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세게 운좋은 사나이 안영수의 LA올림픽
[조영섭의 잊을 수 없는 순간과 선수들] 게으른 천재복서의 은메달 획득 스토리 복싱 의욕잃어 방황하다 자해행위까지 마음 바로잡은 후 국내1위 꺾고 올림픽에 재추첨으로 최강자 피해..기막힌 대진운 은메달 딴 후 쏟아진 포상금...20살에 은퇴
해머 한번 휘둘렀더니
잊혀질 만하면 가끔씩 연락을 주고받고, 불현듯 생각이 나면 한 번씩 얼굴을 마주하는 불원불근(不遠不近) 관계를 유지하는 필자의 40년지기가 있다. 주인공은 1984년 LA올림픽 복싱 웰터급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안영수다. 안영수와 필자는 1983년 7월 제3회 세계청소년대회 대표로 뽑혀 함께 합숙훈련을 하면서 인연을 맺게 됐다.
안영수는 1964년 2월 서울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복싱을 시작한 것은 태릉중학교 2학년 때인 지난 1978년. 같은 또래의 친구들보다 체격이 크고 힘이 셌던 안영수가 아파트철거 현장에서 심심풀이로 해머를 휘둘어본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네 청년들이 권투를 해보라고 적극 권유, 집 근처에 위치한 노병엽 관장이 운영하는 상원체육관을 찾게 된 것이다. 운동을 시작한 후 곧바로 천부적인 자질을 드러냈다. 그는 1년만에 1979년 개최된 제3회 김명복 박사배 중등부 라이트 웰터급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주목을 받는다.
공포의 한체대 83학번
1980년 서울체고에 진학한 안영수는 김창석 선생의 지도를 받았다. 1981년 제5회 김명복배(웰터급)에 출전, 이해정 방승현 정유성과 함께 팀을 종합우승으로 이끌면서 최우수복서(MVP)로 선정됐다. 졸업반이던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최종선발전 결승에서 정용범에 패해 출전이 좌절됐지만, 그해 10월 핀란드 국제대회에 대표 2진으로 처녀 출전해 동메달을 획득하며 고비를 넘겼다.
이듬해에는 한국체대에 진학했는데, 이해정 진행범 이철승 송경섭 허영모 등과 함께 한국체대 역사상 최고의 전력을 보유한 ‘공포의 83학번’세대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안영수는 그 제13회 대통령배와 제64회 전국체전, 제3회 세계청소년대회 선발전을 휩쓸면서 3관왕을 차지하고 꿈에 그리던 국가대표로 발탁된다. 그리고 12월 일본 오키나와에서 개최된 제11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싱가포르의 무클리스를 판정으로 잡고 결승에 진출한다.
결승전에서 안영수는 인도의 체난다 마차이야를 마치 샌드백 두들기듯 일방적으로 난타한 끝에 5대0 판정승을 거두면서 금메달을 차지했다. 당시 한국은 12체급에 출전해 금메달 6개로 종합우승과 함께 대회 3연패를 기록했다. 국내외 대회에서 4관왕에 오른 그는 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으로 병역면제 혜택까지 받자 갑자기 복싱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린다. 상업에 종사하던 부친의 도움으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지내던 19세 소년 안영수에게는 더 이상 목표가 없는 듯했다.
자해하며 포기하려던 복싱
한국체대 2학년이던 1984년 4월 LA 올림픽 선발전이 열렸지만, 안영수는 올림픽 대회자체에 출전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자해(自害)를 저질러 올림픽 선발전에 불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그는 선수촌 합숙소 계단을 밟으며 뚜벅뚜벅 옥상으로 걸어올라갔다. 그리고 계단에서 힘껏 뛰어내렸다. 발목 골절상을 입고 올림픽에 출전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여러 차례 시도 끝에 계획대로 골절상을 입자 스포츠과학 연구소와 세브란스 병원 외과측에서는 완치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마침내 안영수는 거사(?)에 성공해 퇴촌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처음 그에게 복싱을 가르쳤던 스승, 노병엽 관장의 간절한 설득으로 마음을 고쳐먹은 안영수는 침술 치료를 받으면서 상태가 호전됐다. 그리고 게으른 천재 복서 안영수는 올림픽 선발전에 억지로 중량을 맞춰 출전한다. 다른 사람들에겐 절실했던 출전 기회였지만, 그는 큰 의욕없이 출전하는 것이었다. 선발전 준결승전에서 만난 상대는 1983년 로마월드컵에 국가대표 출전한 이성목이었다. 세계 프로복싱 헤비급 챔피언 조 프레이저처럼 터프한 복싱을 펼치는 선수였다. 그러나 안영수는 회심의 라이트 일격을 명중, 단 55초 만에 RSC승 결승에 진출한다.
결승전 상대는 서울체고 2년 선배이자, 2년 전 뉴델리 아시안게임 선발전에서 그를 꺾었던 웰터급 지존(至尊) 정용범이었다. 복수혈전이 된 결승전에서 안영수는 넘을 수 없는 견고한 벽인 정용범과 맞대결을 펼쳤다. 복싱에 의욕을 잃고 스스로 부상을 당한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신들린 복서처럼 좌우 연타로 맹공하면서 압박한 끝에 예상을 깨고 5대0 판정승을 거두고 출전권을 획득한다.

무명에게 찾아온 행운
그해 7월 29일 상오. 미국 LA 메모리얼 콜로시엄 성화대에 성화가 점화되면서 23번째 올림픽의 막이 오른다. 이때 미국의 유명한 스포츠주간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지(誌)는 한국 선수단 가운데 미들급의 신준섭을 금메달 후보로 올려놓고, 김광선 전칠성 김동길 문성길 등을 은메달리스트 대상으로 꼽았다. 안영수의 이름은 없었다.
그러나 안영수에게는 운이 따르고 있었다. 그의 1회전 상대는 수단선수였는데, 1회전을 통과하면 2회전에서 ‘제2의 레너드’로 불리는 미국의 마크 브릴랜드와 대전이 잡혀 있었다. 1회전에서 안영수는 약체인 수단 선수에게 5대0 판정승을 거둔다. 2회전에서 안영수와 상대할 미국의 마크 브릴랜드는 13살에 복싱에 입문, 4년 연속 뉴욕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하면서 아마 전적 110전 109승(73KO) 1패를 기록한 거물급 복서였다. 하지만 브릴랜드와 대결을 앞두고, 네팔 선수의 실격으로 재추첨이 이뤄지면서 대진표가 온통 뒤바뀌게 된다. 그 바람에 안영수는 브릴랜드가 아닌, 다른 조에 편성되는 행운을 얻게 된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네팔 선수가 부전승으로 올라온 푸에르토리코 선수와 맞대결하게 되었지만 네팔 선수가 계체량에 실패하면서 푸에르토리코 선수는 2회 연속 부전승을 거두게 됐다. 하지만 국제복싱연맹(AIBA)은 규정 7조에 의거, 2연속 부전승을 인정하지 않아 결국 재추첨을 통해 안영수는 최강 브릴랜드를 극적으로 피한 것이다.
더 운이 좋았던 것은, 브릴랜드가 속한 A조에 복싱 강국인 캐나다의 웨인 고인, 푸에르토리코의 레이에스, 루마니아의 게나로, 이태리의 부로노 등 강적들이 모두 집결해 있었지만, 안영수가 속한 B조엔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선수들이 편성되어 있었다. 안영수는 16강전에서 별다른 특징이 없는 터키(튀르키예)의 온소이를, 8강전에 스웨덴의 코스켈라를 5대0 판정으로 이기고 동메달을 확보한다.
바로 이날 밴텀급 8강전에서는 문성길이 도미니카의 놀라스코와 대결하다 그만 상대의 버팅으로 왼쪽 눈이 찢어져 1회 2분 49초만에 통한의 RSC로 패해 안영수와 대조를 이뤘다. 여담이지만 16강전에서 강력한 우승후보 미국의 로버트 샤논을 3회 RSC로 잡으며 강력한 금메달 후보로 급부상했던 문성길에겐 최악의 불운이 닥친 올림픽이었다.
반면 안영수는 4강전에서 만난 핀란드의 조니 니만에게 방심하다 3회 한차례 다운을 당하는 식겁하는 장면도 있었지만, 무난하게 판정승을 거두고 결승에 선착했다.
운좋게 피하고 돌아가기도 했지만, 결국 안영수는 결승전에서 미국의 마크 브릴랜드를 만난다. 안영수는 189㎝ 장신인 브릴랜드의 강력한 스트레이트에 2회 한차례 다운을 당하기도 했지만 불타는 투지로 버텼다. 비록 판정패를 당했지만 값진 은메달을 획득했다.

행운은 거액의 포상금으로 바뀌고
사실 그가 메달을 획득하리라고 기대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출전하기 싫어 스스로 부상을 자초한 선수였다는 걸 아는데 누가 기대했겠는가. 국내 복싱전문가들도 메달이 나올 체급은 라이트급 이하의 경량급(김광선 허영모 문성길)뿐이라고 평가를 했었던 만큼, 웰터급에서 안영수가 일군 쾌거는 한국복싱계의 보너스였다. 대진운이 억세게 좋았던 안영수가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자신의 실력을 십분 발휘하며 하나씩 상대를 제압해 국위선양을 이뤘다.
귀국을 하자 김승현 한국화약회장이 3천만원의 포상금을, 정주영 현대건설회장이 2천만원, 전두환 대통령이 1천만원을 각각 지급했다. 그는 각계각층에서 7천만원이 넘는 금액을 수령하게 된다. 억세게 좋았던 운이 현금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7천만원은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35평을 살 수 있을 만큼 큰 금액이었다.

약관 20살의 청년 안영수에게 인생 최대의 잭팟이 일순간에 터지는 장면이었다. 국민훈장 맹호장까지 받은 안영수는 곧바로 복싱을 접어버린다. 더 미련이 없었다. 대학 졸업후 안영수는 금화공고, 석관고, 서울체고에서 지도자로 역량을 보이다가 일본에 건너가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10년전에 국내에 정착해 당구장을 운영했다.
4년 전에는 필자의 요청을 받은 안영수는 필자가 운영하는 체육관을 방문해 LA 올림픽에 동반 출전한 문성길과 조우해 LA 올림픽의 숨은 비화를 주제로 담화를 나누기도 했다. 현재는 서울 동대문구에서 자영업을 하면서 생활하고 있다. LA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안영수에게 또 다른 행운이 함께하길 기대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