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무대 총독 꽌저와 용산 총독 관저
‘용산 이전’에 합리적 설명 못해 이는 ‘합리적 이유’ 없기 때문 “비합리적 처사가 향후 5년의 예고편인가?”
몇 해 전 한양도성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작업을 추진하면서, 연구팀은 그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의 하나로 ‘현재에도 방어시설로 사용되는 중세 성벽’이라는 점을 들었다. 등재 여부를 결정하는 이코모스(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관계자들도 이 점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와대 뒤쪽은 백악과 성벽, 곳곳에 설치된 초소들이 ‘철통방어’를 한다. 시내에서 청와대에 접근하는 통로도 적다. 일본이 중일전쟁을 도발하던 무렵, 육군 대장 출신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는 백악 남쪽 기슭 경무대(景武臺)에 새 관저를 지으라고 지시했다. 전쟁이 한반도에까지 파급될 경우에 대비해 ‘전시 최고 사령부’를 가장 안전한 곳에 두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권위적, 고압적 위치의 청와대
경무대 총독관저는 1939년에 완공됐고, 해방 후 미군정 사령관 관저를 거쳐 대통령 관저가 되었다. 경무대는 시설명이 아니라 지명(地名)으로, 대(臺)는 본디 가파른 언덕 위에 펼쳐진 평평한 땅이라는 뜻이다. 서울에는 필운대, 파총대, 침류대 등이 있었다. 경무대라는 지명은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한 이후에 생겼다. ‘삼청동 총리공관’처럼 ‘경무대 대통령 관저’가 바른 이름인데, 이승만 정권 때에는 약칭으로 ‘경무대’라고들 불렀고 4·19 이후 이 사실을 잘 몰랐던 윤보선 대통령이 청와대로 이름을 바꿨다. 이름이야 어쨌든, 청와대는 애초 식민지 지배자들이 군사적 관점에서 입지를 정한 시설이었다. 조선총독에게는 민주적 소통이 불필요했다. 그에게는 식민지 원주민이 하찮은 ‘아랫것’들일 뿐이었다. 총독은 서울로 대표되는 한반도 전역을 내려다 보는 자리에 있었고, 서울 주민들은 그의 거처를 우러러 보아야 했다.
청와대가 민주국가의 대통령 관저 위치로 부적절하다는 비판은 오래 전부터 제기되었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말에는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현재의 청와대는 위치만으로도 권위적이고 고압적이다. 2017년 대선 때 문재인 후보가 집무실을 광화문 광장 주변으로 옮기겠다고 공약한 것도 이런 문제를 해소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공약 이행을 위해 송현동 옛 미국대사관 관사 부지에 새로 짓는 안, 국립고궁박물관을 사용하는 안 등 여러 방안을 검토했으나, 어떤 구상이든 ‘분단상황’이라는 현실을 돌파할 수 없었다. 결국 문재인 정부는 공약 이행을 포기했다. 그렇다고 대통령 집무실 이전 가능성이 완전히 소멸하지는 않았다. 서울시가 추진하던 ‘광화문 광장 재구조화 사업’의 결과에 따라 재검토할 여지는 남아 있다.
수백년간 서울의 공동묘지였던 용산
지금 문제가 되는 용산에도 조선총독 관저가 있었다. 식민지 지배자들이 용산에 총독관저를 지은 이유는 용(龍)이 상서로운 신수(神獸)라는 둥, ‘뷰’가 천하제일이라는 둥하는 최근의 해괴한 주장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남대문에서 한강에 이르는 최단 거리 도로변에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는 곳이 거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를 협박해 ‘한일의정서’라는 군사협정을 체결했다. 일본군은 필요에 따라 한국 내 어느 땅이나 점유(占有)할 수 있고, 한국 정부는 그에 협조해야 한다는 것이 이 협정의 핵심 조항이었다. 그해 8월15일, 한국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는 한국 정부에 군용지 수용을 통보했다. 그가 요구한 땅은 용산의 300만 평, 평양의 393만 평, 의주의 280만 평 등 모두 1천만 평에 달했다. 규모도 엄청났지만, 한국 정부를 곤혹스럽게 한 것은 그 장소였다. 용산은 수백 년간 서울 주민이 함께 이용했던 공동묘지였다. 묘를 함부로 이장하는 것은 한국인의 정서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 정부는 우선 대책을 마련하는 척하며 시간을 끌었다. 다행히 만주와 대한해협의 전선(戰線)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일본군은 심하게 독촉하지 않았다.
일본의 승리가 확실해진 1905년 6월, 하세가와는 한국 내부대신 이지용을 불러 특별히 20만 원을 지급할 테니 7월 26일까지 토지 수용을 완료하라고 독촉했다. 1천만 평에 20만 원이면 1평 당 2전으로 계산한 셈이다. 이지용은 서울, 평양, 의주의 지방관들에게 일본군이 요구하는 토지의 이용 현황을 조사하고 보상 가액을 산정하라고 지시했다. 며칠 뒤 한성부는 해당 구역 내에 분묘 111만7308기, 사유 전답 3118일경(日耕·소 한 마리로 하루에 갈 수 있는 면적), 가옥 1176호가 있으며, 보상액은 89만7534원으로 추산된다고 보고했다.
한성부가 제시한 분묘 1기당 이장비는 50전이었는데, 이는 당시 장정 하루 일당도 안 되는 액수였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이조차도 지급할 형편이 못 되었다. 보상비도 없이 며칠 내로 분묘를 옮기라는 지시를 받은 사람들은 먼저 내부(內部)로 달려가 사정을 봐달라고 간곡히 호소했다. 그러나 내부는 이 일에 대해 아무런 결정권이 없었다. 흥분한 군중 일부가 소리를 지르고 기물을 집어던졌다. 폭동의 조짐이 있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즉시 현장에 출동하여 총칼로 군중을 해산시켰다. 일본군은 이렇게 약탈한 광대한 땅 위에 거대한 병영 단지와 연병장, 사령관 관저를 지었다. 하세가와가 제2대 조선총독이 된 뒤 사령관 관저는 총독 관저로 바뀌었다. 일본군이 군용지로 수용한 땅은 해방 이후 그대로 미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시민에게 ‘용산공원’을 뺏을 순 없다
미군이 다른 곳으로 기지를 옮기고 용산 땅을 되돌려주기로 한지 20년이 넘었다. 이 땅에 대한 역대 정부의 방침은 한결같았다. 공원으로 조성해 시민에게 되돌려준다는 것. 윤석열 당선인이 느닷없이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 국방부 청사로 옮기겠다고 선언했다. 국방부 청사가 영구적인 대통령 집무실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언제건 공원 부지 안에 새 집무실을 신축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민(民)과 소통을 확대하는 방안이 될 수 있을까? 군부대는 자체가 경호시설이지만, 공원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다. 여전한 분단상황에서 안보를 가장 중시하겠다는 정권이 대통령 집무실에 아무나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도 안 된다. 경호시설과 경호인력은 겹겹이 늘어날 것이고 공원 내 시민의 공간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당선인은 청와대를 시민에게 돌려주겠다고 했지만, 실은 시민에게서 용산공원을 빼앗아 대통령의 권역으로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청와대를 시민에게 돌려주고 새 대통령 관저와 집무실을 만드는 것은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입지, 경호 체계, 비용, 이미지 등을 면밀하게 검토한 뒤에 할 일이다. 시민들이 당장 청와대를 비우라고 한 것도 아닌데, 인수위는 이 일에 대해 합리적 설명을 전혀 못한다. ‘합리적 설명’을 못하는 것은 ‘합리적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비합리적 처사’가 향후 5년간 일어날 일의 예고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암담할 따름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