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닥터 스코의 캡틴 사이언스] 과학산업계에 불어닥친 ‘책임 광풍’ “그들은 당신의 자릿세를 노리고 있다”

사진= 픽사베이
사진= 픽사베이

스파이더맨의 명 대사

필자는 여느 지구인들과 마찬가지로 코로나 바이러스의 삼엄한 감시 하에 온갖 눈치밥을 먹고 사는 3년차 현생 인류이다. 또한, 필자는 마블(Marvel) 공화국이라 불리우는 대한민국의 국민 답게 마블이 만들어 놓은 가상의 세계관에 빠져 행복한 어지럼증을 느끼는 평범한 어른이다.

이렇듯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사는 필자는 지금으로부터 한달여 전인 2021년 12월 중순, 매우 큰 깨달음을 하나 얻었다. 이는 ‘5월’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느 아리따운 여성분이 세상을 하직하는 순간 그녀의 하나뿐인 조카에게 들려준 교훈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녀는 이제 곧 자신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될 조카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단다. 피터.”

그렇다. 얼마 전 개봉한 마블 스튜디오의 단독 히어로 무비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 나온 명대사이다.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터져 나온 추억의 명대사는 필자로 하여금 옛 추억에 잠기도록 도왔고, 토씨 하나 변함없이 수십년 세월의 강을 건너온 교훈이 주는 감동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읊조리는 배우만 교체될 뿐 매 시리즈마다 소름 끼치도록 똑같은 대사. 하지만 이번만큼은 힘과 책임이라는 두 단어가 필자의 마음을 더욱 강하게 뒤흔들었다. 마스크로 코와 입이 가리워진 틈을 타 눈과 귀의 감각이 제 멋대로 활개를 쳤기 때문이었으리라.

‘큰 책임에는 큰 힘이 따른다’는 역은 성립할까

힘이 있는 자에게는 책임이 주어지고, 힘의 강도가 커질수록 책임의 무게 또한 늘어난다는 명제. 메이 숙모가 세상에 던진 이 고리타분한 명제는 결코 역이 성립하지 않는 충분조건이다.

하지만 이 지구 어딘 가에서는 이 명제의 역을 성립시키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일어난다. 코로나 시국으로 인한 재정적인 어려움에 직면한 현재의 과학산업계는 이 명제의 역이 성립되는 대표적인 기적의 현장이다. 더군다나 이 기적은 과학산업계가 직면한 재정 문제를 부분적으로나마 해결하는 등 놀라운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떨어지는 칼날을 잡아낼 만큼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잡아내는 능력을 갖춘 기업들이 없었다면 결코 불가능했을 테지만 말이다.

명제의 역이 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의 씨앗이 연구원들의 머리 속에서 움틀 무렵, 과학산업계는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직급의 통폐합’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연구원들 간에 존재하는 불합리한 상명하복을 최소화하여 연구 효과를 극대화시키겠다는 전략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일부에서는 분명 그러한 전략을 세웠을 거라 믿는다. 하지만 그들의 전략이 과연 그렇게 단순하기만 했을까?

‘책임’은 도대체 어떤 책임일까

과학산업계의 여러 기업들은 최근 몇 년에 걸쳐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으로 세분화 되어있던 기존의 연구원 직급 체계를 통폐합하여 사원/선임/책임으로 간소화했다. 그들의 이러한 작업은 놀랍게도 대다수의 연구원들의 진급 기회를 박탈함과 동시에 연봉 상승 또한 억제시키는 나비효과를 만들어냈다. 상식대로라면 머리 깨나 큰 연구원들의 심한 반발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연구원들은 이러한 상황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회초년생의 젊은 연구원들은 이를 반기기까지 했다. 왜일까?

화학공학 전공자로서 심리학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알지 못하는 필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를 피력해보자면 이는 ‘책임’이라는 단어가 갖는 ‘힘’ 때문이다. 책임이라는 직급명에 담긴 강력한 심리 마법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기업이 나에게 책임이라는 직급을 준다? 이는 기업이 나에게 중차대한 사안의 결정권을 준 것이나 다름없다. 현대 사회에서 결정권이란 힘을 의미하지 않던가. 다시 말해, 나는 책임이라는 직급을 받음으로써 수준 이상의 권력을 얻게 된 것이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지 얼마되지 않은 시기에 생각지도 못한 힘을 얻게 된 상황. 누가 이를 마다할 텐가.

하지만 이는 곧 힘을 얻은 자가 너무도 많다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고 만다. 스파이더맨이 오롯이 본인의 능력을 어필할 수 있는 곳은 그의 단독 영화에서다. 수많은 히어로들이 등장하는 어벤져스 시리즈에서는 이리저리 치이는 풋내기 인턴일 뿐이다. 2016년에 개봉했던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는 힘을 가진 자들이 많아졌을 때 펼쳐질 수 있는 혼란스러운 상황들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공항에서의 전투신은 단연코 이러한 혼란 상태의 정점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호랑이가 없는 굴에서는 여우가 왕 노릇하는 법. 엇비슷한 힘을 가진 이들이 넘쳐날 때 이들 간의 서열은 무엇으로 결정될까? 이 또한 <시빌 워>에서의 사례들을 통해 짐작이 가능하다. YB(스파이더맨과 앤트맨)와 OB(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를 나누는 기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 이는 그들이 어벤져스에 합류한 시기, 즉 데뷔 시기에 따라 결정된다.

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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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일에 책임지라는 요구인가

책임들이 넘쳐나는 현재 과학산업계 또한 개개인의 진급 시점 혹은 호봉 수에 따라 서열이 결정될 수밖에 없다. 책임 1년차, 2년차, 3년차. 2배, 3배, 많게는 10배까지 차이 나던 초반의 호봉 차이는 연차가 더해감에 따라 점점 줄어들고, 결국엔 모두 1배로 수렴한다. 다시 말해 세월이 한참 지나면 모두가 동등한 상황이 되는 것이다.

초반의 강렬한 달콤함을 잃어버린 이들, 단물이 다 빠져버린 껌의 신세가 되어버린 책임들을 기다리는 건 진정한 의미의 responsibility(잘못된 일에 대한 책임)뿐이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많은 힘에는 많은 책임이 따른다! 대한민국 과학산업계에는 잘못된 일에 대한 책임을 짊어질 피터 파커(Peter Parker)들이 너무도 많다. 멀티버스(multi-verse)의 문이 열린 탓인가.

글쓴이

닥터 스코 과학저술가/칼럼니스트

필명 닥터 스코는 카이스트 생명화학공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공학박사로서, 현재 다양한 교육활동을 하고 있는 과학저술가이자 과학칼럼니스트입니다. 대표저서로는 <스파이더맨 내게 화학을 알려줘( 2020 )>, <엑스맨 내게 물리의 비밀을 알려줘( 2021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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