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예산 복원만으로는 안된다
[정연섭의 과학과 철학] 예산 삭감후 복원, 원래대로 그냥 돌아가? 과학기술정책, 제대로 가는지 반성해야 까다로운 R&D제도, 단순 능력주의로 고쳐야 우수한 과학자에 자율 수행 권한 부여해야 과정의 관리보다는 높은 목표·결과 중시로

R&D 예산 삭감과 복원
2024년 R&D 예산 삭감의 곡소리가 주변에도 들린다. 과학자 동료들은 예산이 줄어드니 R&D 협약이 지연되었다고 불만이고, 학회 회비가 부담되어 탈퇴하거나 회비를 줄여 달라는 기업도 있었다. 건설 사업 중단으로 영향을 받는 일용직 노무자처럼 과제가 지연되어 영향을 받는 일용 과학자들이 나타난 것이다. 정년퇴직한 과학자들에게는 조금만 기다리라고 위로했지만 젊은 과학자라면 비커를 잠시 내려놓고 부조리와 싸우라고 했을 듯하다.
정부는 2025년도에는 R&D 예산을 복원시킨다고 한다. 연구자 불편이 해소되고 학회의 불만도 해소되니 다행일 수는 있지만, 삭감과 복원이 한국 과학기술 자체가 지닌 문제점을 해소할 수는 없다. 예산 삭감의 이유를 R&D 카르텔로 지목하여 과학자를 모욕했지만, 한국과학기술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냉정한 반성 역시 필요하다. R&D 예산 복원이 정책 실패와 과학인의 저항의 승리로 단순하게 해석될 수 없어서다.
한국적 과학기술
식상한 표현이지만 과학기술 도입 한 세기가 지나도록 노벨상을 받지 못하는 한국 과학기술이라면 문제가 있다. 일부 과학자들은 한 우물을 파다 보면 노벨상을 저절로 받게 된다고 하지만 한 세기라면 충분히 기다린 것이다. 이제는 허황된 변명을 뿌리치고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찾아나서야 한다. 5백년 동안 중화사상에 매여 외부 세상을 보지 못하고 망했던 조선처럼 우리 만의 아집에 머물면 과학기술도 망할 수밖에 없다. R&D 예산 비중이 높았던 시기에도 우리나라 과학기술 경쟁력은 매년 떨어졌으니 R&D 예산 복원 만으로 이 추세를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비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예산 복원과 함께 혁신과 경쟁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를 도입했지만 무의식적으로 유교 도덕 사회이다. 그 사회문화 속에 관료주의가 작동하고 있다. 조선의 과거 시험처럼 지금도 입시와 고시에 목을 맨다. 부모들은 자식이 학위를 받거나 고시(考試)에 합격하여 평생 혜택을 누리기를 원한다. 민주주의의 서구나 공산주의의 중국은 고시가 없다. 세계정신을 지닌 지도자가 되려면 고시로 중간에 새치기할 수 없고, 바닥에서 시작하고 실무와 이론을 거쳐 지도자가 된다. 이론과 현실의 조화를 통해 통치하므로 상식에 맞지 않는 정책과 지시가 좀처럼 하달되지 않는다.
국내에서 창의력은 과거시험과 입시의 고득점에서 나오지 않는다. 과거나 입시 제도는 기억력 시험에 불과하여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잘 할 수 있다. 한 때의 노력으로 귀족이 된 사람들이 R&D 기획자, 평가자로 평생 역할을 하며 자유 경쟁을 막는다. 검사 카르텔이 있는 사회에서 R&D 카르텔이 없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정도의 차이일뿐이다. 사실은 우리 사회 자체가 카르텔이다. 은연 중에 작동하는 유교 이데올로기가 세대를 타고 흐른다. 자유와 자본주의를 믿고 도전했던 혁신 사업과 제도는 유교적 도덕 앞에 수시로 좌절된다. 세계 문명사는 왕과 특권 계층을 무력화시킨 역사인데, 우리 문화에는 특권 의식이 여전히 살아 있다.
우리나라 과학은 서구 근대화 제도를 도입하여 발전하였지만 들어온 서구 문명은 한국적 문화에 의해 왜곡되었고, 그만큼 과학기술이 비상하지 못하고 있다. R&D 예산의 삭감과 복원은 과학기술의 변화를 유발해야 한다. 만일 이 변화를 촉발하지 못한다면, 후세에 R&D의 퇴보가 ‘예산 삭감 탓’이라는 독박을 쓰게 될 것이다. 예산 삭감으로 받은 비난을 극복하려면, 예산 복원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우리나라가 세계 과학기술을 선도하는 성과를 내놓아야 한다.
엄밀한 과학기술 정책의 함정
197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신자유주의의 아버지다. 그는 계획경제보다는 자유경제를 주장했다. 경제에는 많은 인자들이 복잡하게 작용하므로 계획을 세워 추진하더라도 계획대로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계획보다는 자율과 경쟁에 맡길 때 경제 성장이 있다고 했다. 하이에크가 1930년대의 대공황을 극복한 나치를 비난하면서 내놓은 이론이지만, 영미에서도 케인즈의 계획경제 이론 덕에 대공황을 극복했으니 하이에크 이론이 전적으로 맞는다고 볼 수는 없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 시대에서야 하이에크는 인정받았다. 개인 자율성이 뿌리 깊은 서구 사회는 일부러 하이에크를 호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관료주의의 성향이 있는 우리 문화는 수시로 호명해야 했던 경제학자다.
우리나라의 R&D 정책을 바라보면 너무나도 계획적이다. R&D조직에서부터 제도까지 빠짐없이 구축되어 있다. 과학이 합리적이니 과학 제도도 합리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과학은 사물을 다루지만 과학정책은 과학자라는 사람을 다룬다. 과학은 객관적 법칙이 있지만 과학정책은 집단적 합의에 불과하다. 과학정책이 계획적이라고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효과를 고려하지 않는 계획을 세울수록 쓸데없는 것만 관리하게 된다. 패배적인 사람들이 타인의 사소한 행동과 말에 목을 매는 태도와 비슷하다.
서구 과학정책과 비교
미국에는 과학기술통신부가 없다. 상무부, 국방부, 국무부 등에서 자체적으로 R&D를 추진한다. 부처 간 업무 조정을 위해 백악관 안에 국가과학기술위원회, 과학기술정책실이 있다. 우리나라는 과기부가 더 있지만 과학기술자문위원회 등이 있으니 조직과 기능은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목표를 설정하고 이행하고 평가하는 R&D의 특성상 과학기술정책의 조직과 흐름이 특별히 다를 이유도 없다. 우리와의 차이는 운영의 상세함에 있다. 미국은 과제 목표를 높게 세우고 R&D를 관리한다. 특히 과제 선정 단계에서 과제의 기술적 탁월성과 효과를 강조한다. 뻔한 과제로 국가의 예산을 허비할 수 없다는 태도다.
필자는 미국전력연구원(EPRI) 과제를 수행한 적이 있다. 미국 기초과학을 지원하는 국가과학재단(NSF)에 비하면 엄격성이 떨어지겠지만 EPRI도 비슷한 R&D 선정과정을 따른다. 필자는 과제 목표를 설명하고 채택된 후에 보고서를 낸 것이 전부다. 예산관리, 진도관리 등도 거의 없다. 필자가 외국인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했겠지만 과제의 행정 역무는 거의 없었다. 미국 사회가 직업윤리로 무장되어 있고 위반 시 징벌이 분명하니 사소한 것을 관리할 필요가 적은 것이다.
미국 과학은 목표 설정과 결과를 중시하는데 반해 우리는 절차를 중시한다. 입신양명을 추구하는 과학자는 학위 받고, 혹은 고시를 통과하면 경쟁을 꺼린다. 경쟁 대신 형식을 중시하고 낮은 목표를 설정하여 과제를 성공시킨다. 평등의 이데올로기를 사회에 주입시키면서 인간애를 부각한다. 우리는 쓸데없는 것을 관리하기 위해 R&D 절차를 체계화시킨다.
과학의 즐거움
체계적 R&D가 성공적 R&D의 필요조건은 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R&D 예산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성과가 나오지 않았으니 이제 엄격한 R&D 제도를 완화해야 하는 것이 맞다. 제도의 엄밀성보다는 좋은 논문을 쓰고 유익한 제품을 개발한 과학기술자들에게 참여 기회와 연구비를 많이 주는 단순한 R&D 제도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제, 높은 과제 목표와 믿을만한 과학기술자를 우대하는 과학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과제 선정이나 과제 결과 평가자도 중요하다. 과제가 상품으로 연결되었다면 소비자가 평가할 수 있지만 중간 단계에서는 동료 평가가 중요하니 이들을 관리해야 한다.
우수한 과학자로 인정되면 그들이 과제 하나하나에 목을 매지 않도록 안정적 연구비를 지원하고 자율 수행 권한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과제의 도전적 목적을 찾고 추진하는 능력이 있어 엄격한 R&D 제도로 잡아 둘 필요가 없다. 실적이 적은 젊은 과학자는 불리할 수 있지만 이는 한시적이다. 실적이 적으며 혜택이 적다는 ‘비례 원칙’은 사회법칙이다. 실적을 쌓기 위해 젊은 과학자는 우수 과학자를 찾고 우수 과학자는 명성을 이어가기 위해 젊은 과학자와 협업을 해나간다. 신진 과학자도 실적이 누적되면 우수 과학자가 된다. 많은 실적을 낸 과학자에게 이에 비례하는 권한과 연구비를 줄 때 경쟁의 원리는 작동한다.
과학 기술의 성과는 기업에게
과학기술이 최종적으로 기업 이익으로 연결되도록 해야 한다. 공공연구기관은 기업이 수행할 수 없는 분야로 역무 분담되어야 하고, 기술이 어느 정도 성숙하여 이익이 날 수 있는 경우에는 기업에게 역무를 넘겨야 한다. 미국의 공공기관은 철저히 공익 위주의 연구를 수행한다. 초기에는 국영기관에서 인공지능이나 위성 발사 역무를 수행했지만 어느 정도 기술이 성숙되자 기업이 이어받았다. 최근에 세계의 첨단 기술은 미국 기업이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리나라의 공공기관 평가나 대학 평가도 기술이전의 배점을 높여야 한다.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은 경쟁할 수밖에 없으니 높은 목표를 세우고 기술을 개발한다. 기업은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대학과 연계하고 협력한다. 대학 교수들이 정부에만 목을 맬 이유가 없다. 기업의 연구개발을 활성화시키려면 R&D 투자에 대한 세금 감면 외에도 보조금을 지급할 수도 있다. 보조금 제도는 지급 기준이 명확하므로 많은 인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R&D 제도를 간소화시킨다는 측면에서 우리나라에서도 도입을 검토해 볼 만하다.
다양한 능력에 사라지는 불합리
우리나라의 과학체계는 지속해서 개선되었다. 과학성과 향상을 기대하며 제도 개선을 강조했다. 덕분에 과제관리 시스템에서 연구보고서를 찾기도 쉽고 연구자를 찾기도 쉽다. 그러나 과학체계가 개선된 만큼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영향력은 증가하지 않았다. 이는 과학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과학자 역량과 사회의 문화 문제로 보인다. 과학자의 관심과 흥미가 과학 자체보다는 권위와 명예에 있을 수 있다. 과학문화를 바꾸기 위해서는 철저한 실적 위주의 자원 배분 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반도체, 양자 기술 등 12개의 국가전략기술을 선정하여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 12개 전략과제는 미래에 경제 효과가 큰 기술들이라 경시할 수 없다. 선진 국가의 추진 전략을 봐도 비슷하다. 한국이 이 모든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며 선택과 집중을 요구하기도 한다. 예산이 한정되어 있을 때 선택과 집중은 나쁜 전략이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는 과학자도 많고 대부분 분야에 전공자가 있다. 전공자가 흥미를 가지고 실력을 낸다면 어느 분야든지 투자할 필요가 있다. 인위적 조정보다 연구자 실력에 따른 투자가 오히려 유리하다. 선택과 집중 전략을 채택해도 2등 과학자는 2등의 결과물밖에 낼 수 없다.
이 글은 과학에서 능력주의를 옹호한다고 비난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능력에 의한 분배가 효과적이고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능력과 경쟁을 배척한다고 인간 사회가 평등해지지 않는다. 개인은 자신의 능력을 인식하고 사회는 다양한 개인 능력을 인정할 때 사회는 평등해진다고 믿는다.
인본 사상을 추구했던 조선 사회는 국민의 60%가 노비였다. 자국민을 노비로 삼는 국가는 거의 없었다.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에서도 이상한 능력주의가 나타나며 이는 오히려 사회를 왜곡시킨다. 호랑이가 없으면 여우가 호랑이 행세를 하는 것이 동물과 인간 사회이다. 과학능력을 추구하지 않으면 비과학적인 것들이 과학자의 순위를 매긴다. 필자는 능력자가 아니며, 다행히도 능력자의 수용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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