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의 ‘거꾸로 선 포퓰리즘’...어떻게 맞설까?

[장은주의 시민을 위한 정치철학] 윤 정부, 전두환 정부 시즌 2...거칠고 무도해 트럼프당보다 악성...’합리적 보수’ 물 건너가 정권내내 이재명 사법공격...’무엇을 할 것인가’

윤석열 대통령과 전두환 전대통령의 젊은 시절 모습. 조국 전법무장관의 페북에서 캡쳐한 김의겸 의원 페북사진.
윤석열 대통령과 전두환 전대통령의 젊은 시절 모습. 조국 전법무장관의 페북에서 캡쳐한 김의겸 의원 페북사진.

‘극우화’하고 있는 윤석열 정부

연일 너무 어처구니없는 상황들이 펼쳐지고 있다. 도래한 ‘검찰정부’는 예견했던 정도보다 훨씬 악성의 방식으로 우리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있다. 국민의 힘은 점점 더 완전하게 윤석열 대통령의 사당으로 전락해 가는 모양새고, 거대 야당 민주당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우왕좌왕하고 있을 뿐이다. ‘정치’가 실종된 지는 오래고, 나라는 그냥 관성대로만 움직이는 듯하다. 심각한 경제 위기와 민생 위기가 도래하고 있지만, 정부는 노조 파괴와 부자 감세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북한의 도발과 위협은 갈수록 거칠어지고, 미국과 중국이라는 고래 싸움에 대한민국이라는 새우는 등이 터져 죽을 지경이 되어 가고 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많은 보수 정부를 겪었지만, 이번 정부처럼 그 성격을 종잡기 힘든 적은 없었다. 과거 보수 정부들에서도 권위주의적이라든가, 기득권 친화적인 지향이라든가 하는 한국 보수 정치의 기본 양상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곤 했었다. 그래도 그 정부들은 어쨌든 처음부터 ‘하려는 걸 하려 하는 정부들’이었다고 여겨졌더랬다. 그러나 이 윤석열 정부는 너무 거칠고 무도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황당하기까지 해서 도무지 그 성격을 가늠할 수가 없다. 하기야 무려 ‘검찰정부’인데 다른 보수 정부들과 무턱대고 동일시하기 쉽지 않겠다고 여기면서도, 그 기본적인 성격이 아직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의 행보를 보면 무언가 답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MB 시즌2인 줄 알았더니 전두환 시즌2다.”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단호한 대처를 통해 어느 정도 지지율을 회복하면서 자신감을 얻은 듯한 윤석열 정부를 두고 요즘 사람들이 많이 하는 이야기다. 윤 대통령은 자신이 어떤 모습을 보여야 지지율을 유지할 수 있겠는지 뒤늦게나마 깨달았다는 듯 연일 노동개혁을 입에 담으며 노조에 대한 강경기조를 유지할 태세다. 이렇게 이 정부가 민주주의 정부가 맞는가 싶게 억압적인 양상을 드러내니 사람들이 ‘독재자 전두환’을 떠올리는 거다. 꼭 전두환 식의 군사적 물리력을 통한 독재는 아닐지라도, 이제 윤석열 정부가 ‘강경 보수’를 넘어 ‘극우’로 가는 선을 넘고 있음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태극기 부대’로 상징되곤 하는 극우가 어떤 정치 지향인지 단순하게 규정하는 게 쉽지는 않지만, 가장 뚜렷한 특징은 정치적 상대를 절멸시켜야 할 ‘적’으로 보는 정치적 태도다. 극우는 정치적 상대를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 하고 어떻게든 권력을 행사해서 억눌러 없애 버리려 한다. 윤 대통령은 최근 여러 차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세력과는 대화도, 협치도 있을 수 없다는 식의 이야기를 반복했는데, 그게 단순히 추상적인 신념이나 말에 불과하지 않음이 뚜렷하게 확인되고 있다. 그는 민주당이나 노조 같은 다른 진보 세력을 진짜로 적이라고 여기는 듯한 이런 저런 정책과 행태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식의 언명과 태도야말로 다원성을 존중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원리에 정면으로 반한다는 점을 그는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

거꾸로 선 포퓰리즘

그런데 다른 나라의 경우를 보면 이런 극우 지향은 흔히 포퓰리즘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역시 단순하게 규정할 수는 없지만, 이것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의 참된 주인이라고 주장된 ‘인민(people)’과 그에 반하는 소수 기득권 엘리트 세력 사이에 극단적인 적대를 설정하는 정치다. 미국의 트럼프 전 대통령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편승한 기득권 민주당이 미국을 망쳤다고 비난하면서 ‘미국 우선주의’ 같은 깃발과 함께 불평등과 실업에 시달리던 백인 육체 노동자층을 선동하며 정권을 획득했더랬다. 이때 흑인과 소수 인종에 대한 인종차별과 혐오 조장은 가장 중요한 정치적 무기였다.

도널드 트럼프 전대통령으로 분장하거나 피켓을 든 지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는 백인 지지층. 사진=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전대통령으로 분장하거나 피켓을 든 지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는 백인 지지층. 사진=연합뉴스

윤 대통령에게서 트럼프의 모습을 보는 건 어렵지 않다. 윤 대통령은 지난 대선 과정에서는 가령 젠더와 세대 갈등을 부추겼는데, 지금은 좌파 운동권 출신이어서 문제라는 민주당 정치인들과 북핵과 같은 수준의 위협거리라는 노동조합을 포퓰리즘적인 방식으로 적대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들이 우리나라를 망치고 있기에 물리치고 몰아내야 할 핵심 기득권 엘리트라는 거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는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포퓰리즘적 공약으로 떨어지고 있던 지지율을 반등시키더니, 지금은 노동운동에 대한 유사 포퓰리즘적 대응으로 바닥권 지지율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의 정치를 마냥 다른 나라 극우 포퓰리즘 정치와 같은 선상에 세우기 힘든 측면도 있다. 이 정부는 정말 노골적이고 집요하게 대기업과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밀어 붙인다. 법인세율이나 종부세 인하에서부터 노동시간 연장은 물론 다주택자에 대한 각종 부동산규제조치 해제에 이르기까지 부자와 기득권 세력을 위한 정책을 아무런 주저 없이 너무도 당당하게 실천하려 한다. 이는 다른 나라의 극우 포퓰리즘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다.

그러니까 윤 대통령의 포퓰리즘 정치에서는 기득권 엘리트가 엉뚱하게 설정되어 있다. 미국의 트럼프만 해도 하층 백인 육체노동자를 앞세우며 이들을 위한 반세계화 보호주의나 일자리 창출 정책 같은 것을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았는데, 윤 대통령의 경우에는 오히려 다른 나라의 경우라면 가장 핵심적인 인민에 속할 노동자 계층을 적으로 상정한다. 최소한 그는 ‘일부 ‘귀족’ 노동자들이 조직화되지 못한 비정규직 노동자 같은 ‘진짜 사회적 약자들’에게 해를 끼치고 있다며 노동자들을 갈라치기하고 있다. 제대로 된 포퓰리즘이라고 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지만, 어쨌든 우리나라 정치에서는 포퓰리즘조차 짝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윤 대통령의 이 이상한 포퓰리즘을 ‘거꾸로 선 포퓰리즘’이라고 규정하면 어떨까 싶다.

이런 접근은 이 정부의 출현 배경과 정치적 기반에 놓여 있는 ‘포퓰리즘적 계기’에 주목하게 한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우리나라 대선 과정에서는 예외 없이 진보와 보수 양당 후보 말고 늘 제3의 후보가 나타나 정치 지형을 뒤흔들어 놓았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자. 그 사실은 우리나라 유권자들 중에는 기본적으로 지배적 양당체제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이 상당한 규모로 존재한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는데, 제3후보들은 바로 이런 유권자들을 포퓰리즘적인 방식으로 포획하면서 대선 국면을 뒤흔들어 놓곤 했다. 물론 모두 실패했지만, 윤석열 후보만은 예외적으로 기성 보수 정당과 연합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은 나름대로 심각한 함의를 갖는다.

윤석열의 성공은 뒤집어 보면 결국 한국 보수 정당의 포퓰리즘적 극우화를 의미한다. 이 사실 자체만으로도 한국 민주주의는 다시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고 해야 한다. 지금 국민의 힘은 이준석 전 대표를 쫓아낸 후 내년 전당대회에서 당대표를 선출하는 룰마저 바꾸며 노골적으로 ‘윤석열당’을 지향하고 있는데, 미국의 공화당이 ‘트럼프당’으로 바뀌던 과정보다 훨씬 더 악성으로 보인다. 우리에게 이는 우리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지켜 줄 ‘합리적 보수’의 주류화가 완전히 물 건너갔다는 걸 의미한다. 우리는 미국에서 트럼프가 어떻게 미국 민주주의를 세계의 우환거리로 만들었는지 똑똑하게 지켜 본 적이 있는데, 우리의 신생 민주주의에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말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정책적 방향을 보면, 극단화된 우익 정부가 나라를 어떤 방향으로 몰고 갈지는 사실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네탄야후의 극우 리쿠르당이 오랫동안 집권을 반복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강경 적대 정책으로 늘 중동 평화를 위협했는데, 나로서는 윤석열 정부가 우리 한반도를 끊임없는 긴장 상태로 몰아넣을 것 같아 무엇보다도 걱정이다. 그렇지 않아도 적대주의 정치가 난무하는 우리 사회 내부의 갈등도 극단적으로 증폭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 등에 대한 사법 공격은 아마 이 정부 내내 계속 이어질 것이고, 야권과의 최소한의 상생이나 협치도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노조에 대한 탄압은 공언했던 대로 지속될 것이고, ‘법치’를 외치지만 사실은 ‘법을 수단으로 한 지배’인 ‘법률주의(legalism)’에 기댄 새로운 권위주의적 통치는, 사회적 약자들이 가늘게 내는 목소리들마저 무참하게 짓밟아 버릴 것이다. 참으로 암담하다.

‘품위 있는 정치’를 위하여

이런 윤석열 정부의 ‘거꾸로 선 포퓰리즘 정치’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이 정부의 무도하고 황당한 정치가 열렬한 대중적 호응을 얻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걱정되는 건 윤 대통령이 사실은 자신이 무얼 하는지도 잘 모르면서 펼치는 포퓰리즘 정치의 효용에 맛 들려 계속 그 방향으로만 가려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분명한 포퓰리즘적 계기가 존재하고 또 그 때문에 이를 이용하려는 시도가 의외의 성공을 거둘 우려가 있다. 윤석열의 대통령 당선 자체가 이를 입증한다. 우리 시민들과 진보 야당들, 특히 민주당이 특별히 경계해야 하는 지점이다.

민주당은 우선 자신들의 집권기에 무엇을 잘못했기에 윤석열 식 극우 포퓰리즘에 무릎을 꿇었는지 성찰해야 한다. 미국의 민주당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일자리를 잠식당한 블루칼라 노동자층을 무시하고 버림으로써 정치적 복수를 당했다면, 한국의 민주당은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박탈감에 시달렸던 시민들을 제대로 감싸 안지 못하고 팬데믹 기간 동안 깊은 생존의 고통에 신음하던 숱한 중소 자영업자를 버리는 바람에 정권을 잃었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민주당이 이런 문제를 돌아보며 새로운 정치 노선을 확립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민주당으로서는 당연히 우선적으로 저 무주택자들과 중소 자영업자들은 물론 윤석열의 포퓰리즘이 적대시하는 노동계를 포용하는 것을 넘어 이번 정부 들어 더 철저하게 소외당하고 목소리가 억눌리고 있는 숱한 사회적 약자들을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방식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정치적 관심과 실천을 보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 어쩌고 있는가? ‘노랑봉투법’은 여전히 그냥 발의된 상태에 있을 뿐, 국회에서 어떤 진지한 논의도 되지 못하고 있다. 장애인들의 차별철폐를 향한 그 처절한 외침에도 관련 예산은 그저 생색내기로만 반영했다. 문재인 케어를 없애겠다는 정부 방침에도 어떤 저항도 못하고 있다.

어쩌면 포퓰리즘은 민주당 쪽도 포획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의 강경 친문 지지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지금은 ‘수박’에 맞선다는 이른바 ‘개딸’을 비롯한 민주당 개혁파 지지자들 사이에서 그 유령이 아른거린다. 여기서는 개혁과 진보에 대한 강한 정치적 지향과 의지가 좁은 핵심 지지층을 중심으로 한 폐쇄적 ‘정체성의 정치’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정치는 적극적 지지층 바깥의 중도적 유권자들을 배제함으로써 오히려 민주당을 정치적 수세로 몰아넣는 ‘뺄셈의 정치’로 귀결될 우려가 크다. 실제로 이는 지난 서울 및 부산 시장 재보궐 선거 이후 민주당의 계속된 선거 패배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로 지적되고 있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지금도 전혀 그런 정체성의 정치 양식에서 벗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윤석열 정부와 검찰의 교묘한 칼날에 맞서야 한다는 절박한 사정이 없는 것은 아니나, 지금 민주당의 많은 개혁 정치인들은 어떻게든 ‘수박파’의 이탈을 막고 윤석열 정부와 선명하게 맞서는 데서만 정치적 존재 이유를 찾으려 하는 것 같다. 법사위가 법안 자구 해석 권한을 통해 입법의 최고 심급으로 작동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비정상적인 국회 운영규칙을 핑계 삼아, 민주당은 지금 거대 다수당의 지위를 제대로 활용한 민주적 정당 정치의 모습을 조금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은 일부 열렬 지지자들의 요구와 시선에만 반응하는 정체성의 정치를 넘어서야 한다. 대신 윤석열 정부의 ‘거꾸로 선 포퓰리즘’에 맞서 더 많은 시민의 요구와 삶의 문제들에 반응하고 우리 대한민국을 제대로 민주공화국답게 만들기 위한 포용적이고 ‘품위 있는 정치(decent politics)’를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극우 포퓰리즘에 맞설 수 있는 정치는 정체성의 정치도, 또 다른 포퓰리즘도 아니다. 민주공화국의 시민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참된 민주적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치만이 윤석열 식 포퓰리즘의 혐오와 갈라치기 정치 양식에 맞설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우리 사회의 포퓰리즘적 계기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거대 양당체제가 만든 모종의 ‘정치적 카르텔’ 때문에 형성된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한 두 거대 정당의 적대적 공생관계가 우리 사회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정치적 요구들을 제대로 받아 안지 못한 데서 근본 문제가 생겨났다고 보아야 한다. 적극적으로 좋은 정치를 함으로써가 아니라 상대의 실책에 기대 권력을 획득하려 하는 정치, 또 그런 만큼 끊임없이 상대를 악마화하는 데만 초점을 두는 두 거대정당의 정치에 대한 많은 유권자들의 실망과 염증이 한국적 포퓰리즘의 배경인 것이다. 그런 만큼 나는 민주당이 무엇보다도, 여당의 실정에 맞선 즉자적이고 근시안적인 대결에만 매몰될 것이 아니라, 우리 민주주의 자체의 근본적인 한계들을 성찰하면서 그것들을 교정하기 위한 노력에 나서 줄 것을 주문하고 싶다.

지난 8월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당대표 선출 직후 경남 양산시 하북면 평산마을 사저로 문재인 전대통령을 예방하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지난 8월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당대표 선출 직후 경남 양산시 하북면 평산마을 사저로 문재인 전대통령을 예방하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지금 우리 정치의 문제는 단순히 대통령이 윤석열이라서 문제가 아님은 분명하다. 지금 우리 민주주의와 정치의 위기는 민주당이 압도적 다수 여당이던 문재인 정부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도 국민의 힘이 부리던 몽니를 제대로 제어하지도 못했고 ‘검란’에는 그저 속수무책이었다. 문 전대통령 개인의 정치적 성향을 문제 삼는 이들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대통령이었더라도 상황이 크게 바뀌지 않았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왜냐하면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의 정치 체제, 곧 ‘제6공화국’의 ‘87년 체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개헌과 선거제도 개편 같은 ‘정치 개혁’은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민주당의 핵심 과제가 되어야 한다. 정치가 수행해야 할 궁극적인 과제 해결에는 무서울 정도로 무능하면서 끊임없는 교착상태 속에서 진영 대결만 무한 반복하는 우리 정치의 양상은, 그냥 그 속에 있는 정치인들의 부족한 자질이나 성향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일그러진 민주주의 체제 자체가 구조적으로 잉태한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품위 있는 정치는 어떻게든 이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그 해결을 위한 결정적 돌파구를 찾아내야 한다. 민주당의 분투를 빈다.

글쓴이

장은주 영산대 교수

장은주는 영산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정치철학자다. 어떻게 하면 한국 민주주의가 좀 더 안정되고 성숙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필요한 철학적 인식을 다듬는 게 주된 관심사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괴테 대학에서 ‘비판사회이론’을 공부해서 학위를 받았는데, 한국 사회의 고유한 삶의 문법과 발전 동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독자적인 이론을 만들고 싶어 한다. 최근에는 시민들의 민주적 역량 함양을 위한 민주시민교육에 관심이 많다. <인권의 철학>, <정치의 이동>, <유교적 근대성의 미래>, <시민교육이 희망이다> 같은 책을 썼다. 최근에는 우리 사회의 능력주의적 공정 담론을 비판적으로 해부하고 ‘민주적 평등주의‘라는 대안을 제시한 <공정의 배신>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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