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은 말없이 살라는데, 뇌는 뭘하려는 걸까?

[정연섭의 과학과 철학] ‘이성의 한계’ 주장하던 칸트의 시대와 달라 뇌과학은 “인간의 한계는 없다” 보여줘 뇌는 불확실성 시대를 헤쳐나갈 능력도

그림= LG CNS
그림= LG CNS

알수 없다면 침묵하라

성현들은 침묵을 강조했다. 고려 후기 공민왕의 스승 나옹선사는 ‘청산은 나를 말없이 살라한다’라고 전했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종교전쟁을 치른 후에 임마뉴엘 칸트는 이성의 한계를 분석하여 “신과 우주의 한계를 알 수 없다”며 인간의 독단을 경계했다. 20세기 초 비트겐슈타인은 사진으로 찍히지 않는 광경을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주장했다.

일반인들이라면 이성의 한계가 있다는 주장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칸트나 비트겐슈타인 때는 스승들의 탄탄한 이론 탓에 후학들은 반론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칸트의 제자 헤르더는 스승이 감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며 문제를 제기했다가 엄청 욕을 먹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묵언 수행을 위해 알프스 산골로 들어갔지만 관철되지 않자 자기 말을 철회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뇌과학과 사고 실험에서 얻은 것

반면 지금 우리 사회는 이데올로기 논쟁이 한창이다. 행동과 말에서 공격할 틈이 보이면 물고 늘어지는 기동전을 벌인다. 누구라도 칸트처럼 이성과 감성을 도마 위에 올려 비판하고픈 충동을 느낀다. 헤게모니를 잡기 위한 기동전과 진지전에 침묵이 훼손되지만 논쟁으로 사회가 발전한다면 굳이 마다할 이유도 없다. 특히 칸트나 비트겐슈타인의 ‘침묵 강요’는 뇌과학 태동 이전 시대의 주장일 뿐이다.

칸트의 이성 비판도 사실은 뇌과학이다. 뇌가 시각, 청각, 후각 등 오감으로 들어오는 신호를 종합해 사물을 구분하는 과정을 설명한 책이 ‘이성 비판’ 책이다. 당시에는 뇌에 대한 지식이 없었지만 칸트는 상당히 정확한 진단을 내렸다.

과학계는 뇌 관측 자료를 매일 쏟아내고 있지만 아직 뇌가 유발하는 정신 활동을 완전히 규명하지 못했다. 뇌 기능이 완전히 규명될 때 쯤이면 인간의 한계가 명확해지겠지만 지금도 부분적 뇌 정보로 통찰을 얻을 수는 있다.

심리학자나 자기 계발 강사들은 새롭게 발표되는 뇌과학 지식을 나름대로 해석하며 청중을 끌어 모은다. 차세대 기술인 인공지능도 불충분한 뇌 지식을 응용한 예이다. 그러나 지식을 잘못 적용하면 오히려 새로운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 ‘의지가 감정을 일으킨다’는 주장으로 유명한 미국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말년에 죽은 영혼과 대화하는 강령술에 빠졌는데 이는 뇌과학을 잘못 적용한 탓이다.

최근의 뇌과학에 대한 연구는 정교한 기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뇌에서 나오는 전기 신호(EEG)를 측정하는 뇌파측정기가 있고 피가 쏠린 뇌의 활성 상태를 보여주는 기능성자기공명장치(fMRI)가 대표적이다. 이런 장비를 구비하고 있지 않은 필자는 엄격한 뇌의 연구를 할 수 없지만 발표된 자료를 통해 새로운 해석이나 ‘사고 실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케플러는 브라헤가 관측한 행성의 자료로 행성의 운행 법칙을 얻었고, 갈릴레오는 피사의 사탑에서 돌을 떨어뜨리는 직접 실험이 아니라 ‘사고 실험’으로 물체의 낙하속도는 무게와 무관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필자 역시 서당개처럼 철학사를 3년 읽었으니 풍월 정도는 읊을 수 있고, 과학과 공학을 오랜동안 다루어 ‘사고 실험’도 할 수 있다. 재해석과 사고 실험을 통해 얻을 결론은 “인간은 논쟁을 수용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일 것이다.

뇌는 삼위일체다

인간의 뇌는 약 1000억 개 뉴런과 100조 개의 시냅스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를 해부학적으로 대뇌, 소뇌, 연수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미국의 생물학자 폴 도널드 맥린은 진화의 관점에서 뇌를 3개의 층으로 나눴다. 1층은 척추에서 연결되어 생존 기능을 담당하는 뇌간이고, 2층은 뇌간에서 증축된 감정 기능을 담당하는 변연계이고 3층은 변연계에서 증축된 사고 작용을 담당하는 대뇌 피질이다. 1층은 파충류의 뇌이며, 2층은 포유류의 뇌이고 3층은 인간의 뇌로 불리는데 이는 진화의 족보를 염두에 둔 비유이다.

진화 관점에서 위계적 계층 구조를 제시했지만 제어 시스템을 설계했던 필자가 보면 이는 전형적 제어 구조다. 필자가 소박하게 짓는 비닐하우스도 계층 구조로 발전하고 있다. 초기에는 비닐하우스 측면 창을 수동 개방했지만 돈이 생기자 전동 개폐장치를 달았고, 향후에 설정 온도에 따라 자동 개폐시킬 예정이다. 자동화 수준을 높이려 전선을 이어 고성능 제어기를 달듯이 뇌도 발전한다. 개선은 기존 설비를 완전히 뜯어내고 첨단 기기를 놓은 것이 아니라, 기존 설비를 최대한 활용하는 방향이다. 생물의 뇌 진화 방법도 유사하다.

비닐하우스옆 숲 속의 뱀은 1층의 뇌만 갖고 있다. 후각으로 냄새를 맡아 쥐를 쫒고 필자가 다가가면 숲 속으로 도망친다. 심장을 뛰게 하고 숨을 쉬게 하는 생존의 핵심 기능이 뇌에 들어 있다. 살아야 하니 응답이 빠르고 자율적으로 작동한다. 반면 비닐하우스 옆의 길고양이는 2층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먹이를 주면 가까이 오고 더 친해지면 쓰다듬으라며 소리를 낸다. 감정은 호르몬을 증가시키고 얼굴 근육을 변화시킨다. 제 2층의 감정 기능은 동물의 만족감을 보여주는 기능이다.

동물은 본능과 감정을 지니고 있는데 반해, 인간이 만든 기계는 기능만 있을 뿐 감정이 없다. 감정 기능을 넣고자 해도 적절한 알고리즘이 없다. 그러나 전자제품이나 기계를 유심히 살펴보면 감정에 직접 대응하는 기능은 없을지라도 감정과 유사한 기능은 지니고 있다. 자동차에는 동력 장치 외에 남은 유량을 알려주는 지시계가 있고 인공지능 바둑은 다음 수를 찍어 줄 뿐만 아니라 승리 확률도 보여준다. 갈 거리와 승리 확률은 현재 상태의 만족감을 나타내므로 일종의 감정적 정보다.

영장류의 뇌는 제3층의 사고 작용을 지니고 있다. 사고 기관은 대뇌피질인데 뇌의 가장 많은 영역을 차지한다. 대뇌피질은 시각이나 청각의 신호 등 다양한 정보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다. 대뇌피질 중에서도 인간에게는 이마 아래에 위치한 전두엽이 특징적이다. 철학적 혹은 제어적 관점에서 보면 전두엽을 통해 인간은 자기 인식이 가능하다. 동물도 환경에 반응하지만 자기 자신을 잘 모른다. 인간만이 자신을 알 수 있다.

자기 인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전두엽이 뇌의 각 부위에서 일어나는 정보들을 통합해야 한다. 뇌신경으로 사자를 보고 변연계는 두려움을 느끼지만, 전두엽은 자신이 키웠던 사자이니 무서워 말라고 조언한다. 뇌의 각 부위 정보를 종합하기 위해 전두엽은 언어를 고안했다고 필자는 본다. 이후부터 인간의 자기 인식은 언어로 이루어진다.

반면 바둑 등 여러 분야에서 인간을 이기고 있는 인공지능의 약점은 자기 인식이 없다는 점이다. 복잡한 계산을 열심히 하지만 자신의 상태를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인공지능에서는 자기의식이 ‘투명성’으로 표현되는데 불투명성 탓에 인공지능은 산업설비의 핵심 업무에 개입될 수가 없다. 어떤 요인이 결론 도출에 영향을 미쳤는지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으면 이유를 모른 채 그 요인이 배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가 갖고 있는 역량과 한계

전두엽은 언어로 논리 기능과 미학 기능을 처리한다. 인류는 논리 기능을 세계에 적용하여 지식의 발전을 이루었다. 특히 자연세계에는 동일한 법칙이 나타나므로 논리와 규칙을 찾아내기 쉽다. 법칙은 일관성이 있으므로 언어로 표현되고 기록되며 전파될 수가 있다. 칸트나 비트겐슈타인이 발견했던 인간의 능력과 한계는 자연세계에 대한 논리 기능 측면이다.

그러나 논리 기능은 법칙이 없는 사회세계에서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사회에 자연과학적 방법을 적용하려던 시도는 실패했다. 철학자들은 자연은 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지만 사회는 상황에 따라 이해되어야 한다고 타협했다. 자연과 사회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연에는 의지가 없지만 사회에는 ‘의지’라는 놈이 버티고 있다.

사회의 법과 제도는 필연적 법칙이 아니라 인위적 약속일 뿐이고 다수의 의지다. 논리가 적용되기 위해서 언제나 동일하고 변동이 없어야 하지만, 사회에서 변할 것 같지 않던 종부세 기준은 수시로 변하고, 호주제가 사라지면서 가장이라는 어휘도 사라졌다. 사회의 제도는 평등과 자유를 추구하느라 수시로 변화한다. 불변의 제도가 없으니 논리 적용에 한계가 있다.

아름다움을 다루는 예술세계를 기술하는 언어는 더욱 어렵다. 변연계에서는 감정과 감성이 작용하고 있지만, 이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변연계에서 작동하는 아름다움은 신체를 움직이므로 외설일 가능성이 높지만 전두엽은 이 아름다움을 나타낼 적당한 언어를 발견하지 못했다.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은 아름다움에 대해 긴 역사를 두고 다투었고 조선의 주자학자들도 ‘사단칠정’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논쟁을 했지만 답이 없었다.

뇌가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논리 언어로 뇌의 한계가 있다는 주장은 반쯤 맞고 반쯤 틀렸다. 인간의 뇌는 한계를 지니고 있지 않다. 1층의 본능의 뇌, 2층 감정의 뇌, 3층 사고의 뇌를 따로 바라보면 한계가 있지만 1, 2, 3층을 전체로 보는 전두엽의 입장에서는 한계가 없다. 3층의 논리적 사고로 자연세계를 이해할 수 있고 사회를 이해하려다 울화통이 생기면 2층의 감정의 뇌로 울분을 해소할 수 있다. 타인의 의지가 작동하는 사회가 내 맘에 들지 않으며 미학 논리로 나만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뇌는 인간에게 무엇을 금지시키지 않는다. 뇌는 죽음과 허무로 퇴보하기 보다는 기쁨을 찾으며 좌충우돌 진화해 왔다. 불확실한 세상에서도 이를 헤치며 나아갈 수 있도록 뇌는 최적화되어 왔다.

글쓴이

정연섭 '크로의 과학사냥' 저자

'크로의 과학사냥' 저자인 정연섭은 한국수력원자력 중앙연구원 연구원으로 재직하다 최근 퇴직했다. 서울대 화학 석사 후에 LG화학연구소, 한국전력연구원을 거쳤다. 50여 편 발표 논문, 10여 건의 특허를 등록했다. 원전 설계 및 수출로 한국원자력학회 기술상, 산자부 표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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