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혈강호’ 속 폭탄 제조업자의 현실 고민

[닥터 스코의 캡틴 사이언스] 조선시대 ‘흑색 화약’이 발전하지 못한 까닭도

만화 '열혈 강호' 표지.
만화 '열혈 강호' 표지.

뜨거운 인기 ‘열혈강호’에 등장하는 벽력자

여기서 펑! 저기서 펑! 내용 전개가 너무 느리다는 일부 독자들의 폭탄테러급 혹평에도 불구하고 두터운 팬덤층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으며, 까다로운 이용자들로 가득한 게임 시장조차 제 손아귀에 넣은 지 한참이나 된 대한민국 국가대표 만화 컨텐츠. 『열.혈.강.호.』

오늘은 2022년 검은 호랑이의 해를 기준하여 28년 간의 연재 대기록을 세우며 ‘대한민국 최장수 만화’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는 열혈강호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나눠볼까 한다. 보다 상세하게는 만화 속 무림의 절대고수들 틈바구니에서 자신만의 고유 영역을 구축해 놓은 한 ‘일반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많은 독자들이 익히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이 만화는 ‘검황’으로 대표되는 무림 정파와 ‘천마신군’으로 대표되는 무림 사파 간에 벌어지는 여러 스펙터클한 사건들을 소재로 매회 진행된다. 사건들은 무림 고수들 간의 수많은 대립과 첨예한 갈등으로 점철되기에 주연급의 등장 인물들은 스토리가 진행되는 내내 자신의 무공 능력을 적극 어필한다. 가령 체내의 기를 외부로 방출시켜 타인에게 해를 입히거나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행태 등이다.

하지만 열혈강호의 글작가이자 시나리오 전반을 기획하는 전극진 님은 온갖 무공 능력자들이 득실거리는 무협 소굴 속에 평범한 대장장이 하나를 끼워 넣는 잔혹한 만행(?)을 저질렀다. 그의 이름은 벽력자(霹靂者). 한자어를 해석하자면 ‘하늘과 땅 사이에 일어나는 방전 현상을 재현해내는 사람’ 정도일까? 한마디로 벼락을 만들어내는 인물이라는 뜻. 『엑스맨』의 스톰, 혹은『어벤져스의』 토르와 같은 능력을 뜻하는 이름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일반인으로서 그의 비범한 능력은 폭탄을 제조하는 것이다. 아마도 작가는 폭탄의 폭발 굉음을 천둥 소리와 비견하여 캐릭터의 이름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자연을 다스리는 신의 이미지를 덧입히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사진= 픽사베이
사진= 픽사베이

만화에서는 이러한 벽력자의 폭탄 제조 능력이 무림의 고수들로부터 높이 평가받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며, 이로 인해 그와의 대면조차 꺼리는 고수들의 모습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작가는 그런 벽력자에게 신비주의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었던 것일까? 벽력자의 등장횟수는 다른 주요 인물들에 비해 현저히 적으며 이는 필자로 하여금 작가의 숨겨진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케 한다. 설령 작가의 계획된 의도가 없었더라도 그토록 등장 횟수가 적었던 이유에 대해 나름의 논리를 펼쳐보는 작업은 필자 개인의 취미 생활인 동시에 ‘호사가’로서 필자에게 주어진 업이라 여긴다.

역사에 화약 이야기가 미약한 이유

이에 필자는 한국의 화약 역사를 헤집어보던 중 벽력자의 등장횟수가 눈에 띌 만큼 적었던 것과 관련하여 과학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냈다. 그 이유인즉슨, ‘흑색 화약’으로 대표되는 전통 화약의 까다로운 준비 과정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고대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며 몽골의 침략 전쟁을 통해 전세계 각지로 빠르게 퍼진 흑색 화약은 고려 말 우리 땅 한반도에도 그 존재가 알려졌다. 흑색 화약의 정체는 세 가지 재료들(염초, 숯, 유황)로 구성된 혼합물이었다. 만드는 과정 또한 단순한 혼합이 거의 전부였기에 큰 노력을 요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한반도에서는 그후 수백 년 간 흑색 화약의 자체 제작이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사실상 전무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유는 하나. 화약의 제조를 위한 원재료의 수급이 너무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숯이야 온 나라에 차고 넘쳤다지만 염초와 유황은 상황이 전혀 달랐던 것이다. 십분 양보해서 유황은 일본이 매해 조공으로 바치고 있었던 터라 수요에 발맞출 수 있었다지만 염초는 하물며 구걸을 통해서도 얻을 수 없었다.

이는 중국이 염초, 즉 질산칼륨(KNO3)의 제법을 꽁꽁 숨기고 있던 탓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염초의 제법이 세상에 알려진다는 것은 주변 나라들의 대규모 화약 생산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 중국 자신과 동일한 화력을 지닌 나라들이 우후죽순 생겨난다는 것을 뜻했다. 세상 어느 누가 배 곯아가며 수백 년간 고생해서 쑨 죽을 개에게 주고 싶을까? 힘을 얻은 개가 사람 행세를 하며 주인의 위에 군림할지도 모르는데.

고려와 이후의 왕조 조선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손으로 염초를 생산해내야만 했으며, 세종을 포함한 몇 임금들은 염초의 제법을 알아내기 위해 기를 쓰고 덤볐다.

그러던 중, 오래된 집 처마 밑의 꾸덕꾸덕한 흙이 소량의 염초를 포함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 알려졌다. 더욱이 한참이 지나서는 소와 말, 혹은 인적의 왕래가 잦은 길가의 흙을 통해서도 염초의 채취가 가능하다는 ‘꿀팁’이 전해졌다. 정리해보자면 온갖 동물들이 오랜 세월 대소변 테러를 감행한 더러운 흙이 바로 염초(질산칼륨)를 포함한 흙, 함토(醎土)였다는 것이다.

한국 전통 가옥의 처마밑. 사진= 픽사베이
한국 전통 가옥의 처마밑. 사진= 픽사베이

처마밑에서 발견된 ‘비법’

이 ‘더러운’ 사실에는 결코 더럽지 않은 과학적인 원리가 여럿 숨어있었으니. 그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원리는 처마 밑의 더러운 흙에는 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질산 이온이 함유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질소고정-질소동화작용-질소순환으로 이어지는 질산화 과정이 그곳에서 특히 효율적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뿌리혹박테리아 등의 세균으로 인해 공기 중의 질소가 암모늄 이온 형태의 화합물로서 환원되었으며, 이를 낼름 받아먹은 식물은 광합성을 통해 단백질과 같은 유기질소화합물을 합성하였고, 이런 식물을 섭취한 동물은 배변을 통해 토양에 비료로서 질소화합물을 공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름하여 질소 순환. 온갖 동물들의 해우소가 되어왔던 처마 밑은 사실상 질소 순환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고, 조선의 권력자들은 미생물들이 즐비한 그곳에서 국력을 키울 수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남의 집 처마 밑은 함부로 넘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개인의 사유 재산 침해에 해당되는 법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니 말이다. 더욱이 함토를 채취한다고 이집 저 집 기웃거리며 흙을 죄다 뒤엎는 광인을 어느 누가 반기겠나?

벽력자의 등장 횟수가 극히 적은 건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으로 추정된다. 열혈강호의 ‘폭마’ 벽력자 또한 여러 정황 상 오래 전 한반도 땅을 밟고 살아가던 인물. 이 땅의 화약 제조 기술자중 하나였던 그 역시 염초의 수급에 난항을 겪었을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이와 더불어 당시 조정에서는 개인의 화약 제조를 철저히 막았기 때문에 벽력자가 손에 넣을 수 있는 함토의 양 또한 극히 적었을 터.

다시 말해, 함토를 채취하기 위해 온 나라를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니는 벽력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탓에 애당초 독자들에게 자주 얼굴을 내보일 수 있는 ‘한가한 인물’이 아니었다. 무리 간에 싸움박질할 겨를이 어디 있나? 일분 일초가 소중한데.

앞으로 전개될 ‘열혈강호’의 뒷이야기에서 염초를 긁어모으는 벽력자의 고충이 표현되길 진심으로 바래 본다. 만화 속 현실적인 캐릭터에게는 보다 현실적인 고민들이 어울린다.

글쓴이

닥터 스코 과학저술가/칼럼니스트

필명 닥터 스코는 카이스트 생명화학공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공학박사로서, 현재 다양한 교육활동을 하고 있는 과학저술가이자 과학칼럼니스트입니다. 대표저서로는 <스파이더맨 내게 화학을 알려줘( 2020 )>, <엑스맨 내게 물리의 비밀을 알려줘( 2021 )>등이 있습니다.

댓글

    함께 읽을 글

    칼럼 전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