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명 김윤태 문학평론가
  • 인문
  • 입력 2024.03.27 18:44
  • 수정 2024.04.02 16:04

봄날의 우국수심(憂國愁心)...우린 무얼 바랄까

[김윤태의 한국시 산책]
정희성 시인의 「청명」에 대해
1979년 암울한 시대의 '봄'시
10.26과 12.12사태가 있던 해
지금 이 나라는 진짜 봄을 맞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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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래불사춘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춘분(春分, 3월 20일)이 지났다. 흔히 봄의 시작을 입춘(立春)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으나, 그 시기가 2월 3~4일경이라 아직 날이 차기 때문에 입춘이라 해도 여전히 겨울이라고 느끼는 게 일반적인 실감일 것이다. 겨울 속에서 봄의 기운이 생동하기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입춘이라 한 것이지, 실제로 봄이 온 것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춘분 즈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날씨가 따뜻해지고 만물이 소생하기 시작한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평균기온을 감안할 때 체감상 명실상부한 봄날의 시작은 서울지역으로 한정해 놓고 보자면 요즘인 셈이다.

하지만 따스한 봄날이 되었다고 해도 낮에만 그럴 뿐 일교차가 심해 추위를 느낄 때가 많은데, 이른바 ‘꽃샘추위’가 심심찮게 찾아와서 그야말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말이 저절로 입에 오르내리곤 한다. 올해도 최저기온(서울)이 20일 1.2℃, 21일 0℃를 기록하여 체감온도는 영하권으로 쌀쌀한 편이었다.

춘래불사춘이란 말은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라는 뜻으로, 중국의 4대 미녀 중 하나인 왕소군(王昭君) 설화와 연관이 있다. 이 말은 당나라 시인 동방규(東方虯)의 「소군원(昭君怨)」이란 시에 나오는 구절인데, 그 시는 중국의 전한 시대 흉노로 시집간 궁녀 왕소군의 비극적인 생애를 노래한 작품이다.

요즘이 봄인데도 봄 같지 않았던 날씨라면, 우리가 정말 실감할 수 있는 봄은 대체 언제부터일까? 아마도 봄꽃들이 피기 시작해야 완연한 봄날이 왔다고 느끼지 않을까. 개나리와 진달래가 필 무렵은 대충 서울 기준 3월 말(3.28~29)이다. 그리고 벚꽃이 피면 마침내 본격적으로 봄날의 경치를 즐기러 사람들은 다투어 벚꽃놀이를 떠난다. 벚꽃은 대개 3월 말부터 4월 초에 피는데, 서울에서 벚꽃 축제가 열리는 시기는 석촌호수에선 4월 1~7일이고, 여의도에선 4월 4~9일이라고 한다. 이즈음에 해당하는 절기는 춘분보다 15일이 지난 ‘청명(淸明, 올해는 4월 4일)’이다. 감각적으로나 심정적으로나 봄의 진짜 실감은 청명 즈음부터라 해도 크게 어긋난 건 아닐 것이다.

1979년의 봄

황하도 맑아진다는 청명날

강머리에 나가 술을 마신다

온 나라 저무느니

봄도 오면 무엇하리

버드나무에 몸을 기대

머리칼 날려 강변에 서면

저물어 깊어가는 강물 위엔

아련하여라 술취한 눈에도

물 머금어 일렁이는 불빛

정희성 시인의 「청명」(1979년)이라는 시다. ‘청명’이란 말을 글자대로 풀이하면, “맑고 밝다”는 뜻이다. 그만큼 날씨가 맑고 좋아진다는 것이다. 옛부터 황하는 물이 탁하기로 유명한 강이다. 그런 강이 맑아질 정도라면, 청명 무렵이 얼마나 쾌청한 봄날이라는 말이겠는가. 그런데 이런 청명한 날에 어인 일인지 시의 화자는 저물어가는 나라 걱정을 하며 술을 마신다. 취기 어린 눈가에 눈물이 맺혔을까, 일렁이는 강물 따라 화자의 수심(愁心)도 점점 깊어지고 있음을 이 시는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수심의 정체는 무엇일까? 춘흥에 따른 취흥일 리 있겠는가. “봄도 오면 무엇하리/ 온 나라 저무느니”라고 했다. 이 시의 발표 연도를 눈여겨보자.

1979년! 이 해에 일어난 두 개의 사건은 한국 현대사를 뒤흔든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10.26과 12.12가 그것이다. 18년간 군사독재를 이끌었던 대통령 박정희의 죽음과, 새로운 군사독재의 기틀을 세운 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영화 <서울의 봄>을 참고하시라. 사실 이 두 사건은 별개의 것이 아닌, 일련의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1979년 5월의 김영삼 전대통령. 당시 야당 당수였던 김 전대통령은  그해 6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기로 한데 대해 크게 반발했다.
1979년 5월의 김영삼 전대통령. 당시 야당 당수였던 김 전대통령은 그해 6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기로 한데 대해 크게 반발했다. 그 심정을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 토로했는데, 그래 10월 국회에서 제명당하면서 부마항쟁을 촉발시켰다. 

시인의 예지력

한 나라의 정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그 이전에 나라 형편이 어떠했을까 능히 짐작이 가지 않는가. 이 시가 1979년 4월의 청명 무렵에 쓴 것이라면, 당시 한국 사회가 온갖 모순으로 붕괴 직전에 처해 있었음을, 시인의 예민한 감각이 그걸 포착해 낸 것이다.

“온 나라 저무느니”는 바로 유신독재의 말기적 증상에 대한 시인의 우국충정이 스며있는 구절이라 하겠다. 봄(청명)이 왔지만 여전히 봄 같지 않은 사회정치적 현실에 대해 시인은 ‘춘래불사춘’을 한탄스레 읊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봄도 오면 무엇하리/ 온 나라 저무느니”라는 시구에 주목해보자. 망국에의 한탄과 애수어린 충정, 누구의 시가 떠오르나? 요새도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서 실려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과거 국정교과서 시절에는 ‘두시언해’가 실려 있어서 ‘시성(詩聖)’이라 일컬어지는 당나라의 대표 시인 두보(杜甫)의 작품들을 중세 한국어 학습과 더불어 배울 수 있었다. 그중 한 편을 보자(중세 한국어 표기 대신에 필자가 대충 현대어로 바꾸었다.)

두보의 시 '춘망'

國破山河在(국파산하재) 나라가 부서졌으니 산과 강만 (남아)있고

城春草木深(성춘초목심) 성(장안) 안에 봄이 오니 풀과 나무만 무성하구나

感時花濺淚(감시화천루) 시절을 감탄하니 꽃이 눈물을 뿌리고

恨別鳥驚心(한별조경심) 이별을 슬퍼하니 새조차 마음을 놀래네

烽火連三月(봉화연삼월) 봉화(전쟁)는 석 달이나 이어지니

家書抵萬金(가서저만금) 집에서 온 소식은 만금보다 값지도다

白頭搔更短(백두소갱단) 흰 머리를 긁으니 또 짧아져서

渾欲不勝簪(혼욕불승잠) (머리카락을) 다 쥐어도 비녀를 꽂지 못할 듯하구나

두보의 오언율시 「춘망(春望)」(757)이라는 작품이다. 안녹산의 난으로 말미암아 가족과 헤어져 홀로 지내는 시인의 애절한 심경을 노래한 이 시에서 시인의 우국충정을 읽을 수 있다.

당나라의 태평성대를 열었던 당 현종이 말년에 양귀비에게 빠져서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외척과 환관들의 부패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지방의 절도사이던 안녹산이 난을 일으켜 나라는 더욱 혼란해진다. 이때 안녹산의 반란군에게 붙잡혀 장안(당나라의 수도)에 갇혀서 지은 이 시의 1~2행에 그려진, 전쟁으로 폐허가 된 장안에 대한 묘사는 봄날의 애잔한 풍경(3~4행)과 더불어 저무는 나라의 운명을 잘 드러낸다.

청명을 며칠 앞두고 있지만 화사한 봄은 아직 멀었다. 4월10일 봄에 치러지는 총선은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까. 사진=연합뉴스
청명을 며칠 앞두고 있지만 화사한 봄은 아직 멀었다. 4월10일 봄에 치러지는 총선은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까. 사진=연합뉴스

4월 봄 선거, 우린 뭘 바라나

제목 ‘춘망’은 봄에 '무엇'을 바란다는 뜻이리라. 두보는 전쟁(안녹산의 난)이 얼른 끝나 가족들과 재회하기를 바라고 또 나라가 안정되기를 희망한 것이 아니었을까. 시인 정희성 또한 유신독재의 어두운 정치현실을 걱정하면서 봄날 강가에서 수심을 달래고 있지 않았던가.

이제 오늘 우리는 이 봄에 무엇을 바랄 것인가. 곧 총선이 다가온다. 나라의 운명을 짊어질 선량들을 다시 뽑아야 한다. 과연 누구를 뽑아야 할까. 국제적으로는 우크라이나에서, 또 팔레스타인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 전쟁들에 대해 우리 정부와 언론이 취하고 있는 태도는 얼마나 적절한가. 70년도 넘게 정전 상태인 이 땅에는 과연 전쟁의 위험이 없는 것일까. 물가는 치솟고 수출 길은 막히고. 다들 살기 힘들다, 아우성이다. 용산에 나앉은 권력은 양귀비 같은 태평성대를 꿈꾸고 있을까. 이래저래 필자의 마음도 무겁고 어두워진다. 강가에 나가 술이나 마실까.

※ 김윤태는 한때 문학평론가로 잠시 활동하면서 여러 대학에서 강의도 한 연구자이기도 했으나, 지금은 어쩌다 그냥 잡문이나 끄적이는 낭인(?)이라 스스로 평한다. 서울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박사 졸업. 저서도 오래 전에 출판한 <한국 현대시와 리얼리티>(2001)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