 강요되는 이유는

그렇기 때문에 전문가가 수준 높게 전달하는 그 ‘정보’를 가능한 한 방해받지 않고 즐기고 싶다는 욕구 자체는 당연히 이해할 만합니다. 그런데 왜 유독 연극과 뮤지컬에서만 이 욕구가 비정상적인 수준으로 발현되는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제가 앞서 몇 번 말씀드렸듯이 클래식 공연은 이런저런 방해 요소가 없는 경우가 거의 없고, 따라서 어지간하면 체념하고 넘어가게 됩니다. 심지어 오페라에서도 말이지요. 그런데 연극과 뮤지컬에서만 시체관극 문화가 생긴 것인지, 여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가설이 있습니다.

일단 연극이나 뮤지컬을 공연하는 극장은 대개 클래식 콘서트홀이나 오페라 극장에 비해 규모가 상당히 작습니다. 크기가 작으니 소음도 잘 들리고, 좌석이 바짝 붙어 있어 옆 사람과 툭하면 부딪치는 경우가 많죠. 비싼 돈 들여 보는 공연인데 한 음이라도 놓칠 수 없다는 ‘본전 심리’도 있을 겁니다. 연극이나 뮤지컬은 아무래도 배우가 맡는 것이기에 연예인의 팬덤 문화가 강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지적해야겠군요. 내 ‘최애’가 눈앞에서 대사를 읊거나 노래를 부르는데 옆에서 부스럭거린다면 짜증이 나기 마련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 하나하나가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다 해도, 역시 시체관극 문화가 유독 연극과 뮤지컬에서만 두드러지게 자리잡은 이유를 온전히 설명하기엔 부족해 보였습니다. 좀 더 알아본 결과 상당히 충격적인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관객 가운데 공연을 은밀히 촬영한 다음 그 영상을 다른 이들에게 판매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고 합니다. 객석의 사소한 소음이나 동작도 영상의 완성도에 해가 된다는 논리죠. 시체관극을 요구하는 모든 사람이 이런 행위를 하는 건 아니겠지만, 일부에 불과할지라도 이런 사람이 분명 있다는 겁니다. 이쯤 되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라 해야겠습니다. 객석의 소음은 몰지각한 짓에 불과한데 이건 명백한 불법행위이니 말입니다. 타인에게 시체관극을 강요하는 게 설령 이런 사악한 의도에서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자체로 폭력이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에릭 사티의 ‘벡사시옹’(짜증) 연주. 1분이 채 안 걸리는 짧은 곡을 840번 반복해 연주하라는 황당한 지시가 붙어 있는 것으로 유명한 작품입니다. 작곡가의 지시대로 완주하려면 대략 13시간 40분 정도 걸리죠. 만약 이 시간 내내 ‘시체관극’을 해야 한다면 어떨까요?

‘관크’ 없는 성숙한 공연문화를 바라며

일전에 ‘관크’라는 말에 대해 설명드린 적이 있습니다. ‘관객 크리티컬’의 약어인데 관객이 공연에 크리티컬 대미지(치명타)를 가할 수 있다는 뜻이죠. 다른 사람이 공연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소란을 피우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의 ‘관크’라면, 다른 이에게 극단적인 정숙을 강요하는 것 역시 정반대의 측면에서 극단적인 관크가 아닐까 싶습니다. 시체관극이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을 때는 클래식 공연 관람문화에 도입이 된다면 어떨까 잠깐 생각해 보기도 했지요. 하지만 곧바로 그 생각을 떨쳐야 했습니다. 저부터가 그런 수준의 정숙함을 유지할 자신이 없었거든요.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한테 시체 흉내를 내라니 그게 어디 정상이겠습니까?

지난번에 여러 가지 예를 들어 말씀드린 관크는 대부분 무지나 무신경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체관극을 강요하는 것은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없죠. 상대방이 불편할 것은 알지만 그래도 나는 이렇게 해야겠다는 적극적인 의도가 있어야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그럼 이런 행동은 어디서 비롯하는 것일까요? 나는 남보다 이 작품을 더 잘 알고 따라서 더 잘 즐길 권리가 있다는 우월감, 일종의 선민의식에서 비롯하는 행동일 것입니다.

하지만 해당 작품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많든, 작품과 공연을 얼마나 사랑하든, 또 돈을 얼마나 쏟아부었든 간에 이런 선민의식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같은 공연장에 있는 모든 관객은 그 공연을 즐길 권리를 똑같이 지니는 것이니까요. 모든 관객과 청중이 이런 인식을 상식으로서 공유하는 때가 빨리 왔으면 합니다.

공연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까지 하고, 다음에는 이 시대의 클래식 문화를 만들어 가는 음악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글쓴이

황진규 음악 칼럼니스트

황진규 음악 칼럼니스트는 월간 <그라모폰 코리아>에서 편집기자로 근무했으며, 월간 <코다>, <인터내셔널 피아노>, <스트라드>, <스트링 앤 보우>, <콰이어 앤 오르간>, <안단테>, <라 뮤지카>, <월간 SPO> 등의 잡지에 원고를 기고하였다. 또 서울시립교향악단, KBS교향악단, 서울스프링실내악음악제, 금호아트홀 등의 프로그램 노트를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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