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명 장옥님 칼럼니스트
  • 문화
  • 입력 2023.03.07 15:28
  • 수정 2023.03.08 13:02

동갑내기 음악가들, 베르디와 바그너

[장 PD의 클래식 한담(閑談)]
탄생 210년을 맞는 오페라의 거장들

베르디(왼쪽)과 바그너.
베르디(왼쪽)과 바그너.

서양 음악사에는 유명한 동갑내기 음악가들이 있다. 한 해에 두 명씩이나 비범한 재능의 음악가들이 탄생했다니, 그해 하늘에선 뮤즈들이 혼인이라도 했던 것일까? 1685년엔 바로크음악의 거장 바흐와 헨델이, 1810년엔 낭만파 음악 중에서도 피아노 음악계의 큰 별인 쇼팽과 슈만이 태어났다. 올해 2023년에 탄생 210년을 맞은 동갑내기 음악가들, 그러니까 1813년 태어난 두 인물 역시 음악사에 남다른 발자취를 남긴 작곡가들이다.

이 둘은 평생을 오페라에 천착하였던 작곡가였다. 한 사람은 혁명적 발상으로 오페라의 새로운 장을 열었고, 또 한 사람 역시 오페라의 혁신과 발전 도모에 큰 역할을 한 바 있다. 이 두 사람은 음악가로서 조국의 정치적 독립운동에 관여하여 민족의 영웅으로까지 추앙받았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그러나 서로 확연하게 대비되는 점이 더 많아서, 각자 태어난 지역-독일과 이탈리아-의 날씨만큼이나 음악 스타일도 다르고, 타고난 성품과 성장과정, 인생행로, 사회적 평판 등에 있어서도 너무 달랐다.

19세기 오페라계의 두 거장, 1813년 5월에 태어난 리하르트 바그너와 몇 달 뒤 10월에 태어난 주세페 베르디가 바로 그들이다.(바그너에 대해서는 이 칼럼에서 다룬 바가 있으므로 이번엔 주세페 베르디에 초점을 맞추어 올리려 한다.) 오페라 장르에서 혁명적인 발상으로 ‘악극(Musikdrama)’을 창안했던 바그너와 달리 베르디는 대중에게 친숙한 오페라 작품으로 ‘가극의 왕’이라는 호칭을 얻고 있다.

베르디가 생전에 좋아했다는 이탈리아 격언 “Torniamo all’antico e sara un progresso”(옛것을 돌아봄으로써 새로운 힘을 끌어내자)처럼, 그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에 기반하여 오페라를 만들었다. 그의 오페라가 널리 사랑받았던 것은 이야기의 극적 논리와 등장인물들의 섬세한 심리 표현 등 연극적 표현에 음악 못지않은 심혈을 기울였고, 평론가보다는 대중의 반응에 더 귀를 기울이며 오페라의 ‘흥행성’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베르디가 대중 취향에만 영합한 것은 아니다. 그는 “오페라는 노래(아리아) 듣는 재미에 보는 거지”라는 대중들의 취향을 배반하지 않았지만, 극적 구성에 있어 다소 엉성한 점을 성악가들이 뽑아내는 노래(아리아)로 커버했던 이탈리아 오페라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극의 소재를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대문호들의 문학작품에서 취하는 등 종합예술로서의 오페라의 개혁에도 앞장섰던 음악가였다.

오페라계에서 20대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베르디는 40대에 이르러 대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나부코>, <운명의 힘>, <라 트라비아타>,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 <아이다>, <오텔로> 등 모두 26편의 오페라를 남긴 베르디는 19세기 초에 태어나 세기를 넘겨 20세기의 벽두까지 여든여덟 해를 살았으니(1901년 1월 사망), 꽤 장수한 편이다. 긴 인생만큼이나 흥미로운 일화도 많이 남긴 거장의 삶이었다.

어린 시절의 음악수업

베르디가 이탈리아 북부의 파르마 공국의 도시 부세토 인근 시골에서 태어났을 무렵은 나폴레옹의 전쟁으로 유럽의 지도가 수차례 바뀌던 시절이었다. 그 여파는 베르디의 인생과 작품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그가 이탈리아 국적을 취득한 것은 이 나라가 정식으로 독립국이 된 1861년이 되어서였다. 그가 프랑스령의 이탈리아 지역에서 태어났기에 프랑스문화는 그의 음악 인생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프랑스 문학에서 영감을 얻곤 하여 오페라의 배경도 프랑스인 경우가 많았고,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얻으며 활동하기도 했다.

아버지 카를로는 결혼 8년 만에 태어난 귀한 아들에게 많은 정성을 쏟았다. 마을에서 잡화점을 겸한 주막집을 운영하여 그럭저럭 먹고살만 한 집안이었다. 악기 소리만 들으면 들뜨는 아들을 위해 중고 스피넷(피아노의 일종)을 구해주었는데, 얼마나 건반을 두드려댔는지 곧 고장이 나고 말았다. 악기를 고쳐준 사람은 꼬마의 솜씨가 놀라워 수리비를 받지 않겠다는 영수증을 대신하는 쪽지를 남기기도 했다.

열 살 무렵부터는 이웃 도시인 부세토에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소년 베르디는 인문학과 작곡을 배우며 지역 음악행사에도 참여하여 앞날에 큰 도움을 주게 될 음악애호가 안토니오 바레치를 만나게 된다. 부세토는 도시 규모는 작았지만 문화적 활동이 활발한 곳이었고, 이 지역의 음악협회를 주도했던 바레치는 베르디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의 후원자로 나서게 된다. 바레치는 베르디에게 정신적인 아버지의 역할을 했고, 후에 자신의 딸을 베르디와 맺어주기도 했다.

아버지 카를로와 후원자 바레치는 합심하여 베르디를 음악가로 키워보자는 계획을 세우고, 밀라노음악원의 입학시험을 치르게 했다. 그러나 음악원에서는 베르디의 입학을 거부했다. 나이가 너무 많다(당시 베르디는 19세였다)는 등의 이유를 들었지만, 사실은 ‘음악적 재능이 부족함’이 큰 이유였다고 한다. 베르디는 밀라노음악원이 자신을 낙방시킨 것에 대해 훗날 나름대로 통쾌한 앙갚음을 할 수 있었다. 오페라 작곡가로 이름을 날리고, 국민적 영웅으로 대접받게 된 훗날, 밀라노음악원에서 학교 이름에 ‘베르디’를 쓰자고 요청해 왔다. 이에 베르디는 “(음악원이) 젊은 나를 원하지 않았으니, 늙은 나를 가질 수 없다”며 한마디로 거절했던 것이다.

19세기 이탈리아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
19세기 이탈리아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

인생을 바꾼 오페라 <나부코>

음악원 입시에 실패했지만, 아버지들의 권유로 그는 밀라노에서 개인 레슨을 받아가며 작곡 공부를 계속하고 음악계에 인맥도 쌓아갔다. 1835년, 베르디는 첫 작품을 오페라 극장 두 곳에 보냈다. 한 곳에서는 무명의 청년 작곡가를 신임하기 어려워 공연을 거절했지만, 다른 곳의 극장장은 이 작품을 유심히 본 후 스칼라극장에 보내 평가를 부탁했다. 스칼라 측은 대본을 수정하고, 오케스트레이션을 다시 손질하여 무대에 올리기로 했다. <오베르토>는 초연(1839년)에서 비평가와 관객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어 14차례나 공연하는 등 데뷔작 치고는 좋은 성적을 거뒀다.

첫 작품의 반응에 힘을 얻은 베르디는 연이어 코믹오페라를 작곡하여 스칼라에 올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하루 동안의 왕>이라는 제목의 이 희극은 공연 내내 관객의 야유가 끊이지 않았고, 오케스트라 박스에 앉아있던 작곡가는 객석에서 날아오는 야유에 쥐구멍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초연이자 마지막 공연이 된, 참담한 실패작이었다. “박수를 보내지는 않더라도 그 오페라를 침묵 속에서 맞아주기만 했어도 말할 수 없이 감사했을 텐데...” 그는 이날의 모멸감을 평생 잊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두 번째 오페라의 실패를 겪기 전, 사실 그는 무슨 정신에 오페라를, 그것도 희극을 작곡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큰 슬픔을 겪고 있었다. 바레치의 딸 마르게리타와 결혼하여 낳은 첫 딸과 그 이듬해 태어난 아들이 연이어 병사했고, 설상가상으로 1840년 6월엔 아내마저도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베르디의 첫사랑이자 경제적으로 자리 잡지 못한 남편을 위해 결혼 패물을 팔아가면서 가정을 꾸려온 헌신적인 아내였다. 그의 두 번째 오페라는 결혼 4년 만에 아내와 두 아이를 잃은 비통함을 딛고 써 내려간 작품이었다. 베르디는 그만 절망의 늪에 빠져버린 채 음악계를 떠날 결심까지 하며 두문불출하게 된다.

그때 그를 다시 세상 밖으로 불러낸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스칼라극장의 임프레사리오였다. 임프레사리오(Impresario)는 오늘날의 프로듀서에 해당하지만, 당시엔 극장운영의 거의 모든 권한을 가진 매우 막강한 직책이었다. 매년 어떤 작품을 무대에 올릴 것인지, 작곡가, 대본작가, 안무가, 출연진, 미장센, 판매실적 등 오페라 공연의 모든 사항을 결정하는 권한을 가진 자리로, 베르디에게 첫 번째 오페라의 공연기회를 주었고, 이어서 코믹오페라를 주문했던 사람도 바로 임프레사리오 메렐리였다. 데뷔의 기회를 준 것도, 좌절의 나락으로 이끈 것도 바로 그였다.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베르디를 만난 메렐리는 오페라 대본을 하나 내밀었다. 원래 이 작품을 작곡하기로 되어있던 다른 작곡가가 대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거절한 것인데, 다시는 오페라를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 베르디에게 건넨 것이다. 대본을 받기는 했으나, 화가 치밀어오른 그는 집에 오자마자 책상 위에 내동댕이쳐버렸다. 그러나 훗날 베르디의 회고에 의하면 그날 우연히 펼쳐진 대본에서 “가라 꿈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오자 갑자기 마음을 고쳐먹고 펜을 잡게 되었다.

오페라 <나부코>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느브갓네살(이 이름의 이탈리아식 발음이 ‘나부코’)의 예루살렘 정복 사건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다. 1842년 3월 9일 스칼라극장에서 드디어 베르디의 세 번째 오페라의 막이 올랐다. 이미 전작의 실패로 의기소침해 있던 작곡가는 객석의 환호성을 요란한 야유로 착각할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오페라의 마지막 합창곡인 “전지전능한 여호와”를 앙코르로 다시 연주해야 할 정도로 청중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당시 밀라노 음악지에는 오페라에 나오는 합창곡 “가라 꿈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일명 ‘히브리노예들의 합창’)에 눈물 흘릴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는 리뷰가 실리는 등 평론가들의 호평도 잇따랐다.

<나부코>의 큰 성공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합창곡의 힘도 빠뜨릴 수 없을 것이다. 베르디의 오페라에서 합창곡은 마치 주인공이 아리아를 부르듯 합창의 여러 파트에서 동일한 선율을 노래하게 함으로써 하나의 아리아처럼 들려준다. 게다가 당시 오스트리아의 압제하에 있던 북부 이탈리아인들로서는 <나부코>에서 바빌로니아에 끌려간 히브리인들에 감정이입이 되어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들으며 벅찬 감동에 빠졌을 것이다. <나부코>의 공연은 횟수를 거듭할수록 열기를 더했고, 티켓판매의 기록을 경신하며 롱런했다. 메렐리는 베르디에게 차기작을 주문하며 백지수표를 내밀었다 한다.

유튜브=나부코 중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이탈리아인의 애국심을 자극한 베르디의 오페라

베르디가 이처럼 오페라 작곡가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오페라의 종주국 이탈리아’라는 배경도 큰 몫을 했다. 이탈리아에서 오페라는 국민적 오락을 넘어 그들 삶의 일부였다. 베르디가 한창 활동하던 시절의 이탈리아 반도는 외세로부터의 독립과 국가 통일이라는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크고 작은 내란을 치르는 중이었는데, 베르디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더라도 그의 오페라는 이러한 처지에 놓인 동포들을 위로하고 결속시키는 데 큰 힘이 되었다. Verdi라는 이름은 우연히도 당시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사르데냐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Vittorio Emanuele Re D’Italia, 독립 이탈리아의 첫 번째 국왕이 된 인물)의 머리글자 V.E.R.D.I와 일치했다. 외세의 눈치를 보며 “비토리오 임마누엘레 만세!”라고 외칠 수 없을 때, 베르디의 이름을 애국의 상징으로 삼아 “Viva Verdi”를 외치며 독립국가를 염원했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베르디는 이탈리아의 독립 정부에서 초대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베르디는 오페라의 연이은 성공으로 꽤 큰 재산을 모았다. 그는 이 재산을 자신을 위해서만 쓰지 않았다. 독립전쟁을 위한 군자금, 전쟁과 내란, 재해의 피해자들을 위해 쾌척했다. 그리고 말년에 자신의 최고의 작품이라며 만든 것이 ‘카사 베르디(Casa Verdi)’인데, 이 ‘베르디의 집’은 예술 직종에 종사한 65세 이상의, 빈곤한 처지의 이탈리아 시민들을 위해 세운 일종의 양로원이다. 땅값과 건축비 모두 그가 지불했고, 유언장에 그 운영을 위한 자금도 마련해두었다. ‘카사 베르디’만이 아니고 주변에 탁아소, 학교, 도서관, 병원에 이르기까지 그가 세우거나 후원한 기관이 많이 있다. 평생을 바쳐 작곡한 오페라를 통해 모은 재산을 통 크게 사회에 환원한 거인의 풍모. 독일의 동갑내기 음악가와는 정말 여러 면에서 대비가 되는 인물이다.

유튜브=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 장옥님 칼럼니스트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음악(작곡)과 음악학을 전공하였음. KBS FM라디오에서 다수의 클래식음악 프로그램 및 콘서트, 대중음악프로그램을 제작하였음. 저서로는 <위기의 음악가들, 2021년>, <KBS월드뮤직, 2006년(共著)> 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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